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화
개강을 하루 앞둔 일요일.
집행부실에는 이문호 패거리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집행부 멤버들이 모여 점심을 함께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3학년에 도진과 소담.
2학년에 우서진과 윤상미, 클로에, 약리지, 벽태웅.
그리고 1학년 새내기 성민혁과 성지인까지.
상당히 많은 멤버가 이렇게 모인 건 별달리 특별한 약속이나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라 그저 '어쩌다 보니'였다.
말 그대로 어쩌다 학교 내에서 몇 명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함께 점심을 먹게 되었고 이래저래 연락을 하다 이렇게나 모이게 된 거다.
그것이 충분한 개연성을 가질 만큼, 지금 집행부 멤버들의 인연이 깊다는 걸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시선이 모이니까 밖에서 먹는 대신 집행부실에 모여 배달 음식을 주문해 먹기로 했다.
그런 이유로 집행부실의 넓은 테이블 위에는 피자에 치킨 등 호화로운 음식들이 펼쳐져 있었는데 모두 무림인을 위한 퓨어 푸드다.
몸에 좋지 않은 요소는 최대한 제거하고 영양소는 풍부하게, 그러면서 맛도 보장하는 퓨어 푸드는 설탕을 제거한 제로 콜라가 그렇듯 일반 음식보다 비싸다. 그것도 훨씬.
그러나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그걸 신경 쓸 사람은 없었으니 테이블이 부러져라 마음 놓고 주문한 것이다.
도진은 그렇게 펼쳐진 치킨을 한 입 먹고선 이렇게 평가했다.
"맛있긴 한데 제로 콜라 마시는 느낌이네."
검증된 브랜드의 가장 비싼 음식을 주문했으니 과연 맛있긴 하다.
하지만 역시나 '퓨어 푸드'다 보니 아쉬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약리지가 토끼처럼 샐러드를 '옴뇸뇸'하다 물었다.
"그게 어떤 느낌인데요?"
귀여운 모습에 도진이 피식 웃고선 설명해 주었다.
"흔히 그러잖아. 몸에 안 좋은 만큼 맛있다고. 이건 몸에 좋은 만큼 맛에 디버프가 걸린 느낌이야."
"선배의 설명은 알 것 같으면서도 알쏭달쏭하네요."
약리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렇게 평하고선 이어 말했다.
"근데 그거보다, 선배는 음식도 시간도 안 가리고 드실 수 있는 게 제일 부러워요."
"응, 그건 나도 동감."
"저도요."
약리지의 말에 우서진과 성민혁이 격렬히 공감했으며 성지인 또한 교주님에게 불경한 마음을 품어선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인이기에 더더욱 몸의 관리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렇게 퓨어 푸드를 먹는 것만 해도 조심스러운데 도진은 그런 거 없다.
설탕을 들이부은 콜라고 기름에 튀긴 치킨이고 그냥 먹는 거다.
심지어 야심한 새벽에도.
그러면서도 저 말도 안 되는 팔뚝을 보고 있자니 새삼 불공평함을 느끼곤 한다.
'…보기 좋긴 하지만.'
그리고 몰래 그런 생각을 더하는 약리지다.
"지은 선배로 또 난리네요."
이어지는 주제는 유지은이다.
검봉(劍鳳).
시대를 대표하는 원조 천재이자 최고, 최강의 후기지수였던 선배다.
도진의 등장으로 다소 빛이 바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넘어 '고금'의 단위에서 천재로 손꼽힐 사람인 건 여전히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사람.
그 유지은이 이번에 A-1 자격증을 따 버렸다.
-네가 땄는데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그런 말을 도진과 나누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로 덜컥 A-1 자격증을 따버렸고 그 여파는 이문강의 이야기를 완전히 덮어 버릴 정도로 대단했다.
-우락부락한 남정네보다 내가 따는 게 당연히 더 반응이 좋을 수밖에 없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유지은은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된다는 의도로 그렇게 말했고 도진은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그럼요. 선배 같이 예쁜 사람이 따는 게 당연히 더 화제가 될 수밖에 없죠.
그리고 실제로 더 화제가 된 것도 사실이다.
젊은 나이에 초절정의 경지를 증명한 후기지수가 한국에서만 한 명도 아니고 두 명도 아니고 무려 세 명이 나왔으니까.
그 이슈를 다룬 칼럼 중 하나가 특히 유명해졌다.
-……잠룡에 패룡, 그리고 검봉까지. 우리는 무림 르네상스 이후 눈부시게 발전한 무림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그들을 통해 체감하고 있는 것이다.
뭐 그런 내용의 칼럼이었는데 도진과 유지은을 치켜세워 주면서 은근슬쩍, 알게 모르게 이문강을 같은 선상에 두며 이미지 세탁을 하려는 의도가 보여 기억에 남았다.
"리지 너도 몇 년 내로 A-1 따야지."
"…전 그거보다 의사 자격증 먼저 따야 되는데요."
"그럼 까짓거 둘 다 같이 따자."
"아잇!"
그런 느낌으로 가벼운 잡담을 나누며 점심을 다 먹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과 생과일 주스를 주문해 음미하며 조금은 불편한 이야기가 나왔다.
"내일부터는 사람이 한 명 늘겠네요."
자몽 주스를 홀짝이며 이번에도 약리지가 이야기를 꺼냈다.
그 '한 명'이 누구인지 모두 알았기에 불편함이 분위기에 섞이고 만다.
이문강.
무려 5년간의 폐관수련을 끝내고 스물두 살의 나이에 2학년으로 복학하는 '전설의 양아치'.
그는 복학하며 수강 신청까지 완료했으니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숭무고의 학생이었다.
"그 선배, 집행부에서 제명되지 않았잖아요."
그리고, 집행부원이기도 했다.
당시의 사건은 사상 초유였으며 숭무고를 완전히 뒤집어 버린 사건이었다.
때문에 빠르게 수습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는 주먹구구식 처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 흔적이 이문강의 집행부원 자격 유지였다.
언뜻 생각하면 당연히 제명되었어야 했는데 그게 안 되어 있었던 거다.
물론 숭무고의 일처리였던 만큼 이유가 없지는 않았다.
"무혐의가 나왔으니 말이지. 제명 사유가 되지 않았으니까."
그냥 집행부원도 아니고 부장의 자리에 있던 의천검가의 이문강이다.
제명하기 위해선 충분한 사유가 있어야 했는데 재판의 결과를 기다려야 했고 무혐의가 나오면서 제명 사유가 되지 못한 것이었다.
"조금 걱정이에요, 저는."
약리지는 솔직하게 그렇게 말했고 모두가 동의했다.
지금은 괜찮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도진이 있으니까.
하지만 내년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도진은 3학년이다.
올해가 지나면 그런 도진은 물론이요 3학년 전체가 졸업을 하면서 더 이상 숭무고의 학생이 아니게 된다.
그에 비해 이문강은 3학년이 되긴 하지만 여전히 학생인 것이다.
물론 이문강이 집행부에 집착하지 않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긴 하다.
예의 의천검가와 금화의 합작 프로젝트의 중심이니 거기에 더 신경을 쓸 건 분명하고.
허나 그렇다 해도 일단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과 아닌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거기에 하나 더.
새내기들이다.
이문호 패거리가, 그리고 이문강이 집행부를 정말로 집어삼킬 생각이라면 내년 입부 희망 새내기들 중에 그들에게 동조하는 이들을 데려올 테니까.
수에서조차 밀리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수결이 중요한 집행부는 그 순간 이문강에게 넘어가고 만다.
이문강이 부장으로 있던 시절의 대사건으로 무너졌던 '숭무회'가 다시금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부실의 분위기를 무겁게 만든다.
그리고.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투벅. 투벅.
그 기척을 가릴 생각이 전혀 없는 거친 기세가 발걸음 소리에 담겨 집행부까지 스며든다.
함께 오는 익숙한 세 개의 기척을 덮어 버리는, 사람을 위협하는 그 기세는 다름 아닌 이문강의 것이다.
벌컥.
"오, 예전이랑 많이 바뀌었네?"
제집인 양 당당하게 들어온 그의 기세가 목소리에 담겨 집행부실에 퍼져 나간다.
투벅투벅 걸어 들어와 주위를 스윽 둘러보는 그의 뒤로 존재감이 죽어 버린 이문호와 태종훈, 감우상이 보였다.
불편한 분위기에서 도진이 그들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선배. 너희들도."
이문호 패거리가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과 달리 이문강은 고개만 까닥이고선.
"이게 다 유아가 사비 들여서 바꿨던 거라지?"
한유아를 가볍게 입에 담는다.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과거 집행부실은 '양아치 소굴'이었던 만큼 분위기가 결코 이렇지 않았다.
무인에겐 독약이나 다름없는 담배를 대놓고 피던 놈은 물론이요 술판까지 벌이고 방치하는 등 상상도 못할 쓰레기장이었다.
그런 쓰레기장이었던 집행부실을 한유아가 사비까지 들여서 이렇게나 바꿔 놓았던 것이다.
이문강은 그렇게 한유아가 바꿔 놓은 집행부의 풍경을 품평하듯 둘러보다가.
"그런데."
얼굴을 굳혔다.
"선배가 들어왔는데 인사는커녕 일어서지도 않는 건 뭐하자는 거지?"
스윽 둘러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건 상당한 압박감을 선사한다.
"내가 없던 사이에 숭무고 기강이 개판이 된 건가?"
인간 자체는 결코 좋게 볼 수 없지만, 인정하기 싫지만 그 내용만큼은 사실이었다.
인성과 별개로 이문강 또한 천재였기에 그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기선을 잡기에 딱 좋은 명분을 활용할 생각으로 일부러 기세를 더했다.
앉아 있던 집행부의 멤버들은 아차했다.
현대의 무림에 있어 명분은 무협지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강력한 법이 작용하는 현대이기에 그만큼 일을 행사하는 데 있어 명분 또한 강하게 작용했으니까.
그런 부분에서 볼 때 이 일은 너무나 큰 실수였다.
앞으로 있을 신경전, 그리고 싸움에 있어 처음부터 명분에서 지고 들어간 것은 만회하기 힘들 정도로 계속 그들을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는 건 더욱 악수(惡手)가 된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일어나 사과하려던 때였다.
"아, 죄송합니다."
집행부의 멤버들이 행동하기 전에 도진이 먼저 나섰다.
도진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고 이문강은 비죽 웃으며 그것을 받아치려 했다.
저 여유 넘치는 얼굴이 쓰린 속을 가리기 위한 블러핑이라 생각했다.
이 자리에서 아무리 거리낌없이 사과한다 해도 앞으로 두고두고 써먹을 허물을 만들었으니까 목표는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고.
하지만 아니었다.
"선배가 소문이 워낙 유명하잖아요. 그 나쁜 소문 때문에 애들이 좀 굳어 있었나봐요."
"…뭐?"
이문강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저 새끼,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선배는 악의가 없으시겠지만 그렇게 흉흉한 소문의 선배를 갑자기 마주쳤으니 애들도 저도 모르게 몸이 굳은 거죠. 나쁜 뜻은 없었을 테니 선배가 선배답게 이해해 주시는 건 어떨까 해요."
'이 새끼가…….'
뻔뻔하다.
그야말로 뻔뻔하기 짝이 없으며 그 내용은 이문강의 화를 부글부글 끓게 하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칠 지경이었다.
그때의 일은 의천검가에서는 금기 그 자체였다.
혹시라도 수군거리다 들키면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을 만큼의.
한데 그 금기를 지금 눈앞의 뺀질거리는 새끼가 아주 당당하게, 당사자 면전에서 지껄이고 있는 게 아닌가.
과거였다면.
그가 집행부의 부장이었던 시절 이딴 짓거릴 하는 놈이 있었다면 본인은 물론이요 집안조차 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뒤진 그놈처럼.
하지만.
"하. 그래, 그런가?"
이문강은 억지로 표정 관리를 하고 대범한 척을 해야 했다.
지금은, 지금은 그때가 아니니까.
이 중요한 시기에 도발에 넘어가 지랄을 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하다못해 저놈의 경지가 낮기라도 했다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니까.
부글부글…….
이문강은.
처음으로 제 맘대로, 성질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런 이문강의 눈을 마주하며.
씨익-
도진이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