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9화
현대인의 대부분은 무공의 발전을 환영한다.
무공의 수준을 떠나 그것을 익힘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효과인 무병장수는 누구나가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거기에 무공 그 자체가 인생의 목표인 무림인까지도.
때문에 세계가 협력하여 고대 무림 문자의 해석을 바랐고 그 바람에 따라 탄생한 국제 기구가 국제 고대무림언어연구회였다.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건강과 수명은 늘릴 수 없었으니 그 두 가지를 성취할 수 있는 무공의 발전을 위해 욕심 많은 부자도 부패한 정치인도 이 국제 고대무림언어연구회에 관해서는 관대했다.
자연스레 이들에게 주어진 예산은 막대했고 세계의 수많은 인재들을 모으고 지원했다.
그리고 그 인재들이 낸 성과는 아낌없이, 감춤없이 공개되었으니 이 부분에 있어서도 모두가 합의했기 때문이다.
따로 감추고 숨겨서는 썩기도 전에 증발할 미미하고 얕은 물구덩이다.
모으고 합쳐야만 호수가 될 수 있으니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합의를 본 것이다.
그런 연유들로 고대무림언어연구회의 권위는 대단했는데 바로 이곳에서 도진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당신의 고대 무림의 말글에 관한 지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라고.
그러면서 학교를 졸업하면 고대무림언어연구회에 소속되어 활동할 생각이 없는지 의사를 물었다.
사실 도진으로선 오히려 바라던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대무림언어연구회에 들면 웬만해선 열람조차 할 수 없는 고대 무림에 관한 서적의 열람권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살짝 이야기를 돌려서, 도진은 의성문이 보유하고 있던 화타가 남긴 서적에 관심이 있었다.
그들이 공개한 일부 서적의 내용으로 볼 때 화타는 마교도와 적지 않은 인연을 맺은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진짜로, 중국에 가서 사신공을 이용하여 잠입해 서적을 확인해볼까 하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다만 궁지에 몰린 의성문이 일반인들에게도 서적을 공개함으로써 그런 생각은 접을 수 있었다.
중요한 건 그거다.
그들은 서적을 '일반 공개'하였고 그 덕분에 도진이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그런 서적은 보고 싶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길게 볼 것도 없이 서적들을 공개할 이유가 없으니까.
굳이 무림이 아니더라도 국가가 보유하고 있는 그런 서적들은 웬만해선 공개가 되지 않는다.
그저 그 서적을 연구하여 얻은 성과만이 공개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예외가 있으며 개중 '아주 강력한 예외'가 바로 고대무림언어연구회였다.
이들은 일반 서적에 한해 조건만 충족한다면 얼마든지 열람이 가능했다.
연구를 해야 하니까.
고대무림언어연구회의 연구원들은 기밀 유지 서약서를 작성하고 그것을 연구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무림인이 아닌 이들에 한하여 무공서에 대한 연구 또한 허락된다.
그러니까 도진의 경우 무공서의 열람은 허락되지 않겠지만 어차피 그 부분은 상관없었다.
도진의 머릿속에 바로 '천마신교'가 들어 있었으니까.
여기에 사신의 무공마저 깃들어 있으니 그런 부분은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도진이 원하는 건 무공서가 아닌 고대 무림의 글자로 쓰인 일반 서적들이다.
그중에서도 혹시 있을지 모를 마교의 흔적들. 그리고 마교와 관련된 내용을 보고자 했다.
도진은 자투리 시간이 생기면 도서관은 물론이요 인터넷을 통하여 접근할 수 있는 도서관 등에서 혹여 마교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뒤져 보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여 접근할 수 있는 정보는 너무나 한정되어 있었다.
기껏 공개된 건 다 아는 내용이었고 그리 퍼지지 않은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그다지 영양가가 없는 내용들이었다.
고대 무림의 언어로 쓰인 원서도 적지는 않았으나 역시나 도진에게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도진은 생각한 것이었다.
고대무림언어연구회의 회원이 되어 일반적으론 접근이 불가능한 서적들을 확인해 보면 어떨까, 하고.
회원이 되기만 한다면 각국에서 감추고 있는 서적들에마저 접근이 가능하니까.
하지만 이것도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고대무림언어연구회에 들기 위해선 우선 1년에 한 번 치러지는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해야만 했고 그것이 겨우 절차 중 '1차 면접 통과'였다.
중요한 건 이 1차 면접의 조건에 '대학생 이상인 자'가 있어 도진은 응시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기준을 충족하여 시험에 합격한다 해도 이후 본부에 가 인적성 시험을 포함한 적격 심사 등등을 거쳐야 하니 번거로울 뿐 아니라 상당한 시간을 소요해야만 했다.
때문에 도진은 고대무림언어연구회에 관한 부분은 꽤 후순위로 미루어 두었었다.
혹시 모를 마교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일반적으론 열람이 불가능한 고대 무림의 사료를 읽을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할 생각이긴 했는데 그걸 위해 소요해야 할 시간이 너무 많았으니까.
한데 바로 이렇게 고대무림언어연구회에서 먼저 접촉해 옴으로써 그것이 상당히 수월해졌다.
도진이 동의 의사를 밝히면 여러 절차가 제법 간소화되며 그들이 할 수 있는 부분은 먼저 처리해 두기에 도진은 본부로 가 자신의 능력을 검증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생각지 못했던 이득이다.
도진은 고대무림언어연구회에 숭무고를 졸업 후 빠른 시일 내로 연락하여 일정을 조율하겠다는 답장을 보내 두었다.
그리고 심상세계.
도진은 훈련 후 쉬는 시간에 위지혁, 장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 회원이 되더라도 교에 대한 자료를 찾긴 힘들게다."
"예."
스승 위지혁의 말에 도진은 동의했다.
간단한 이야기다.
만약 그렇게 마교에 관한 내용이 상당했다면 지금처럼 그 실존 유무조차 불분명하진 않았을 거다.
당장 동기인 유룡 우정한이 속가 제자로 있는 소림사가 그렇지 않은가.
그들이 실존했다는 내용이 담긴 사료는 적지 않았으며 무당파나 화산파, 개방조차도 언급된 사료들이 있었다.
하지만 마교는 아니었다.
그 실존을 증명하는 사료가 일반 대중의 영역에서는 전무했으니 위지혁과 장호는 그 이유에 관해 어느 정도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장호가 말했다.
"내가 살던 시대의 황제는 천마신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 했다."
위지혁 사후 300년 뒤.
마교는 여전히 천산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무림에 거의 나오질 않았다.
황제는 단순히 천마신교를 마교라 하며 혹세무민하는 사이비교 취급하는 걸 넘어 아예 '없는 존재'로 만들려 하였으니 천마신교의 존재 자체가 황권의 위엄을 훼손하는 요소였기 때문이다.
위지혁을 따랐던 공주 주려취의 존재가 말소된 것처럼, 제국이 천마신교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이요 '역사' 자체를 말소했다면 이렇게 현대에 발견되는 사료에서 천마신교를 찾을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다만 그렇다.
말 그대로 혹시 모르니까.
간접적으로라도, 혹시 그들이 잘못 해석하거나 해석하지 못한 부분에서 현대와 단절된 고대의 이야기를 찾을 수도 있는 거니까.
딱 그 정도의 기대다.
실제로 이번 원화문과 의성문의 갈등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
이번 일로 의성문이 공개한 서적을 통해서는 화타가 마교도에게 혈류공을 배웠다는 것을 알게 됐다.
딱 거기까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유의미한 큰 성과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만약 제가 소천마라고 세상에 공표할 수 있게 되면, 우리 천마신교에 대한 포지티브한 홍보도 좀 해야겠네요."
"껄껄. 그렇구나."
이번 일로 알고는 있었지만 체험하지는 못했던 걸 하나 체험했으니 흔히 '마교(魔敎)'라 불리는 천마신교의 이미지에 관해서다.
일반적으로 마교는 '나쁜 편'이니까.
정파는 정의롭고 마교는 나쁜 집단이다.
뭐 요즘에 와서는 그런 부분이 희석된 걸 넘어 오히려 역전하여 마교가 착한 편이란 이야기도 많지만, 어쨌든 기본적인 이미지는 그렇다.
그런 부분이 의도치 않게 이번 일이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재고(再考)되었다.
-마교가 나쁜 편이라고? 그건 무협지의 이야기지 현실은 어떤지 모르잖아.
-애초에 마교 자체가 무협지의 이미지지.
이런 이야기로 얼마간 이슈가 되기도 했다.
덕분에 도진이 스스로를 '소천마'라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이미지에 관한 부분도 상당히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는 그림이 나왔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렇게 도진이 세상에 자신이 소천마임을 알리고 현대에 천마신교가 부활했을 때.
과연 도진이 알지 못했던 천마신교의 후예들이 나타날지. 나타난다면 얼마나 될지.
독마전이 있었고 투마전이 있었다.
용마 또한 후예를 남겼으니 그토록 거대했던 천마신교의 다른 전인들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기대를 품고.
도진은 그 커다란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지존으로서의 격을 갖추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쉬었습니다, 스승님."
어느덧. 벌써.
숭무고의 학생으로서 있을 수 있는 시간도 끝을 고하고 있었다.
여름방학의 끝자락.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를 뒤흔들, 도진의 3학년 2학기가 성큼 다가왔다.
* * * *
파르르…….
의천검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문 무가의 직계이자 둘째 아들인 이문호는 패배감과 분노, 온갖 얼룩진 검은 감정으로 범벅이 되어 으스러져라 주먹을 그러쥐었다.
꿈에 부풀어 있었다. 안이하게.
숭무고의 집행부를 거머쥐고 가장 높은 곳에 앉아 내가 이 정도다, 라는 걸 보여 주려 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아주 처참하게, 아니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김도진.
그놈 때문이다.
3학년이면서도 학교에 남은 김도진은 이문호가 무언가를 시도하려 해도 그 출발선을 넘는 것조차 불허하는 너무나 거대한 벽이 되어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나는 지금껏 무엇을 했지?
무얼 이뤘지?
무언가 자랑할 게 하나라도 있나?
아니. 없다.
몇몇 소소한 성과가 있긴 하지만 그건 저 바닥을 기는 놈들이나 자랑할 만한 것이지 '의천검가의 둘째'가 내밀기엔 너무나 처참한 것들이었다.
보름달 아래 반딧불을 밝다고 자랑하는 꼴이란 말이다.
그래서 그는 가슴을 쥐어 뜯고 싶을 정도로 처참한 감정에 매몰되어 주먹을 그러쥐고 만 것이다.
갑자기 그런 감정에 매몰된 이유는 하나다.
"…첫째가 드디어 세상에 나가게 됐구먼."
"세상이 시끄러워지겠어."
"우리도 이제 어깨 좀 펴고 다닐 수 있게 되는 거지."
벌써부터 집안의 어른들이 기대감을 가지게 만드는 존재.
이문호를 거들떠도 보지 않게 만드는 존재.
어릴 적부터.
단 한 번도 넘어서지 못했고 넘어설 수 있다는 희망조차 가질 수 없게 만든 존재.
그래서 어른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그가 패배감에 젖어 살게 만든 존재.
그를 '반딧불'로 만들어 버린 존재.
이문강.
의천검가의 첫째.
희대의 천재라 불리며 가문의 명성마저 걸고 사수해낸 '의천검가의 미래'.
"하아아……."
그저 숨을 내쉬는 것만으로도 이문호의 세상을 짓눌러 버리는 괴물이.
"잘 지냈냐?"
"……형."
다시 세상에 나와 버렸다.
* * * *
여름방학의 끝자락.
의천검가는 과거 불미스런 사건이 있었던 집행부의 '수장이었던 죄'로 폐관에 들었던 이문강이 성취를 얻어 세상에 나오게 됐다고 알렸다.
과거 학교 폭력 사건에서 강력한 혐의에도 불구하고 재판 결과 무혐의가 나와 논란이 되었던 학생.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
마치 그때의 이야기가 착각이 아니었던가 싶을 정도로 여론은 변해 있었다.
-그때 워낙 일이 크게 터져서 좀 감정적이긴 했음.
-ㅇㅇ 이문강 그 자리에 없었던 거 팩트자너.
-이문강이 젤 셌으니까 집행부 수장 했던 거고 그러니까 말 나온 거였지 사실 직접 학생들 때린 적도 없었다는데.
아는 사람들은 아는 이야기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물타기다.
문제는 그게 5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 여론을 의도한 대로 이끌 만큼의 힘이 있었다는 거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완전히 돌리는 충격적인 소식이 있었으니.
-단독)금화의 금지옥엽, 의천검가 희대의 천재와 긍정적인 만남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