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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479화 (479/741)

478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데, 현대의 무림인이 배우는 대부분의 무공은 현대의 언어로 설명되며 가르침을 위해 사용되는 서적 또한 그 나라의 문자로 되어 있다.

고대 무림의 문자를 굳이 읽고 해석하기 위해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을 투자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경우는 이 시대엔 드물었으니까.

애초에 현대의 무공은 현대에 와서 창안되거나 개량, 발전되는 경우가 많았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다만 이렇게 현대의 언어로 무공이 전수되기까지는 아주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자금이 소요되었다.

무공이란 단순한 육체의 움직임이 아닌 그 움직임에 마음, 그리고 깨달음이 깃들어야만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었으니까.

자연스럽게 무공서(武功書)란, 비급(祕笈)이란 그런 깨달음을 어떻게든 담기 위하여 추상적이거나 은유적인 내용으로 채워진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고대에 무림이 실존했다는 걸 증명하는 사료가 희소해 문자의 해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무공서를 해석하는 건 기역, 니은을 익히는 아이가 과학 논문을 해석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그것이 비급이라면 더욱 곤란할 수밖에 없으니 비급을 어떻게 만천하에 공개하고 해석을 하겠느냔 말이다.

그런 식으로 여러가지가 맞물려 무공의 발전은 더딜 수밖에 없었고 세월이 흐르고 흘러 조건들이 갖춰짐으로써 폭발적인 발전, '무림 르네상스'가 일어난 것이었다.

그 조건 중 하나가 고대 무림의 언어에 대한 가시적인 성과였으니 국제적으로 협력하여 사료를 함께 연구·해석하여 어느 정도 고대 무림의 언어를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완벽하진 않다.

완벽하게 하기엔 아직도 사실은 사료가 부족한 편이었다.

여기에 무공서는 물론이요 심지어 일반적인 내용을 기록한 사료에서마저 은유나 추상적인 문장을 쓰는 경우가 많아 아직도 수많은 학자들을 탈모로 몰아넣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최소한 문맥이나마 파악할 수 있고 단순하게 쓰인 문장이라면 완벽에 가깝게 해석할 수 있었으니 가히 축복할 만한 성과다.

국제 기구는 그 내용을 아낌없이 공개했다.

숨기고 있으면 그저 보물을 썩힐 뿐이라는 데에 모두가 동의했으니까.

애초에 가진 사료를 공개하고 함께 연구한 것부터가 그러지 않고선 안 된다는 것에 대한 합의에서부터의 시작이었다.

덕분에 무림인들은 각자의 비급을 해석할 수 있었고 여기에 오랜 세월 시행착오를 반복하여 안에 깃든 뜻을, 심득을 깨닫고 그것을 후대에 전수할 수 있었다.

위지혁은 이 부분에 있어서 약간 '꼰대스런' 평가를 했으니.

"쯧쯧. 풀어서 전수하는 건 좋다만 그렇게 풂으로써 선대가 궁구하고 또 궁구하여 겨우 담아낼 수 있었던 의미를 퇴색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거늘……."

그러니까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같은 거다.

현대의 무림은 깨달음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저 정형화하고 수식화하려 드니 명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위지혁은 물론이요 장호 또한 이런 것 때문에 현대의 무림은 다시 정체되고 더 나아가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고 평했다.

본론으로 돌아가, 그러니까 그거다.

고대 무림의 문자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설령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그 해석이 맞다고는 결코 확신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당신들의 해석은 틀렸어요."

그들이 당당하게 내민 해석 또한 '네이티브 스피커'이자 '원어민'인 위지혁과 장호가 보았을 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이미 한 명이 도진도 아니고 도진의 어깨 위에 있는 솜이에게 냥냥펀치를 쳐맞고 처참하게 나뒹군 상황이었기에 그들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은 얼굴이었으나 덤비지 않았다.

대신 주먹을 파르르 떨며 물었다.

"도대체, 어디가, 틀렸다는 거지?"

도진은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서적의 내용은 일기, 일지에 가깝지만 문장은 상당히 고급스럽게 쓰여 있어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 무공서에 가깝다, 이거죠."

도진은 위지혁에게 고대 무림의 언어를 배웠다.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를 들었는데 거기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이 시대의 언어는 상당히 직관적이야. 그래서 좋은 부분도 있지만 대신 인간의 감정이나 추상적인 부분에 관한 전달에는 약해졌다는 단점도 있지.

그러니까 그것은 그 시대의 필요성에 따른 차이였다.

고대 무림에서는 무공의 전수를 위해 추상적인 것을 어떻게든 전달해야만 했고 함축적인 '어떤 것'을 언어에 담아야만 했다.

그저 멋스럽자고 번거롭게 그런 문장을 쓴 게 아니라는 거다.

중요한 건, 화타가 살던 시대엔 현대와 상황이 달랐던지 아니면 그가 특별했던 건지 그는 문장을 고대 무림의 언어로 쓸 수 있었다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화타는 그 시대의 지식인이자 무림인답게 일기이자 일지였음에도 고대 무림의 글자로 그런 '어려운 문장'을 썼다.

"첫 번째 문장부터 해석이 잘못됐는데, 마교의 무인에게서 혈류공을 얻었다라고 했죠. 아니에요. 그 문장은 마교의 무인에게서 혈류공을 배웠다고 해야 해요."

"……!"

"어?"

반응은 아주 잠깐 늦었다.

그러나 늦은 것의 제곱으로 크게 일어났으니 그 내용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화타가 혈류공을 배웠다고?"

"헐. 실화냐."

"네 이놈!!"

의성문의 무인들이 다시 한 번 한계를 넘어 분노했다.

그러나 도진은 그 분노를 자신의 기세로 강제로 억눌러 버린 뒤 말했다.

"왜 분노하죠? 혈류공을 배운 게 뭐가 모욕이 되는 거죠? 오히려 난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이 내용으로 유추해 볼 때 마교의 무인이 의성에게 도움을 받았고 그 보답으로 혈류공을 전수해줬다, 같은 식으로요."

"아! 혹시 그런 건가요? 아직도 마교는 나쁜 집단이라는 선입견을 못 버렸다거나? 그냥 그렇게 믿고 싶다거나?"

부들부들…….

"와, 존나 잘팬다."

"쉿! 다 들린다고 임마."

"그 외에도 혈류공을 본격적으로 운용하니 눈에 붉은 기가 돌아 사나운 인상을 더한다, 혈류공을 구사함으로써 피의 흐름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깨달음이 부족하면 주화입마에 들거나 미치광이가 될 수 있다…… 정도가 있겠네요."

도진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그러나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또렷한 목소리로 해석을 바로잡았다. 그리하여 나온 내용은.

"어, 이거 화타가 혈류공을 익히면서 쓴 일기 같은 거 아닌가?"

"그러네?"

그랬다.

그것은 혈류공을 마공이라 규정한 내용이 아니라 화타가 혈류공을 익히게 되면서 그 과정을 기록한 것이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생각이 이어지면.

"잠깐만. 이렇게 되면 혈류공을 익힌 원화문 쪽 정통성이 더 강화되는 거 아닌가?"

"듣고 보니 그러네?"

그렇다.

의성문이 가진 서적은 오히려 원화문의 '정통성 강화'에 도움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된다.

의성문으로선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크게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뻔뻔하게 어디서 날조를!!"

도진을 노려보며 그렇게 외친다.

도진은 굳이 부정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억지로 설득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갑자기 도진이 이 세상에선 누구도 확언할 수 없는 고대 무림의 문자를 완벽히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 봐야 솔직히 어떻게 믿겠느냔 말이다.

"뭐, 믿든 말든 그건 여러분들 자유구요. 전 그저 스승님께 배운 방식대로 해석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게 아마도 맞을 거라 생각하네요."

"와, 얄밉다."

"그러게. 우리 편인데도 좀 얄미운 듯."

믿든 말든 자유라고 해 놓고 아무튼 내 말이 맞음.

같은 편이라도 얄밉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태도였고 의성문 무인들의 혈압을 혈류공을 쓰지 않고도 올리는 데 지대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화풀이다.'

'화풀이네.'

그러는 이유를 소담을 포함한 도진을 잘 아는 집행부의 멤버들은 대번에 알아챘다.

저건 화풀이였다.

모두가 생애 처음이었던.

너무나 즐거웠던 1박 2일의 휴가를 망친 범인이 분명한 의성문에 대한 화풀이.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도진을 응원하게 되는 집행부의 멤버들이었다.

도진은 그 화풀이를 하며 씨익 웃고선 말했다.

"굳이 여기서 입씨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어차피 그거 공개하신 거잖아요. 저보다 더 고대 무림의 문자에 정통하신 박사님들이 해석해 주실 텐데요. 그럼 답이 나오겠죠."

"…그때까지 기다리잔 거냐."

시간 끌기를 하려는 의도인가.

의성문의 무인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뇨."

도진은 이번에도 칼 같이 그걸 부정해 버렸다.

"그럴 필요가 어디 있어요. 이건 이거고, 굳이 이게 아니더라도 답은 바로 나오는데."

"…뭐라?"

"아까 말했잖아요. 세계 무림맹에서 공인한 기관에서 테스트를 하자고. 의선약가가 아니더라도 공인 기관은 얼마든지 있고, 거기서 바로 마공이 아니란 걸 인증하면 되는 거죠. 그거면 해결되는 문제 아닌가?"

안 된다.

의성문의 입장에서는 결코 그리지 않았던 그림이다.

하지만 이 갑자기 튀어나온 변수 때문에 완전히 일을 망치게 됐다.

"우리 의선약가는 참관인이 되어 공인 기관에서 원화문의 사람들이 검증을 받도록 하겠소. 우리만 참가해서는 형평성에 맞지 않으니 당신들도 함께 오시오."

약지청이 나서서 내공을 담아 외쳤다.

"오! 재밌겠다!"

"그 결과, 나중에 공개해 주시는 거죠?"

"물론입니다. 결과는 한 치의 거짓없이, 감춤없이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은 의성문이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결정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의성문의 일을 완전히 망쳐 버린 도진이.

의성문의 무인들을 보면서 쓰윽, 입꼬리를 올렸다.

화풀이의 끝이었다.

* * * *

얼마 뒤.

'혈류공 사건'으로 인해 의성문은 밑천까지 탈탈 털리고 속된 말로 개털이 돼 버렸다.

본래 의성문의 계획은 사람들의 지지가 굳건한 원화문의 무인들이 사실은 마공을 익히고 있었다는 프레임을 씌워 뒤흔들려는 것이었다.

하이웨이시는 솔직히 말해 한국과 가까운 것 말곤 특징이 없는 '촌동네'였고 중국 정부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의성문은 그곳의 흑도와 결탁하고 무림맹 지부에도 소위 말하는 기름칠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세상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런 영향력을 이용하여 이웃인 원화문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운 것이었는데…….

한국에서 사건이 유명해지고 해외에도 보도될 만큼 주목을 받아 버린 탓에 일이 촌동네에서 끝나지 않고 중국의 무림맹까지 개입하게 돼 버렸다.

그로 인해 그동안의 부정적인 행위들이 들통나 탈탈 털리는 사이 원화문은 당연하게 혈류공이 마공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고 더 나아가 화타가 익힌 혈류공을 이었다는 정통성까지도 확보하게 됐다.

이대론 공중분해될 위기에 처한 의성문은 무어라도 해야만 했고 자신들 또한 화타가 남긴 서적을 연구하고 계승했다는 홍보를 하기 위해 꽁꽁 숨기고 있던 서적들을 더 공개했다.

여기에는 중국 무림맹의 압박도 있었으니 소위 말하는 '사법거래'로, 서적을 더 공개하면 이번 일에 대한 패널티를 줄여 주겠다는 말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처참했으니 그들이 가진 서적 대부분이 의술과 무공에 대한 부분이 깊지 않은 일기나 일지였음이 밝혀지며 의성문은 최소한의 정통성이 있긴 하나 무공이든 의술이든 수준이 낮다는 걸 스스로 증명한 꼴이 되었다.

당시 해석본에 대한 도진의 해석이 맞다는 쪽으로 국제 기구의 의견이 기울면서 또 한 번 망신을 당한 건 오히려 덤이다.

-야, 그동안 잘못된 해석으로 진료하고 무공 익혔다는 거 아냐. 이 사람들 주화입마로 몇 명 시체 치운 거 아님? ㅋㅋㅋ

-;;; 말넘심;;

-그래도 다행이지. 서적들 공개했으니까 이제 제대로 된 번역 얻을 수 있는 거 아녀 ㅋㅋㅋ 잘 됐네, 잘 됐어.

-니가 젤 나쁜 새끼임ㅋㅋㅋㅋ

그렇게 '해피 엔딩'으로 사건이 끝나고 도진은 원화문의 화정평, 그리고 약지청과 만난 자리에서 감사 인사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당신에게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화정평.

"아우를 도와줘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또 감사를 표하는 약지청에게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화가 나서 한 일이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좋은 추억을 중간에서 망친 의성문에 대한 화풀이였다.

그 화풀이가 좋은 결과를 만들어 냈으니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안 그래도 선생님께는 무언가 보답을 해 드리고 싶었는데, 의도치 않게 그런 보답을 해 드린 게 됐네요."

"보답이라니, 저는 잠룡문주님께 보답을 받을 만한 일을 해 드린 적이 없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오히려 제가 역으로 보답을 해 드려야 할 것만 같은 사명감을 느끼게 되는군요."

"아, 그게 그렇게 되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화기애애한 가운데 그런 담소를 나누었고 약지청은 물론, 약지청과 호형호제하는 화정평이 장로로 있는 원화문과도 좋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그 화풀이가 가져다 준 이득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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