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화
의천검가와 금화가 합작하여 만들려는 것은 특별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특수작전팀이다.
무림인, 그리고 전쟁을 위한 최첨단 장비를 빈틈없이 착용하고 작전을 수행하는 고수들로 이루어진 팀.
조금 중2병을 섞어 말하자면 국가의 최종병기 같은 느낌의 그런 팀이다.
무협지로 치자면 소림사의 백팔나한, 화산파의 매화검수가 황궁의 권력을 등에 업은 모양이니 그야말로 최종병기라 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당연한 말이지만 제아무리 금력이 대단해도, 권력이 대단해도 그것만으로는 구성하기 힘든 팀이다.
그만한 집단을 제아무리 무림의 명문가나 재벌이라 해도 단독으로 보유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동시에 그렇기에, 운용할 수만 있다면 그 위상은 비할 데 없이 치솟게 된다.
그래서 의천검가와 금화는 손을 잡기로 한 것이었다.
금화가 재벌로서의 금력을 담당하고 의천검가가 명문무가이자 '정치무가'로서 권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로서 특수작전팀의 성립 요건은 갖추어졌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으로 중요한 한 가지가 충족되어야만 했으니 '신뢰 관계'다.
의천검가와 금화가 힘을 합친 만큼 그 결과물은 대단할 것이었지만 서로 신뢰할 수 없는 두 집단이 우두머리여서야 파탄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때문에 그 신뢰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갖춰야만 했고 그 무언가가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강력한 수단, '결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결혼의 수단으로써 선택된 것이 한유아였다.
금화의 영애.
말은 좋지만 사실은 빛 좋은 개살구다.
그나마도 한유아가 '특히나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니었다면 이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른다.
다국적기업인 금화가 상상도 못할 만큼 '순혈주의'라는 걸.
그러니까 한유아는 금화의 직계이면서도 직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았다.
순혈이 아닌 '혼혈'이었으니까.
동시에 그런 대접을 받고 있다는 걸 세상 그 누구도 모르게 만들 수 있는 것이 금화라는 걸 아주 어릴 적부터 깨달았다.
그래서였다.
너무 어린 시절부터 한유아는 금화에 날개를 묶여 버렸고 나는 법을 배우지조차 못했다.
순혈이면서 장자인 한유성을 어떻게든 뒤쫓기 위해 폐가 찢어져라 달렸으나 스스로의 비참함을 매순간 재확인하는 발버둥에 불과했다.
그것이, 한유아가 이 정략 결혼을 싫어하면서도 싫어한다 말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예언을 한다고까지 말해지는 그녀는, 그렇기에 '싫다'고 한 다음부터 일어날 일을 눈으로 본 것처럼 분명하게 자신에게 '예언' 할 수 있었으니까.
스윽-
"어디가냐?"
자리에서 일어서는 한유아의 뒤에서 이문강이 묻는다.
프라이빗 룸의 식사 자리.
한유아는 이곳에서 숨 쉬는 것마저 불쾌했기에 억지로 밥을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것을 이문강이 붙잡은 것이다.
"…그걸 내가 보고할 필요가 있나요?"
한유아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묻는다.
이문강이 그 대답에 자리에서 일어나.
훅-!
두꺼운 손을 뻗었다.
"……!"
한유아가 다급히 양손을 움직여 대응했으나.
파악-!
그녀의 성명절기, 황익무(凰翼舞)의 정수가 담긴 고차원의 수법은 그저 거칠기만 한 손짓 한 번에 찢겨 버리고 말았다.
콰악!
그리고 그 우악스런 손이 한유아의 목을 잡아챘다.
'아…….'
호흡의 곤란과 고통보다 먼저 머릿속을 채운 건 자괴감과 절망감이었다.
일반인이 제아무리 수련을 하더라도, 그렇게 수련한 기술을 생애 다시 없을 만큼 완벽하게 펼치더라도.
덤벼드는 호랑이가 휘두르는 앞발을 어찌할 수는 없다.
한유아는 자신이 그런 일반인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요 1년.
무공이 전혀 늘지 않고 벽에 막혀 있었다.
분명히 자신의 눈에 들어오던, 저 밑에 있던 후배가 자신을 앞질러 가 이제는 보이지 않게 될 동안.
그리고 이제는 갑자기 나타난 맹수 앞에 무력한 일반인이 된 것만 같은 상황에까지 내몰렸다.
진무(眞武)만 익힐 수 있었더라면.
익힌 것이 그저 눈속임일 뿐인 '마술'이 아니라, 신비가 깃든 '마법'이었다면.
……아니.
그것으로 스스로의 재능의 한계를 속이고 싶을 뿐이라는 것을.
똑똑한 한유아는 스스로조차 속일 수 없을 만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한유아를 내려다보며 이문강이 말했다.
"네 와꾸가 괜찮아서 봐주고 있는 거야."
"볼 만하니까, 마음에 드니까 관대하게 봐주고 있는 거라고. 알겠어?"
"할 일만 하면, 선만 안 넘으면 좀 까불어도 관대하게 봐 주고 있어. 그러니까 주제 파악은 잘 하도록 해."
우악스런 손이 붙잡았던 목을 놓는다.
한유아는 고집으로 헐떡이려는 숨을 억누르며 나가 버렸다.
'아. 약속 있는데.'
붉어진 새하얀 목은 곧 있을 약속 시간까지 본래의 색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한유아는 예쁜 봄 머플러를 두르고 약속 장소에 나갔다.
"누나."
"그래, 대용아."
오대용.
오늘의 약속 상대는 잘 지내셨어요, 하고 물었고 한유아는.
"응."
하고 대답했다.
* * * *
민지서는 금방 잠룡문의 업무에 적응했다.
사실 업무 자체는 적응이랄 것도 없었으니 본래 해 오던 일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화온이 빠질 때를 대비하여 미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부분이 새로울 뿐이었다.
한유아에 대한 걱정으로 고뇌하는 부분이 가끔씩 도진에게는 보이곤 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 티를 전혀 내지 않으며 엘리트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점심시간.
다른 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혼자 도시락을 꺼내든 민지서의 맞은편에 도진이 앉았다.
"헤에, 잘 챙겨 드시네요."
반찬의 내용물은 밸런스가 잘 갖춰진 밥과 고기, 채소의 조합이다.
전자레인지에 데워도 먹기 괜찮은 조합이라 가산점까지 줄 수 있는.
여기에 보온병에 담아 온 미역국까지.
"식사도 자기 관리의 일환이니까요."
도진의 감탄에 민지서는 평소와 같은 단정한 얼굴로 답하고선 물었다.
"문주님께선 점심 드시지 않습니까?"
"아, 저는 먹고 왔어요. 성아 누나랑."
"예."
대화를 이어 나가기 힘들게 만드는 단답이다.
그러나 도진은 개의치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비서 선배는 그렇게 단정하고 완벽한 게 매력이죠."
"…은근슬쩍 이름으로 장난치지 마십시오."
콕 찌르니 그래도 반응이 오는 건 역시 유치한 장난이다.
"하지만 사실 집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옷을 방바닥에 벗어 던지고 침대에서 뒹군다거나 그러실지도?"
…움찔.
"어."
그냥 해 본 소린데 반응이 있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도진이 그걸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
눈이 마주한다.
도진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곧 그런 반전 매력이 더욱 플러스 요인이 되는 시대가 올 거거든요. 믿으셔도 좋습니다. 저도 그런 거 좋아합니다."
"……."
…그렇게 민지서와의 친목(?)을 다진 뒤 조금 늦은 밤이 되었을 때.
도진은 아버지의 회사를 찾아갔다.
"아버지."
"그래, 도진아."
방학 시즌.
성수기인 만큼 김서우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며 야근과 당직을 도맡아 했다.
그것은 오늘도 다르지 않아서, 도진은 아버지를 만나러 휴식 시간에 찾아온 것이었다.
"뜨끈한 국밥 드시러 갈까요?"
"그래."
살갑게 메뉴를 정하는 도진을 따라가며 김서우는 새삼 생각했다.
아들이 정말로 좀, 달라졌다고.
무뚝뚝한 자신을 닮은 부분이 많았던 아들이었는데 이렇게 가끔씩 살가운 딸 같은 부분을 보여 준다.
"이모, 돼지국밥 두 그릇이요."
능숙하게 주문을 하고 반찬을 가운데 놓고서는, 휴지를 반 접어 두고선 그 위에 수저를 올려준다.
그리고 국밥이 나오자 젓갈까지 더해서는 휙휙 섞는 모습까지.
도저히 세간에서 말하는 '잠룡문주 김도진'의 모습이 아니다.
물론, 그 모습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다.
그렇게 함께 밥을 먹는데 페이스가 제법 빠르다.
김서우는 밥을 먹는 속도가 약리지처럼 빨랐다.
그렇게 식사 시간을 줄이고 일할 시간을 더 확보하는 것이다.
도진은 그 페이스에 맞춰 숟가락을 떴고 금방 그릇이 비워졌다.
평소 같으면 그릇을 비우고 바로 일어나는 김서우였지만, 오늘은 조금 예외다.
이유없이. 그저 이유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 아버지와 대화하기 위해 도진이 입을 열었다.
"수련은 꾸준히 하고 계시죠?"
"그래."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거짓이 아니란 건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도진의 기억 속에 남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색이 다 바래 버린, 그 수명이 다한 부품 같은 것이었다.
현실의 한 장면인데 흑백도 아닌, 그야말로 색이 다 빠져 버린 작고 왜소한 아버지가 기억 속 마지막이었다.
도진으로선 상상도 못할 버거운 삶을 살면서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한 바위처럼 살았던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
그리고 사실은, 이번 생에서의 아버지도 조금은 늦어 버린 탓에 마모되어 있었다.
바위가 아닌 사람으로서 본래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풍파를 바위보다도 단단해야 할 아버지로서 감당하느라.
아버지는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고 망가진 채 그래도 서 있었단 말이다.
하지만 이제, 지금 눈앞에 있는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
연호신공을 꾸준히 수련한 아버지는 그 상처를 치유하고 더 나아가 그 전보다 단단해졌고 활기가 넘치게 되었다.
그래서 도진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아버지가 스스로 책임지고픈 것을 책임질 수 있는, 그러면서도 '꺾이지 않는' 아버지가 된 것에.
그 아버지, 김서우가 말했다.
"3월에, 적금 만기가 올 거다."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도진은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빚을 갚기 위해 든 적금.
그 적금이 이번에 만기가 온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적금은, 도진이 알기로 빚의 마지막 변제에 쓰일 적금이었다.
즉.
"가족 여행, 준비할 시간은 넉넉하겠네요."
"그래."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조금은 무뚝뚝하고, 조금은 뚝뚝 끊기는 그런 대화였다.
하지만 도진도 김서우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헤어질 수 있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어두운 길을 걸으며 도진이 심상세계에 말했다.
-스승님.
-오냐, 제자야.
-오늘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요. 빡세게 부탁드립니다.
-허허……. 내 제자지만 정말 독한 놈이로다.
위지혁에 장호까지 더해진 요즘의 수련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아니 만만하지 않은 걸 넘어 이걸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은데 마땅한 단어가 없어 가슴을 칠 정도로 어마무시한 수준이었다.
한데 이 제자놈은 그걸로도 성에 안차서, 더더군다나 기분이 좋으니 빡세게 부탁한단다.
기분 좋아서 웃음이 나오긴 하는데 오기도 생긴다.
-오냐. 오늘 한 번 신나게 대련을 해보자꾸나.
-예. 잘 부탁드립니다.
그날.
도진은 삼도천에서 샤워를 세 번 하고 나왔다.
"개운하네요."
"허, 허허허……."
* * * *
시간은 계속 흘러 이윽고 개강을 하루 앞둔 날이 되었다.
이문강은 A-1 자격증으로 오랜 폐관의 성과를 증명하며 복학했고 수강 신청까지 완료했다.
여기까지라면 집행부가 민감하게 반응할 일은 없었겠지만, 집행부의 멤버들은 모두 그 이상으로 이문강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었으니.
"그 선배, 집행부에서 제명되지 않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