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9화
일진들이 설치지 못하고 숨죽이던 숭무고의 분위기가 완전히 변했다.
그것은 단순히 분위기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에 극명하게 반영되었다.
"야."
양아치 하나가 다가와 턱짓을 하니 자리에 앉아 수업을 준비하던 소심해 보이는 숭무영재고의 학생이 움찔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하나에서 끝난 게 아니라 주변에 있던 같은 그룹의 학생들이 모두 일어나 물러나니 양아치는 피식 웃고선 그 자지를 차지해 버렸다.
…저번 학기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아니, 저번 학기만이 아니라 김도진이 숭무회를 쓸어 버린 뒤로 결코 볼 수 없던 모습이다.
그것이 이렇게 바뀐 건 예의 징계위원회 결과 때문이다.
일진 티를 내고 일진 행세를 하면 무사하지 못한다.
숭무고에 퍼져 있던 그 관념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인식이 퍼져 나감으로써.
이렇게 수업 전 대놓고 일진 노릇을 하는 녀석들이 늘어났다.
"중림아."
그런 녀석들을 삐딱하게 앉아 지켜보던 조중림에게로 그의 친구들이 다가왔다.
조중림을 중심으로 하는 이 그룹은 따지자면 일진 그룹이다.
그것도 하위권이 아니라 상위권의.
하지만 그들의 리더인 조중림이 처신을 워낙 잘하는 타입이다 보니 지금껏 교내에서 이렇다 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그 무리 중 한 명이 어떤 광고지 같은 걸 가져와 조중림에게 내밀었다.
"우리는 여기 가입 안 할 거야?"
"흐음."
조중림이 종이를 받아들어 확인한다.
사실 내용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상승 무공 연구회.'
이문강이 새로운 동아리를 하나 만들었다.
그 이름은 상승 무공 연구회로, 결론부터 간단히 말하자면 바로 그 숭무회를 계승하는 일진 클럽이다.
이문강이 회장으로 있는 이 동아리는 벌써부터 숭무고 내에서 손꼽히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니 일진 노릇을 하는 녀석들 대부분이 가입을 한 것이 그 이유다.
비공식적으로 이문강이 말했다.
상승 무공 연구회에 가입하면 '필요할 때'에 얼마든지 도움을 주겠다고.
그래도 꼴에 숭무고에서 일진 노릇을 할 정도인 녀석들은 그 안에 담긴 뜻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상승 무공 연구회, 상무연에 가입하면 김도진에게서 보호를 해 주겠다는 뜻이다. 일전 징계위원회에서처럼.
그 이야기를 들은 억눌려 있던 일진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가 상무연에 가입을 했고 상무연은 대번에 거대한 세력이 되었다.
-지금 당장은 대놓고 문제가 될 일을 벌이지는 마라.
-어디까지나 명확하게 지적을 하지 못하는 선에서 행동해라.
-그렇게만 하면 김도진이라 해도 너희를 어쩌지 못할 거다.
상무연에서 이문강은 이런 식으로 말을 했고 그 결과 일진 녀석들은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명확하게 지적하기엔 미묘한 선을 타고 있었다.
아까의 경우가 바로 대표적인 예다.
일진 녀석은 그냥 한 마디를 했을 뿐인데 숭무영재고의 소심한 학생이 '멋대로' 움직인 그림.
그래서는 안 된다고 지적을 할 수야 있지만 따지고 들면, '내가 뭘 했는데?'라고 하면 어떻게 대답을 하기 힘든 그런 행위들이 숭무고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흐름에 조중림의 그룹이 편승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아무리 조중림이 리더라고 해도 이런 걸 덮어놓고 억누르려 하면 반발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조중림은 숨을 한 번 내쉬고 말했다.
"아직은 아니야."
"왜?"
"어디에 줄을 서야 할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움직이는 건 병신들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이지."
"?"
똑같은 숭무고생이라는 게 고개를 젓게 만드는 좀 모자란 친구들을 위해 조중림이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자, 지금 보면 이 새끼들 완전 살판났는데 따지고 보면 저거 뒤지기 딱 좋은 거야."
"저번 일은 서태주가 좀 성급하게, 독단적으로 일처리를 한 부분이 분명히 있어. 그러니까 어찌됐든 봉사 활동을 하게 된 거고 벌점 부과도 취소된 거지."
"물론 그렇게 만든 게 이문강 선배인 건 맞는데, 중요한 건 그게 도진 선배 일처리가 아니었다는 거야."
"도진 선배?"
"그래. 서태주가 한 일이었지 도진 선배가 한 일이 아니잖아."
"아……."
대충 알겠다는 얼굴이 반, 아직 모르겠다는 얼굴이 반.
"그러니까. 도진 선배가 직접 나서면 깝치다가 뒤지는 수가 있다고 새끼들아."
"아, 그렇구나."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아주 크고 중요한 한 가지.
그것은 아직 김도진이 제대로 나서지 않았다는 거다.
"문강 선배는 그걸 감안해서 대놓고 문제될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하신 건데, 저 빡대가리들 중에 분명히 사고치는 새끼들이 나올 거다."
생각이 모자란 놈들이 꼭 그렇다.
하라는 대로 안하고 신이 나서 깝치다가 문제를 일으킨다.
"그리고 도진 선배가 분명히 가만 안 놔둘 테지. 우리는 그거까지 보고 줄 서면 돼."
한 무리로 얽혔다가 피폭당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제 3자의 입장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일단은 지켜본다.
만약 그 사고가 터지고서도 이문강이 승기를 가져간다면 조중림은 이문강에 붙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처신 잘하고 눈치 좋은 조중림은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 이유로 아직 상무연에 들지 않고 간을 보고 있었다.
"아, 그렇구나."
중학생 때부터 일진 노릇을 했던 조중림 그룹의 양아치들은 조중림의 말에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웬만하면 뭘 그렇게 간을 보냐고 했을 텐데 그 대상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시무시한 김도진이다 보니 대번에 납득을 한 것이다.
덕분에 조중림은 신중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고.
"뭐 이 씨발 새끼야?!"
조중림이 기다리던 사건이 불과 이틀도 지나지 않아 터졌다.
콰당탕!!
점심 시간.
빈 강의실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왜 우리가 비켜줘야 되냐고!"
"이 씹새끼가!"
빠악!
자리 싸움이었다.
꼭 여기서 먹어야 한다거나 그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닌, 그래서 더욱 불합리한 일진들의 퇴거 강요에 학생들이 목소리를 높인 것.
그로 인해 일어난 폭력 사건에 소란이 일어났고 누군가가 집행부에 연락을 넣었다.
"감사합니다."
연락을 받고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윤상미였다.
윤상미는 연락을 받자마자 우벽진 명장이 선물해 준 명검, 난상(蘭霜)을 챙겨 들고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금방 해당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고 계단을 통하여 폭력 사건이 일어난 2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뭐야. 윤상미잖아."
"……."
복도를 가로막고 있는 이문강과 일진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일진 양아치들의 역겨운 시선이 어색하게, 그래서 더욱 기분 나쁘게 윤상미를 훑는다.
거기에 날것 그대로의 노린내가 나는 듯한 짐승의 시선이 그 이상으로 명확하게 윤상미를 담고 있었다.
너무나 기분 나쁜 그 시선에 윤상미는 빠르게 그들을 스쳐지나가려 했고.
슥-
"……!"
가슴팍을 노리고 뻗은 이문강의 손에 크게 놀라 뒤로 몸을 물려야 했다.
"…뭐하는 겁니까."
분노한 얼굴로 상미가 물었다.
그 얼굴에.
"뭐하냐고? 하."
오히려 이문강이 굳은 얼굴로 받아쳤다.
"선배를 보고도 인사도 없이 가게 돼 있냐? 저번에도 그러더니 아주 상습적이야?"
"……."
순간 말문이 막힌 건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실수를 했다는 생각.
동시에 저 역겨운 놈에 대한 분노.
그리하여 입을 열지 못하고 차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던 상미를 노려보며 이문강이 말했다.
"너. 버릇을 좀 고쳐줘야겠다."
"……."
"윤상미. 비무다. 따라와라."
* * * *
이 세상엔 거시적인 관점에서 무공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장치들이 여럿 마련되어 있으니 관습은 물론이요 법(法)적으로도 그런 의도가 담긴 것들이 여럿 있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대립이 있을 때 비무로 결론을 내도록 한 숭무고의 학칙(學則) 또한 그런 의도로 마련된 것이었다.
바로 그 비무를, 이문강과 윤상미가 하게 됐다는 소식에 숭무고가 뒤집어졌다.
-아니 미친?
-이문강이랑 윤상미라고?;;;
-아니 시발 갑자기 이게 뭐냐;;
예고도 없이 벌어진 대형 사건에 에타는 뒤집어졌고 방과 후 비무가 치러질 공터에는 구름처럼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문강과 윤상미의 비무는 그 자체로도 어마어마한 사건이지만 그 결과는 심지어 비무를 아득히 넘을 만큼의 여파를 몰고 올 것이었기에 지켜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윤상미가 좀 무모한 거 같은데."
"그러게. 아무리 윤상미라도 이문강을 어떻게 이기겠어."
"이문강이 또 수작 부려서 판 짠 거 아니겠냐."
섭음술로 수군거리는 학생들은 대체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비무란 서로가 동의해야만 성립이 된다.
그것이 성립되었다는 건 윤상미가 이문강과의 비무에 동의를 했다는 건데 이건 무리수였다.
초절정에 이른, 그것도 무려 스물둘이 될 동안 무공을 수련한 이문강을 상대로 제아무리 빙봉으로 이름 높다지만 아직 열여덟인 윤상미가 싸움이 되겠느냐는 거다.
그러니까 학생들은 모두 이문강이 짠 판에 윤상미가 말려들어서 결과가 뻔함에도 비무를 거절하지 못해 여기까지 온 거라 생각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비무대 위의 이문강이 비릿하게 웃었다.
'꼴에 자존심만 높은 년이니까 말이야.'
윤상미의 과거에 대해 이문강은 조사를 통하여 잘 알고 있었다.
좀 훑어 주면 쉽사리 도발에 걸려들 것이었고 꼬투리를 잡아 비무로 끌어들이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안 하겠다는 소릴 못할 거라 생각했고 그대로 들어맞았다.
비무는 성립해 버렸고 이제 물릴 수 없다.
그리고 결과는 정해져 있었으니 아주 비참하게 바닥을 기게 해 줄 생각이다.
여기에는 김도진이라 해도 개입할 수 없다.
비무는 당사자들간의 문제이며 희소한 예외에 해당되지 않고선 가족이 아니고서야 대신 나설 수 없는 것이니까.
김도진과 윤상미는 가족이 아니었고 그 희소한 예외에도 이 비무는 포함되지 않으니 변수는 없다.
그리하여 비참하게, 철저하게 패배한 윤상미를 본보기로 하여 집행부의 명예를 진창에 처박아 버리는 거다.
그 뒤로는 쉽다.
김도진과의 승부를 할 것도 없이 집행부는 몰락할 것이고 상무연이 단단하게 자리를 잡게 되는 계획이 이미 이문강의 머릿속에는 완성되어 있었다.
'막기엔 늦었다. 어쩔 거냐?'
어느새 자리를 잡고 지켜보는 김도진과 눈이 맞았다.
이문강은 입꼬리를 올리며 눈으로 물었고.
"……."
김도진은 그걸 아예 없는 취급하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래, 그런단 말이지.'
눈을 피하는 게 아니라 무시를 했다.
거기에 이문강은 기분이 나빠졌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
지금 중요한 건 거미줄에 걸려든 이 맛있어 보이는 나비를 유린하는 것이었으니까.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만져줄 생각이다.
그의 가학적인 성격이 성욕마저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가득 담긴 더러운 시선으로 윤상미를 보고 있는 이문강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담담히 난상을 뽑아드는 윤상미가, 오히려 이 비무를 더욱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스르릉…….
은은한 향기가 담긴 시리도록 차가운 한기가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