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화
늦은 밤중에 일어난 일의 정리를 했다.
상처를 치료받으며 원화문의 부부는 우선 본문에 연락을 하여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려 대비하도록 했고 의선약가는 경계령을 내리고 혹시 모를 일들에 대한 대비에 착수했다.
도진 역시 잠룡문의 차원에서 나지윤과 바할라에 연락하여 좀 더 넓고 깊은 영역에서의 정보를 수집하도록 말해 두었다.
그리고 계곡에 그대로 두었던 캠핑 용품들의 정리를 집행부 멤버들과 함께 했다.
의선약가의 무인들, 그리고 무림맹과 정부측 무인들이 함께 엄중한 경계를 펴는 가운데 직접 용품들을 정리하고 회수한 것이다.
한국도 아니고 외국의 무인들을 습격한 정체모를 이들이 여전히 한국에 숨어있을지도 모를 제법 심각한 일이었기에 정부와 무림맹의 반응은 가볍지 않았다.
같이 묶어 흑도라 뭉뚱그리지만 동네 양아치 수준의 흑도와 청부업에 종사하는 무인들의 위험도는 완전히 다르니까.
하물며 그것이 한국이 아니라 밀입국한 외국의 무인이라면 더욱 위험도는 올라간다.
때문에 의선약가 주변의 산은 물론이요 근처에 있는 인천항과 공항까지도 경계 태세가 걸렸다.
그런 일들이 진행되는 사이 동이 텄다.
-아쉽게 되었구나.
스승 위지혁의 말에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생을 포함하여 처음으로 해 보는 경험이었다.
도진만이 아니라 집행부의 멤버 모두가.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새로우면서도 즐거운 추억으로 마무리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로 중단이 되어 버렸다.
불편한 쪽잠을 자고 일어난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다.
아이들로서는 어떤 식이든 돕고 싶은 마음이겠지만, 그리고 도진 역시 상세한 정보 수집을 말해 두었지만 그 마음과는 다르게 여기 머물러 어떻게 도움을 줄 방법은 없었다.
거기에 분명히 계속 해야 할 '일상'이 있으니까.
한 다리도 아니고 두 다리 건너의 입장에 있는 집행부의 멤버들은 약리지를 제외하고 돌아가야 했다.
"아침 든든하게 먹고들 가세요."
약리지가 분위기가 우중충해지지 않도록 웃으며 말했다.
"헤에, 병원밥 맛없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인가 봐요."
성민혁이 메뉴를 보며 말했는데 그게 너스레가 아니어서 식사는 정말 맛있었다.
도진으로서도 전생에서의, 그 악몽과 같던 기억 속에 섞여 있던 병원밥에 대한 관념을 바꿔도 될 정도로.
그렇게 아침밥까지 다 먹고 정리한 짐을 들고, 짐보다 무거운 마음까지 이고 의선약가를 떠나려 할 때.
그들은 찾아온 것이었다.
정문 앞으로 몇 대의 차가 멈추더니 일련의 무인들이 내려섰다.
그 정체는 대번에 알 수 있었는데 당당하게 무복 여기저기에 문파의 이름과 문파를 상징하는 표식을 수놓아 두었기 때문이다.
醫聖門.
등판에 그토록 커다랗게 의성문이란 글자를 수놓아 두었으니 모를 수가 없다.
'여길 찾아왔다고?'
의외였다.
습격이 이루어진 게 어제 늦은 밤이었는데 바로 아침에 이렇게 찾아오다니.
하지만 그 의외는 이어진 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정문을 지키는 의선약가 소속의 무인들 또한 얼추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의성문의 무인은 그 질문에 날카로운 기세를 두른 채 크게 외쳤으니.
"의선약가에 숨어 있는, 마교의 마공을 익힌 잔당을 데려오시오!"
'……뭐?'
-허어?
그야말로 상상도 못한 소리였다.
의선약가의 무인들 또한 마찬가지로 전혀 생각지 못한 요구에 잠시 대답이 늦었다.
"…마교의 마공을 익힌 잔당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웅성웅성-
경계를 높였다지만 일상을 제한할 정도의 사안은 아니었기에 주변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히려 무슨 일인가 싶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중에 그냥 넘길 수 없는 외침을 들었으니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시선을 받으며 의성문의 무인은 허리와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선 말했다.
"새벽에 우리는 불법으로 밀입국하던 흑도의 무인들을 체포했소. 그들은 상당히 많이 다쳐 있었는데, 치료와 함께 취조를 하던 중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으니 그들의 목표였던 이들! 원화문의 장로 두 사람이 마교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이었소!"
"마교의 무공?"
"진짜야, 이거?"
술렁임이 커져 간다.
의성문의 무인이 중국어가 아닌 한국어로 외쳤기에 그 내용은 커다란 파문이 되어 퍼져 나갈 수밖에 없었고 소란이 커졌다.
그리고 그 소란이 걷잡을 수 없게 되기 전에, 약지청을 포함한 의선약가의 인물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확언할 수 있는 내용입니까?"
"약지청이다."
"오."
의선의 형에서 그치지 않고 그 스스로의 명성만으로도 무림의 명숙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약지청의 등장에 시선이 집중된다.
그 약지청을 필두로 한 의선약가의 인물들 사이에 원화문의 부부가 포함되어 있어 의성문의 무인들이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의성문에서 대표로 나서 이야기하던 무인이 약지청의 질문에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분명히 단언할 수 있는 내용이오."
"근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약지청의 목소리는 일정하면서 편안하다.
거기에는 소란을 가라앉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고 그래서 더욱 불편한 얼굴로, 그러나 자신감을 숨기지 않은 얼굴로 의성문의 무인이 말했다.
"우리 의성문에는 의성께서 남기신 여러 서적이 있소."
의성은 화타의 대표적인 별호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화타가 남긴 서적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건데, 실제로 일부 공개된 것들이 진본으로 알려지면서 의성문은 유명해졌다.
"그 서적 중 하나에 이런 내용이 있소."
- - - -
마교(魔敎)의 무인에게서 혈류공(血流功)을 얻었다.
……
분석 결과 혈류공은 체내의 피의 흐름을 가속하여 평소 이상의 운동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준다.
……
혈류공을 사용하면 눈의 흰자위가 붉게 물들어 보기에 좋지 않고 마공처럼 보인다.
……
혈류공에 의해 혈기(血氣)가 머리에 치달으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들거나 미치광이가 될 수 있다.
또한 폐인이 될 수 있으니 경계하여야 한다.
- - - -
의성문의 무인은 그렇게 읊으며 꽤 커다란 사진 두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이것은 진본, 그리고 진본의 해석과 주석을 포함한 필사본을 촬영해 온 것이오. 진위가 의심된다면 공식적인 자리에서 진본을 공개할 용의도 있으니 이 자리에서의 의심은 받지 않겠소."
사진에는 그의 말대로 화타가 직접 작성한 듯 보이는 낡은 서적과, 그 낡은 서적을 필사한 뒤 거기에 해석과 주석을 단 필사본이 찍혀 있었다.
진본은 고대 무림의 언어로 되어 있어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면 읽는 것조차 불가능했으나 다른 하나의 사진에 해석과 주석까지 달려 있어 구경하는 이들도 확인이 가능했다.
워낙 자신에 찬 목소리였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진본을 공개할 용의까지 있다 하니 그 내용을 의심하기는 힘들었다.
"마교?"
"마교가 진짜 있는 거였어?"
조용했던 사람들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 상황보다 의성문의 무인이 언급한 '마교'에 더욱 집중되어 있었으니 지금껏 마교에 관해 기록한 문헌은 발견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처음으로, 어느 정도 신뢰할 만한 문서에서 마교가 언급되고 있다는 게 대중에 드러난 것이었다.
'음…….'
-어떻습니까, 스승님.
도진은 조금 진지한 얼굴로 스승 위지혁에게 질문했다.
위지혁은 도진의 신안을 통하여 사진을 확인하고선 말했다.
-저것이 진본이라면, 당시에 존재하던 마교의 명맥을 잇던 이들이 화타와 접촉했다고 봐야겠지.
그렇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좀 복잡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과연 어떤 이들이 화타와 접촉했을까.
또한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의 실타래가 여러 갈래로 풀리며 복잡하게 얽히려 든다.
그 사이 술렁임마저 뚫고 의성문 무인의 목소리는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 서적에 기입된 것과 완전히 같은 증상을 체포한 흑도의 무인들을 치료하며 확인했소! 그리고 증언 또한 확보했지!"
"그들은 분명히 힘에 부쳐하던 원화문의 장로들이 갑자기 빨라지고 또 강해졌다고 했소! 그리고 그들의 눈이 마인(魔人)처럼 붉어졌다고도 증언했지. 그렇게 된 장로들에게 공격을 당하니 체내의 피가 갑자기 빨라지며 혈기가 머리까지 치달으려 해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소. 이렇게 서적에서 언급했던 모든 것에 해당하는 원화문의 장로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마공을 익힌 마인이 아니겠소!"
"……."
커지는 목소리의 볼륨만큼이나 설득력이 더해진다.
사람들이 거기에 설득되는 것이 분위기를 통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정식적인 자리에서 말해야만 하오. 스스로가 마인인지, 아닌지를."
그리고 시선은 이제 원화문의 부부에게로 옮겨간다.
부부 중 남자, 화정평이 무거운 입을 뗐다.
"분명히 우리는 혈류공을 익혔소. 피의 흐름을 가속하여 신체 능력을 높이는 공능이 있는 것까지도 맞소."
"헐."
"저 말이 진짜야 그럼?"
"하지만!"
화정평의 얼굴에 힘이 깃들었다.
"혈류공은 마공이 아니오."
"마공이 아니다?"
의성문의 무인이 말도 안 되는 소릴 한다는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화정평은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그렇소! 우리는 무림맹이 공인한 병원을 통하여 내공에 문제가 없다는 걸 이미 증명했소. 그런데 어째서 혈류공이 마공이며 우리가 마인이란 소릴 들어야 하오!"
그랬다.
중국은 다른 나라보다 좀 더 무림의 색채가 짙다.
'삼권분립'에서 논하는 삼권에 무림을 더하여 '사권분립의 시대'라고들 말하곤 한다.
하지만 중국은 무림의 색채가 훨씬 짙어 삼권 전체에 무림이 녹아든 느낌이 강하다.
이를테면 정부가 또 하나의 무림맹 역할도 하고 있는 게 그렇다.
그리고 중국은 골머리를 앓고 있는 흑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무림인이라면 무조건 익히고 있는 무공이 사공이나 마공이 아니라는 걸, '도핑'을 하지 않았다는 것까지 증명하도록 법제화해 시행하고 있었으니 원화문은 거기에 단 한 번도 문제가 제기된 적이 없었다.
"흥! 마인이라면 모름지기 그런 것을 빠져나갈 쥐구멍을 만들어 두는 법이지! 억울하다면 청문회에서 다시 한 번 증명해 보시오!"
의성문의 무인은 그렇게 외쳤지만 원화문으로선 절대로 따를 수 없었다.
청문회에서 증명하라고? 그 청문회가 제대로 된 청문회일 거라는 보장도 없으며 애초에 가는 길에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이건 정부가 주관하는 공식적인 청문회가 아닌 그들과 결탁한 지방 세력의, 정부가 아닌 흑도 세력에 물들어 버린 이들의 공작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그런 이유로 이야기가 길어지려던 차에 도진이 나섰다.
"흠. 잠깐 괜찮을까요?"
조용하지만 명확한 존재감에 중심으로 쏠렸던 시선이 도진에게로 향한다.
동시에 의성문 무인의 날카로운 기세가 도진에게로 쏘아졌다.
"관련자가 아닌 애송이는 나서지 마라!"
버럭 소리치며 도진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의성문의 무인.
그리고 도진의 고개가 슬쩍, 모로 기울었다.
'아. 도진이 화났다.'
그걸 보자마자 소담이 속으로 중얼거렸고 도진을 잘 아는 집행부의 멤버들 또한 저 사람 큰일났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두웅-!
슬쩍 고개가 모로 기운 도진의 기세가 의성문 무인의 기세를 찢어발기며 역으로 그를 짓눌렀다.
"헉!"
폐부가 쥐어짜이는 듯한 압박에 숨을 토해내는 의성문의 무인.
그를 보며 도진이 말했다.
"무협지랑 현실도 구분 못하는 분들이셔서 그런가, 사리분별이 잘 안 되시나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