491화
상미는 도진을 보며 산다. 해바라기처럼.
도진을 위해 행동하며 도진에게 누가 될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문강의 비무를 받아들인 것 또한 자신만을 생각하여 한 일이 아니었다.
뻔히 보이는 도발과 수작으로 이문강이 요구했던 비무에 응하여 도진에게 문제가 생길 것이었다면 상미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이문강에게 고개를 숙이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상미였다.
즉. 상미는 비무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는 거다.
감히 그녀의 모든 것인 구세주에게 무례했던 양아치를 이길 자신이.
그 자신의 근거가 된 것이 빙해(氷瀣)였고 제대로 적중하여 이문강을 몰아붙이는 데 성공했다.
극성에 이르면 상대를 안에서부터 얼려 얼음 동상으로 만들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수법.
아직 경지가 부족한 상미에겐 이문강의 육체를 미세하게 느려지게 만드는 게 한계였으나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내공으로 몸을 보호했으나 그 내공마저 한기에 느려지게 만듦으로써 이문강은 감각을 미묘하게 따라가지 못하는 육체에 파탄이 일어났고 상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빠각!
턱을 후려치고.
뻑!
발목을 걷어찬다.
이문강은 자신보다 훨씬 작고 여리여리한 소녀에게 얻어맞는 꼴이 됐다.
지켜보는 이들이 수없이 많은 상황에서 다시없을 굴욕.
이 또한 상미가 의도한 그림이었다.
뇌가 흔들리고 복사뼈가 부서질 수도 있는 타격.
그러나 그러지 못한 건 상미의 공격에 내공을 운용하는 이문강의 방어를 뚫을 만큼의 힘과 내공이 실리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는 빙해에 모든 내공을 운용한 것이 원인이다.
세간에서 말하는 대로 상미의 내공은 충분치 못하다.
그 천재성으로 한천검공의 경지를 높여 빙해를 운용할 수 있게 됐지만 내공의 부족으로 그 깨달음만큼의 빙해를 운용하지 못할 만큼.
하지만 괜찮다.
타격에 의한 피해는 충분히 누적되고 있었고 계속 두드리다 보면 이문강은 무너진다.
그렇게 두드리는 시간 자체가 이문강에 대한 '벌'도 되니까.
그런 생각으로 한없이 집중하여 혹시 모를 방심에 의한 불상사를 차단하던 상미는.
쿠오오오오!
"……!"
돌연 거대해진 이문강의 기세에 긴장하며 몸을 물렸다.
본능의 단계에서 경종이 울린다.
그리고 이문강이 분노한 맹수와 같은 얼굴로 반격하려던 그 순간.
"그만!"
외부에서 한가득 내공이 담긴 목소리가 비무에 끼어든 것이었다.
"뭐야?"
"어? 교수님."
비무에 완전히 빠져들었던 구경꾼들이 술렁인다.
비무를 중단시킨 건 교수였다. 제법 힘이 있는.
노년의 그는 그러나 초절정의 경지로 인해 중년으로 보였고 무엇보다 의천검가에 줄을 댄 인물이었다.
이문강 또한 잘 아는 이였기에 분노한 맹수 같았던 기세가 잦아들었다.
"무슨 일입니까?"
어느새 상미의 곁에 선 도진이 물었다.
학생이지만 경시할 수 없는 도진의 물음에 교수가 얼굴을 굳힌 채 말했다.
"이 비무가 집행부와 상무연 간의 싸움으로 변질된 상황이라 부득이하게 끼어들게 됐다."
그의 설명은 그랬다.
워낙 엄청난 비무이다 보니 소문이 퍼져 나가고 구경꾼이 생기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문제는 그 과도한 관심이 필요 이상으로 번지며 외적인 문제가 생겼다는 거다.
"벌써부터 외부에서 불필요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심지어 돈을 걸고 내기를 하는 이들마저 나왔다고 한다. 문제없이 성사된 비무에는 원칙적으로 개입하지 않아야 하지만…… 이번은 예외를 두어야 할 것 같군."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설명을 들은 도진은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이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니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기울었고 비무는 중단되었다.
이문강은 복잡한 얼굴이었으나 그 자리에서 이의는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비무가 중단되고 돌아가는 길에 도진은 상미의 등을 토닥이며 칭찬해 주었다.
"잘했어, 상미야."
"아, 네!"
놀란 토끼와 같은 얼굴로, 그러나 도진의 칭찬에 그저 기뻐하며 발간 볼로 상미가 답했다.
상미가 왜 비무를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어떤 맘으로 임했는지 알고 있었기에 도진은 칭찬을 해 주어야만 했고 그 칭찬만으로도 상미는 일주일은 행복한 얼굴로 미소지을 수 있었다.
반대로 이문강은 분노를 떨쳐낼 수 없는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이문강 쳐맞는 영상.avi
-ㅋㅋㅋㅋㅋ 와 빙봉이 때리니까 진짜 그림이 되네.
-화화공룡 개... 아니 나쁜놈아 ㅠㅠㅠㅠㅠ
-이번만큼은 화화공룡 욕해도 무죄인듯.
-빙봉이 잠룡만 보는 죄는 너무 무겁다..
윤상미가 이문강과의 비무에서 철저하게 밀리는 듯하다 드라마틱하게 역전했다.
그리고 이문강을 몰아치는 윤상미의 모습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또래를 홀리기에 충분할 만큼 아름다웠기에.
온갖 커뮤니티에서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그것이 단순히 학생 간의 비무가 아니라 약자가 강자를, 집행부원이 양아치를 정의구현한 구도였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빙봉의 명성은 수직으로 치솟고 패룡의 이름은 조롱거리가 되었다.
-도발하고 오히려 얻어쳐맞은 이문강 쪽팔려서 어쩌냐 ㅋㅋㅋ
-어쩌긴 버로우 업그레이드 해야지.
-그게 몬 소리임?
-아재요, 요새 애들은 그런 말 몰라요..
겨우 뒤집었던 여론이 다시 나빠진다.
-근데 계속했으면 비무 어떻게 됐을까?
-? 윤상미 이긴 거 아님 이미?
-아니 그건 모르지. 마지막 윤상미가 휙 물러나고 이문강이 뭘 하려던 순간에 끊겼잖아.
-그건 그렇네?
-게다가 윤상미가 몰아붙이긴 했는데 정작 확실한 타격은 하나도 없었음.
-그걸 님이 어케 앎? 이문강 본인임?
-아니, 생각을 좀;; 윤상미가 턱이나 옆구리 같은 급소들 때렸는데 이문강 자세가 안 무너졌잖아. 그건 유효타가 안 됐다는 소리임.
-설득력이.. 있네?
-윤상미가 내공에서 여유가 없었다는 증거임. 그리고 이문강이 숨겨둔 수가 있었으면 결국 결과는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는 거지.
그리고 그렇게 바뀌었던 여론은 어느 순간 비무에 관한 논쟁으로 번져 있었다.
이문강이 졌다, 아니 그건 모르는 거다, 계속 했으면 이문강이 이겼을 거다, 로.
도진은 나지윤과 함께 한 자리에서 그 여론에 피식 웃었다.
"의천검가가 열심히 물타기 중이네."
"그럴 수밖에 없지."
이문강은 금화와의 공을 들인 합작 프로젝트의 중심이다.
좋지 않았던 여론까지 포함하여 그것을 반전시키고 무림을 이끌 고수가 되어야 할 후계자의 명성을 의천검가는 어떻게든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여론의 반발을 사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름을 바꾸는 것이었고 그를 위해 익명의 논쟁에 '댓글 부대'를 투입,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들의 작업은 인터넷에만 머물지 않았으니.
-오늘은 화제의 두 후기지수, 차세대 무림을 이끌어 나갈 패룡 이문강과 금봉 한유아 두 분을 모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이문강입니다.
-한유아입니다.
바로 TV 토크쇼에 출연한 것이었다.
이문강만이 아닌 한유아도 함께 하고 있었는데, 도진은 TV 너머임에도 신안으로 한유아가 결코 내키지 않는 자리에 나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른 여러 선진국에서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무림의 정예 집단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히어로 리그'가 대표적이죠. 이번 합작 프로젝트는 한국에서도 그런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무력 단체를 한 번 만들어보자는 의천검가와 금화의 의기투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장 무복을 차려입고 방송용 이미지를 한껏 갖춘 이문강이 이번 프로젝트에 관해 홍보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그 사건'이 나왔다.
-일전 빙봉으로 유명한 후기지수 한 분과 비무를 하셨던 게 지금도 화제가 되어 있는데요.
진행자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자 이문강은 오히려 반기듯 답했다.
-예, 그랬죠. 안 그래도 거기에 관해 한 번 속시원하게 말을 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쉽지 않았습니다.
대범한 척 그렇게 이문강이 말하고 한유아가 이어받았다.
-이문강 씨도 무림 르네상스 키즈라 불리는 세대의 사람이지만, 또 저를 포함한 요즘 세대는 그 이상으로 황금 세대라 불리고 있잖아요? 그런 면을 보여준 비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한 해가 다르게 무림은 발전하고 있죠.
-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문강 씨가 소위 말하는 장강의 앞 물결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저는 보고 있어요. 그것은 앞으로 있을 많은 기회, 그리고 실전에서 증명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렇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대범한 척, 후배의 성취를 칭찬하는 척하는 이문강과 그런 이문강을 커버해 주는 한유아의 모습은 역시나 많은 이야기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와.. 한유아가 이문강을 감싸네;;
-쩝. 어쩔 수 없지. 집안끼리 큰 프로젝트를 하고 있으니 한유아 입장에서는 저렇게 비즈니스를 할 수밖에 없는 거니까. 그래도 좀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
의천검가의 비호감 이미지는 이문강이 아니더라도 상당했다.
때문에 거기에 화룡점정을 찍었던 이문강을 비호해 준 한유아에 대해 아쉬워하는 이야기가 많은 가운데 비무에 대한 이야기도 돌았다.
-사실 이문강이 힘을 많이 빼긴 했지.
-?몬 개소리임?
-이문강이 원래 실전에서 강함. 스타일이 그래서 상대를 다치게 할 수밖에 없어서. 그러니까 비무가 되면 이문강은 셀프 패널티를 안고 싸울 수밖에 없는 거지.
-이문강이 유독 비무에서 그런 면이 있음. 게다가 입장상 비무에서 누구 다치게 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도 있었을 테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댓글 부대가 출동하여 북치고 장구치며 이문강의 여론을 바꾸기 위해 애를 썼다.
그 광범위한 노력 덕분에 어느 정도는 비무의 여파가 가셨지만.
빠악!
이문강의 분노는 가실 줄을 몰랐다.
"일어서, 이 새끼야!"
으르렁거리는 이문강의 앞에는 넝마가 된 이문호 패거리가 있다.
대련이라는 미명 하에 이문강이 폭력으로 분노를 푸는 것이다.
하지만 이문호 패거리를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니 여론전에서 사용된 논리대로 힘을 '절제'해야 했던 이문강의 화는 풀릴 줄을 몰랐고 고함을 내지르며 쇳덩이를 두들기는 지경까지 왔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개 씨바아아아아아알!!"
이길 수 있는 상대였다.
방심하여 당한 것이었고 심지어 같은 상황이 되었더라도 비무가 아닌 실전이었더라면.
윤상미는 이미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건 수술을 하고 있었을 거다.
그나마도 이문강의 자비가 있어야만 그런 기회나마 잡을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비무'를 한다면 그 수법에 당하지 않을 자신도 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이문강의 화는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호오."
그 화를 풀 수 있는 무언가가, 돌연 이문강의 눈에 들어왔다.
"큭, 큭큭큭."
이문강이 웃는다.
요 근래 웃을 일이 없었는데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올 만큼, 머릿속에 떠올라 착착 구체화되는 계획이 실행되었을 때의 일이 기대가 되었다.
그리고.
꽈아아앙!
콰과과과광!!
이문강이 사용하던 수련장을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새로 지어야 할 정도로 철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