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2화
나이를 좀 먹으면, 한 번쯤은 그런 상상을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부모님이 세상에 안 계시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같은 거.
그리고 무언가를 좀 알 만한 나이라면 오히려 아는 게 없어 상상의 시작부터 터억 막히는 경험을 할 거라고 민지서는 생각했다.
민지서는 채 중학생이 되기도 전에 그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그것을 무어라고 해야만 할까.
막막하다? 현실 같지 않다?
도저히 표현할 말이 지금도 떠오르지가 않는다.
온갖 센 표현과 강한 단어를 갖다 붙여도, 오히려 그렇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함을 느낀다.
제 앞가림조차 하지 못할 나이에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고 세상은커녕 주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민지서는 그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 민지서를 구원해 주었던 것이 한유아였다.
동갑의 나이.
하지만 나이만 같을 뿐 그녀의 앞에 나타난 한유아는 그야말로 금색으로 빛나는 구세주였다.
그녀로선 흉내도 내지 못할 당당함과 자신감으로 그녀를 구원해 주었다.
덕분에 민지서는 감당하지 못할 미지가 공포로 변하여 짓누르던 현실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녀에겐 한유아가 구세주요 살아갈 의미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한유아가 결코 그녀를 놓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믿음에, 오늘 크게 금이 갔다.
민지서는 말없이 도진의 앞에서 독한 양주를 들이켰다.
처음엔 데자와를 섞는 시늉이라도 하더니 얼마 못가 그냥 들이켜기 시작했다.
도진은 그런 민지서의, 양주로 속이려 드는 속내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민 씨의 극비 프로젝트에 관한 폭로에 대하여 금화와 의천검가는…….
-금화에서는 한유아 씨의 신뢰를 민 씨가 이용한 것으로…….
이 '정략 결혼'은 한유아의 의지가 아니었다.
한유아는 금화의 뜻에 억지로 따르고 있을 뿐이다.
민지서는 그게 싫은 것이다.
민지서에게 있어 한유아는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차라리 이 결혼을 이용해 주겠다고 외쳤다면 민지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움직였을 거다.
당당하게. 하고 싶은 대로.
누구보다 빛나는 모습으로 의지를 관철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러지 못하는 구세주의 모습에 무어라도 해야만 한다 생각했고 그것이 감당하기 힘든 압박감이 되어 민지서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런 민지서의 마음에 보답해주지 못하는, 그 이상으로 한심한 자신의 모습에 한유아 또한 매순간 상처가 늘고 있었으니 그렇게 여유를 잃은 두 사람은 점점 더 어긋나고 만 것이다.
-조사 결과 민 씨의 행동은 한유아 씨의 사주였던 것으로 밝혀져…….
매순간 일거수일투족이 기사화되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날조라면.
날조에 날조가 더해지고 그로 인해 비난이 쏟아진다면.
인간은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도진이 본 건 그런 미래였다.
그런 미래를 조금이라도 바꾸어 볼 생각으로.
도진은 한유아와 민지서를 잠시간 떨어뜨려 놓았다.
꼴깍. 꼴깍.
조용한 가운데 민지서는 말없이 양주만 삼켰다.
드러난 하얀 목덜미가 넘어가는 술로 일렁이고 도진은 그것을 그저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훅-
한계에 달한 민지서의 상체가 테이블 위로 떨어져 내렸다.
* * * *
해가 지기 시작한 때.
도진은 친구의 연락을 받았다.
-어디냐?
"술집."
-엥? 네가?
"어쩌다 보니 말야."
가볍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 매일을 바쁘게 보내던 오대용이었다.
오성 하이테크로 발령난 뒤 바뀐 일상에 적응하느라, 그리고 오성의 직계로서의 위치를 다지느라 갈려 나가던 바로 그 오대용이 연락을 한 것이었다.
연락의 이유를 도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모든 걸 생략하고 바로 물었다.
"올래?"
-어. 지금 갈 거니까 위치 보내 줘.
도진이 기억하는 것보다야 세상의 발전은 아직 많이 뒤처져 있었지만 메신저를 통하여 현재 위치를 보내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렇게 위치와 함께 도진은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
-좀 놀라운 걸 보게 될 텐데 너무 놀라지는 마.
-?
오대용이 물음표를 보냈지만 도진은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오대용은 궁금함을 해결하기 위해 연락받은 술집 안의 프라이빗 룸에 도착하여 바로 문을 열었고.
"……."
민지서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도진의 들어올린 왼쪽 허벅지를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
* * * *
"아, 그러니까 이게 그거라고?"
"어."
자신의 눈을 의심했던 오대용은 도진의 맞은편에 앉아 설명을 들음으로써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상심한 민지서가 양주를, 잘 마시지도 않던 독한 술을 내공의 보호도 없이 들이켜다 필름이 끊어졌고 테이블에 얼굴을 박을 상황이라 도진이 받쳐 주었다.
그리고 기다란 소파에 눕혀 주려 했는데…….
"선배가 뭘 끌어안고 자는 타입이구나."
"응."
눕혀준 그 순간 민지서의 양팔이 도진의 허벅지를 콱, 끌어안았다는 거다.
거기서 도진은 민지서의 몰랐던 부분을 여러가지 알 수 있었다.
민지서는 반듯이 자는 타입이 아니라 옆으로 누워 자는 타입이라는 것.
그리고 그렇게 옆으로 누워 자면서 제법 기다란 바디 필로우를 끌어안고 자는 타입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뒤척여 옆으로 누우면서 도진의 허벅지를 바디 필로우 대신 붙잡았다.
떼 놓으려면 떼 놓을 수 있었겠지만 도진은 대신 자리에 앉아 왼 다리를 허공에 드는 것으로 민지서를 배려해 주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5분은커녕 3분도 버티기 힘든 그 자세를 도진은 30분 넘게 유지하고 있었다.
"어질어질하네."
오대용이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그리고 도진이 그랬던 것처럼, 곯아 떨어진 민지서를 배려하여 목소리를 낮추었다.
평소 결코 틈을 보여 주지 않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무방비하게, 필요하지 않다면 입에 대지 않던 술을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시고 잠들어 버릴 만큼 힘들었던 거다.
과연 요 근래 한 시간이라도 제대로 자 본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힘들었을 테니 도진도 오대용도 그녀를 깨우려 하지 않았다.
도진은 피식 웃고선 오대용의 잔에 양주를 따라 주었다.
"데자와 남았는데 섞어 줄까?"
"고맙지만 사양할게."
오대용은 단호히 민지서의 취향을 거부하고 온더락, 얼음만 넣어 양주를 마셨다.
적당히 셔츠 앞섶을 풀어헤친 양복 차림에 양주를 마시는 모습이 제법 태가 난다.
이 정도면 TV 드라마나 소설의 젊은 본부장 주인공을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음. 너도 참 용 됐어."
"갑자기 뭐야."
"그냥."
낄낄거리는 도진의 모습에 오대용이 눈썹을 모았으나 이내 풀었다.
나름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도진의 배려가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거운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었으니까.
"유아 누나, 만났지?"
"응, 그랬지."
민지서가 함께 있는 것으로 오대용은 어렵지 않게 도진이 한유아를 만났고 무언가 일이 있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너니까 아마 유아 누나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겠지."
"맞아. 꽤 많이 알고 있어."
이를테면 한유아는 금화의 영애로 금화의 사랑을 받는 사람인 것 같지만 사실은 목줄에 묶여 있다는 것까지도.
설령 전생에서의 일이 없었더라도 이 결론에는 어렵지 않게 도달했을 것이다.
한유아가 '화온의 대표'로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
일전의 큰 사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대대적인 홍보가 되기는커녕 '어쩔 수 없었던 허물'이 더욱 부각 되는 기사만이 가득했던 이유.
그래서 치안 유지 계약에서도 제외되었던 것까지.
그 모든 게 한유아가 오로지 '금화의 영애'로서의 이미지만을 가져가도록 금화가 의도했다는 걸 도진은 알 수 있었으니까.
금화는 한유아가 화온의 대표 같은 '홀로서기'를 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한유아가 금화의 '수단'으로서 존재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좀 우습지만 나는 그래서 누나에게 동질감을 느꼈었어. 그러니까 누나한테 들이댔던 거지."
일부러 가볍게 말했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이 가벼움을 지워 버렸다.
한유아는 금화의 수단으로서 남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했다.
허나 그것은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성을 안간힘을 다해 지키는 아이의 모습에 다름없어서, 그녀가 만들고자 했던 모래성은 단 한 번도 완성에 이르지 못했다.
한유아의 겉만 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유아가, '그 한유아'가 왜 그러고 있느냐고.
설령 그 대상이 금화라 해도 마찬가지로 금화의 직계인 그녀인 만큼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아니다.
그녀는 금화의 직계이기에, 그런 금화에서 자랐기에 반대로 너무 어린 나이부터 속박당하고 말았던 거다.
아기 코끼리를 짧은 줄로 묶어 말뚝에 매달아 둔 것처럼.
그래서 코끼리는, 한유아는 크게 성장해도 그 말뚝과 줄의 좁은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됐다.
한유아와의 시간을 쌓아가면서 도진은 그런 한유아의 내면을 꿰뚫어 보았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얼마 나아가지 못하고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어 버리는 그 내면을.
그러니까 그녀는 도진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 했던 시도를 그토록 쉽게, 빨리, 허무하게 포기해 버렸던 거다.
그녀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너무 빠르게 벗어나 버렸으니까.
적나라하게 말해서, 그런 한유아의 내면까지 더하여 오대용은 한유아에게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도진은 어느 날을 떠올렸다.
-네가, 나 대신 유아 누나를 도와줘.
-유아 누나는, 너한테 맡길게.
술에 취해 오대용이 그런 말을 중얼거리던 날을.
눈 앞의 오대용은 그날과 달리 술을 마시면서도 전혀 취하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오대용은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까.
도진은 옅게 웃는 얼굴로 친구의 물음에 답했다.
"한유아 선배를, 그 양아치에게서 빼앗고 싶지."
* * * *
다음날.
과음하여 필름이 끊겼던 민지서는 머리가 깨질 듯한 숙취를 느끼며 제법 오래 흐느적거렸고 왜 이렇게 된 건지를 겨우 깨닫고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
잠룡문주의 앞에서 양주를 퍼마시다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잠결에 무언가를 껴안고 있었던 것 같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곳에는 그녀가 항상 끌어안고 자는 바디 필로우는 없었다.
그러니까 다른 무언가를…….
"……."
손이 파르르 떨렸으나 민지서는 냉철한 이성으로 해야 할 것들을 했다.
아직은 어둑하여 빛이 잘 들지 않는 실내가 잠룡문과 화온이 사무실로 쓰고 있는 곳의 숙직실이라는 걸 빠르게 파악했다.
"…죄송합니다."
자신 때문에 침대를 쓰지 못한 무인들에게 사과하고 집으로 가 샤워하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30분 빠르게 다시 사무실로 출근했다.
한유아의 곁이 아닌 잠룡문의 치안 유지 계약을 수행하는 사무실로 출근하는 것이 온갖 잡념에 시달리게 만들었지만 여운이 남은 숙취와 어제의 기억이 아주 조금은, 마취 역할을 해 주었다.
그렇게 깔끔한 모습으로, 언제나와 같은 포커페이스로 출근한 민지서를 도진이 웃는 얼굴로 맞이해 주었다.
"오늘은 첫날이시니까요. 제가 직접 도와 드릴게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민지서는 어제의 일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평소를 가장했다.
그러나.
스윽-
도진이 쇼파에 앉아 왼 다리를 들어.
움찔……!
다리를 꼬며 씨익 웃었다.
파르르…….
민지서는 술에 절어 있었음에도 최소한의 기능을 했던 뇌세포를 저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