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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482화 (482/741)

481화

"어…… 갑자기?"

한유아는 예언을 한다고까지 사람들에게 평가될 만큼 사전 준비와 정보의 조사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런 한유아였기에 그녀가 고의, 혹은 전략이 아니고서야 말을 흐리거나 말문이 막히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바로 그 한유아가, 도진의 말에 진짜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그만큼 도진의 말이 의외였던 것이다.

한유아만이 아닌 민지서까지 동요하여 눈동자가 흔들린다.

만약 민지서가 한유아의 곁에 그림자처럼, 말없이 서 있는 것을 철칙으로 지켜 오지 않았다면 무의식적으로라도 그게 무슨 소리냐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을 동요시킨 도진은 정작 아무것도 아니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배도 잘 아시겠지만, 사실 우리 잠룡문은 사무직 인재가 많이 부족한 문파잖아요."

표정을 가다듬으며 한유아가 동의했다.

"응,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요.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을 채용할 때까지만, 적어도 올해까지만이라도 지서 선배를 이쪽에 파견해 주실 수 없을까 해서요."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민지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응, 그렇네."

"…대표님?"

그런 뜬금없는 소리에, 그녀가 인생을 걸었던 사람이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민지서는 처음으로.

그녀가 믿고 따르는 사람의 대화에 목소리를 내어 끼어들고 말았다.

한유아가 민지서에게 웃어 보인 뒤 말했다.

"사실은 그렇거든. 이번 프로젝트에는 지서가 함께 할 수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후배가 그렇게 말해 준다면 지서를 잠시 부탁하도록 할게."

"……."

민지서의 이성과 감성이 줄다리기를 한다.

그 속내가 살짝 벌려진 입술과 그 입술을 통하여 나와야 할 목소리 대신 소리 죽인 숨소리만이 흘러나오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내뻗을 뻔한 손.

그것은 믿고 있던 사람이 결코 놓지 않아야 할, 놓을 리가 없다고 믿었던 것을 놓으려 손에서 힘을 빼고 있었기에 무의식 중에 자신의 손에 힘을 준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바로 이 자리에서 계약서를 쓸까요?"

거침없이 일을 진행하는 도진.

그런 도진을 한유아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따라갔다.

"그러자. 이렇게 된 거 바로 오늘부터 지서가 업무를 시작하는 것도 괜찮겠네."

"어, 진짜요?"

"응."

계약서를 작성하는 동안 민지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 침묵의 성격은, 그동안 쌓아온 시간 속에서 단 한 번도 없던 것이었다.

그리고 민지서는 낯선 침묵 속에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

무언가 건드려서는 안 될, 건드리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살얼음이 언 바닥이 깨질 것만 같은 분위기가 공간을 채운다.

한유아가 그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어떻게든 입술을 떼려 했을 때.

"흐음."

아무렇지 않게 도진이 시선을 문으로 향하며 분위기를 바꿔 버렸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한유아의 얼굴이 굳었으며 민지서의 눈동자가 격동했다.

투벅. 투벅.

남자의 구두 소리다.

평범하게 걷는 소리 같은데 기이할 정도로 그 소리가 귀에 틀어박히는 건 사실은 그것이 전혀 평범하지 않고 이질적으로 무겁기 때문이다.

그 무거운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소리에는 기세가 담기기 시작했다.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생물로서 자연스럽게 발산하는 '기척'과 같은 존재감.

하지만 그 존재감이 너무나 무겁고 거칠어 사람을 위축되게 만든다.

문이 열리고 그 소리와 기세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여기 있었어?"

"……."

입꼬리를 슬쩍 올려 웃는 것마저 사람을 짓누르는 압박감을 선사하는 '맹수'가 거기 있었다.

2미터에 가까운 키, 평범한 사람을 아득히 넘어서는 덩치.

그러나 '진짜'는 자연스레 발산하는 기세다.

순수하게 피지컬만 따지자면 그는 도진이 본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육체를 지닌 벽태웅을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두른 압박감은 벽태웅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위협적이고 거칠었으니 그것이 사람이 아닌 '맹수'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람의 기세가 아니라 한껏 피에 굶주린, 사람을 몇이나 무참하게 살해한 호랑이에 가깝다.

무림인은 고의로 기세를 이용하여 다른 이를 위협해서는 아니된다.

그는 그 법규를 준수하여 타인을 위협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언제든지 부수고 뛰쳐나올 수 있는 허울뿐인 우리 안에 있는 것만 같아서 더욱 마주한 사람에게 공포를 선사하는 것이었다.

-살성이로구나.

위지혁, 그리고 장호는 처음 대면한 이문강을 그렇게 평가했다.

살성(殺星). 살기를 타고난 인간.

사전적 의미에서의 마공(魔功)을 익힌다면 비할 데 없는 재능을 발휘할 것이었으며 세상에 재앙을 가져올 대마두(大魔頭)가 될 인간이다.

그런 살성을 타고난 인간이 거침없이 거리를 좁혀 한유아의 왼편에 앉았다.

털썩-!

등을 쭈욱 기대며 앉은 그의 무게로 소파가 일렁이고 한유아의 어깨가 흔들렸다.

그렇게 흔들리는 한유아의 어깨에, 서슴없이 그의 두껍고 거대한 팔이 둘러졌다.

꾸우욱…….

민지서가 손이 하얗게 될 정도로 힘을 주어 주먹을 쥔다.

그리고 한유아는 최대한 티나지 않게, 그러나 온힘을 다하여 그 팔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나려 했다.

"……."

하지만 그의 거대한 팔은 한유아의 노력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으니 팔의 주인, 패룡(覇龍) 이문강에게 있어 한유아의 소리없는 노력은 꿈틀거리는 미물의 것 이상의 의미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문강이 그렇게 한유아의 어깨에 팔을 올린 채 도진을 마주하며 씨익 웃었다.

"여, 반갑다. 네가 요새 그렇게 잘 나가는 후기지수 원탑이라며?"

5년을 두문불출하며 폐관수련을 한 의천검가의 장남.

그 폐관을 끝내고 세상에 나와 A-1 자격증, 초절정의 경지를 증명하며 여론마저 뒤엎은 '양아치'.

그리고 지금, 한유아의 어깨에 두꺼운 팔을 올려 그녀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맹수.

이문강을 마주하여 도진은.

"네, 처음 뵙겠습니다."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받은 도진의 모습에 이문강은 내심 호오, 도진에 대한 평가를 조금 올렸다.

가벼운 도발을 겸한 인사였다.

양아치를 싫어한다고 들었다.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으니 어떤 형태로든 반응이 있을 거라 예상했는데.

직접 마주한 놈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받았다.

생각보다는 상대할 맛이 있는 놈이겠다.

그렇게 찰나에 생각한 이문강의 앞에.

스윽-

손이 하나 내밀어졌다.

'?'

일순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찰나의 찰나.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이문강은 그것이 악수를 청하는 손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

그리고 그 의도까지도.

'…이 새끼가.'

이문강은 한유아의 왼편에 앉아 오른손을 그 어깨에 둘렀다.

과시하듯. 한유아를 구속하듯.

한데 맞은편에 앉은 도진이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함으로써 그 오른손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별일 아니라 생각하면.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멍청이들이라면 아무런 일이 아니겠지만 이문강 정도 되면 이게 의도가 담긴 행동이라는 걸 단숨에 깨달을 수밖에 없다.

'하!'

그래서 이문강은 분노를 담아 한유아의 어깨에 둘렀던 손을 내려 애송이의 손을 마주잡았다.

꽈아아아아악-!

학창 시절. 그러니까 5년 전 제아무리 날고 긴다는 놈도, 외공 단련자도 이렇게 이문강이 손에 힘을 주면 버티는 놈이 없었다.

흔들흔들.

허나 눈앞의 이 애송이는, 비리비리해 보이는 놈은 그 힘을 전혀 못 느끼는 것처럼 웃으며 태연하게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닌가.

'…이 새끼.'

내공을 끌어올린 기색은 없다.

이문강은 부아가 치밀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 조막만 한 애송이는, 믿을 수 없게도 내 아귀힘을 최소한 버틸 수 있을 만큼의 피지컬을 갖추고 있다고.

짧지만 길었던 악수가 끝나고 손을 놓았다.

"…나는 그럼 할 일이 있으니까 이만 가 볼게."

"네, 선배. 다음에 밥이라도 한 끼 같이 먹어요."

"……응. 그러자."

대답에는 평소 이상으로 긴 텀이 있었다.

그리고 한유아는 사무실을 나갔다.

"선배님은 무슨 일로 사무실을 찾으신 건가요?"

그 한유아를 뒤따라 가려던 이문강은 도진의 질문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행동의 맥을 끊는 타이밍이 예술의 경지였다.

'이 새끼가 진짜…….'

이문강은 속에서 화가 끓었으나 이 자리에서 티를 내면 지는 것이란 걸 잘 알았기에 웃음을 유지했다.

"내 소중한 파트너가 이곳에 있다고 들어서 말이야. 그러고 보면 처음 오는 건데 뭐라도 좀 사올 걸 그랬나?"

"아뇨아뇨. 굳이 그러실 것까지야."

고개를 젓는 행동 하나 하나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유아 선배를 찾아오신 거였다면 가 보셔야겠네요."

"그래.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네. 살펴 가세요."

가볍게 인사를 하며 도진은 이미 한유아를 따라가기엔 늦은 이문강을 보냈다.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이제는 잠룡문에 머물게 된 민지서를 마주했다.

"비서 선배."

"……."

가볍게 농담을 던졌으나 민지서는 반응해 주지 않았다.

그저 눈으로 '왜?'라고 그 이유를 묻고 있었다.

도진은 웃으며 다시 말했다.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자리를 옮길까요?"

그렇게 물으니 조금의 텀을 두고서 민지서가 대답했다.

"…이 근처에,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도진이 알기로 민지서는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정확히는 안 마시는 건 아닌데 필요하지 않다면 결코 마시지 않는 성격이다.

그런 술을, 지금 민지서가 찾고 있었다.

"음, 제가 술을 안 마셔서 잘은 모르지만 지윤이한테 물으면 괜찮은 곳을 바로 알 수 있을 거예요. 같이 갈까요?"

"…네."

고개를 끄덕이고서 민지서는 마치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기색으로 도진의 한 걸음 뒤에서 걸었다.

"응, 지윤아. 고마워."

도진은 정말로 나지윤에게 물어 괜찮은 술집을 찾아 민지서와 함께 들어섰다.

낮이지만 내부는 아늑하게 어두웠으며 분위기도 좋았다.

상당히 고급 술집이었는데, 둘 다 술을 마시지 않는 만큼 점원의 안내와 도움을 받아 주문을 했다.

비싸고 독한 양주가 놓였고 거기에 섞어 먹을 것으로 도진이 콜라, 민지서가 데자와를 선택했다.

따로 얼음도 추가하지 않고 잔에 양주와 데자와를 콸콸 부어 섞고선 민지서가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

그리고 물었다.

"어째서, 그러셨습니까."

주어가 생략된 물음이었지만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도진은 분위기에 맞추어 양주와 콜라를 반씩 섞은 뒤 홀짝이고선 답했다.

"그대로 두면 유아 선배랑 지서 선배의 사이가, 많이 안 좋아질 것 같았거든요."

"……."

모든 걸 떠나, 그 내용 자체를 부정할 수 없었기에 민지서는 침묵했다.

그 침묵을 마주하며 도진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

"유아 선배를 만날 수 있는 명분이 있었으면 했으니까요."

"……그건."

"네. 지서 선배가 제 곁에 있어야, 제가 유아 선배를 만날 명분이 생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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