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476화 (476/741)

475화

스으으…….

도진이 몸을 일으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솜이가 날카롭게 기세를 흘렸다.

스르륵.

그리고 그 기세가 조용하던 텐트에 인기척을 만들어 냈으니 심상치 않은 솜이의 기세에 모두가 몸을 일으킨 것이다.

"…왜 그래요, 선배?"

약리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진에게서 평소엔 볼 수 없는 낮은 온도를 느꼈기 때문이다.

도진이 주위에 모인 집행부 멤버들 중 약리지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리지야."

"네, 선배."

"요 며칠 사이에 의선약가나 의선약가에 방문한 손님이 산에서 실종되거나 하는 사건, 사고가 있었어?"

"아뇨. 없었어요."

예상대로의 대답에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이렇게 계곡에서의 물놀이가, 그것도 외부인에게 허락될 리가 만무하다.

"그럼 요 주변으로 약초 채취 등을 이 시간에 나간 사람은?"

"제가 알기로는 없어요."

"니가 모르고 있을 확률은?"

"없지는 않지만……."

"그래."

"무슨 일이신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약리지의 요청에 도진은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

"피 냄새가 나."

"피, 피 냄새요?"

약리지가 본능적으로 목소리를 억누르며 물었다.

긴장하며 듣고 있던 모두의 기세가 출렁였다.

도진은 평소와 같은, 그러나 온도만큼은 분명히 낮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희는 맡기 힘들 거야. 물에 섞여 나는 거거든."

모두가 본능적으로 후각에 감각을 집중했지만 도진의 말대로 피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도진이 맡은 피 냄새는, 그야말로 이 옆으로 흐르는 물에 섞인 미미한 양의 피에서 나는 냄새였으니까.

인간이 맡기엔 내공으로 감각을 증폭할 수 있는 경지의 무림인이라 해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진이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건 사신(死神) 장호에게 전수받은 무공과 잡기(雜技)의 덕분이었다.

도진 역시도 순수하게 피 냄새를 맡은 건 아니었다.

아마 그것이 단순한 피였다면 도진도 피 냄새를 맡을 순 없었을 거다.

그러나 그 피에 내공이, 그러니까 무림인의 내공이 섞여 있었기에 단련한 감각과 사신공(死神功)의 공능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솜이의 경우는 영물이었기에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훨씬 감각이 민감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여기서 한 가지 더.

아직 사신공의 성취가 부족한 도진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피에 섞인 내공이 짙다는 건 그 무림인이 내공을 운용하는 중에 피를 흘렸다는 것이다.

'흠.'

오래 생각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도진은 대번에 판단을 내리고 말했다.

"나랑 소담이, 상미가 우선 확인을 하러 갈 거야."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지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신해도 될 것 같다.

다만 만약 부상자가 있다면. 도와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 외에 늦지 않게 확인해야 할 일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까 확인하러 갈 것이다.

하지만 설령 경계의 문을 두드리는 도진과 내단을 품은 영물인 솜이가 있다 해도 리스크는 결코 제로가 아니다.

"나머지는 바로 의선약가로 내려가서 상황 확인을 요청해 줘."

"알겠습니다."

도진의 말이 끝나자 클로에가 가장 먼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소지존의 명에 즉시 따르는 것이었다.

클로에가 그렇게 시작을 끊어주었기에 길게 이야기가 끌리지 않고 결론이 났다.

본래 무림인이란 이런 상황에서 적확하게, 그리고 빠르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걸 제대로 된 곳이라면 귀에 딱지가 앉도록 강조하기에 결론이 나자 우물쭈물하지 않고 도진의 말대로 모두 움직였다.

도진과 소담, 상미가 솜이와 함께 피 냄새의 근원으로 추정되는 상류로 향하고 나머지는 의선약가를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늦은 밤이었지만 달이 밝아 시야는 제한되지 않았고 솜이가 있었기에 낯선 길이지만 수월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달리길 약 10분. 상당한 거리의 산길을 달린 도진은 곧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슥-

도진이 오른손을 올리자 소담과 상미가 속도를 늦추었고 솜이 역시 도진의 앞에서 근육을 긴장시켰다.

도진의 시야와 감각이 그렇게 짙은 피 냄새를 풍기는 근원을 확인했다.

'…남녀.'

두 명의 남녀였다.

서로가 부축을 하고 있는데 본능적으로 부부임을 알 수 있었다.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데 물에 젖은 붕대에 붉은색이 번지고 있다.

장호에게 배운 지식을 토대로 보았을 때 응급 처치의 수준 자체는 높아 보였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상처가 많았고 상황이 급박했던 것 같다.

억지로 계곡을 빠르게 이동하던 두 사람은 곧 도진의 기척을 확인하고선 흠칫 경계했다.

적인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히 신원과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도진이 물었다.

"습격을 당하셨습니까?"

"…당신들은?"

"이곳의 소유주와 인연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 의선약가의 사람이신가요?"

얼굴이 밝아지고 목소리에 희망이 깃든다.

그렇게 짧은 문답이었지만 도진은 이들이 적이 아니며 의선약가와 친분이 있는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신안(神眼)을 통하여 확인한 기질이 악하지 않다.

더불어 낯선 이를 본 순간 흠칫하며 경계하였지만 이곳이 의선약가이며 그곳 소속이라 말하는 순간 안심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인 부분.

그들은 한국어를 썼지만 중국인의 억양이 묻어났다.

'원화문의 사람들이구나.'

따로 표식은 보이지 않지만 반쯤 확신하기에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중국인이었으며 요 근래 원화문의 사람들이 의선약가에 머물렀다는 정보를 도진은 나지윤에게서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예의 그 사건으로 인해 원화문과 의선약가가 서로 사람을 보내 두었던 거다.

잠룡문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지만 제법 큰 사건이었던 만큼 답청문과 바할라의 정보 단체가 해당 사건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고 도진은 그렇게 수집하여 정리된 내용을 숙지해 두었다.

도진이 알기로 바로 오늘, 의선약가를 떠난다고 했었는데 그렇게 떠나는 길에 습격을 받았다는 그림이 나온다.

도진은 거리를 좁혀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습격을 받았습니다. 겨우 그들을 뿌리칠 수 있었지만 이렇게 연락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는 게 한계였습니다."

'음…….'

도진의 예상대로 그들은 습격을 받아 휴대폰도 잃고 쫓기다 여기까지 왔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야기는 여기서 잠시 중단되었다.

도진이 후배들을 보내 요청했던, 의선약가의 사람들이 몰려오는 기척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주변이 밝아지고 의선약가의 무인들이 도착했다. 그 안에는 도진이 보냈던 약리지를 포함한 집행부의 멤버들이 있었는데, 약리지가 눈을 크게 뜨고선 앞으로 나섰다.

"앗! 삼촌! 이모!"

* * * *

도진이 마주친 원화문의 부부는 생각보다 더 의선약가와 가까운 사이였다.

"……."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 가주의 형인, 약리지에겐 큰아버지가 되는 약지청이 직접 나와 그들의 상처를 살폈던 데서 그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의료 단지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나오는 의선약가의 본가 건물에서 그들은 약지청에게 치료를 받았고 그러면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집행부의 다른 멤버는 그 자리에서 제외되었지만 직계인 약리지, 그리고 이번 일에 한 발 걸치게 된 이들의 대표로서 도진은 이야기를 함께 들었다.

"…그러니까, 중국의 흑도(黑道) 소행은 확실하다는 것이군."

이야기를 다 들은 약지청의 확인에 원화문의 부부 중 남자 쪽, 화정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형님. 얼굴만 가렸지 흑도 특유의 잔인함과 내공의 혼탁함을 숨길 생각 자체가 없어 보였습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무림인이라면 흑도를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다.

마음의 창인 눈은 그렇기에 흑도에서 구르는 이들의 혼탁함을 그대로 반영하니까.

따로 그것을 숨기는 기술을 연마하지 않았다면, 그러고서도 굳이 숨기지 않는다면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다.

"…의성문이 보낸 걸로 봐야겠지?"

"예. 저희는 확실하다 보고 있습니다."

"으음……."

의성문은 의가를 자처하지만 하는 행동은 흑도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했다.

도진 또한 그와 관련한 정보를 보았고 습격을 사주한 게 의성문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하다고 보았다.

다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적잖게 있었다.

일단은 왜, 굳이 여기서 습격했냐는 거다.

의성문은 신흥 세력으로 기반이 단단하지 않다.

하물며 국외인 한국에서야.

공작을 할 거라면 은폐가 쉬운 바다 위도 있고 본토도 있는데 왜.

거기에 더해서 결과다.

이 부부는 원화문의 장로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는 고위 인사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이 부부의 무공 수준을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이들은 일단 도진보다 약했다.

말이 쉬워 초절정이지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는 무림인의 수는 무림 르네상스 이후 몇 배나 늘었다지만 그럼에도 결코 많지 않다.

거기에 이들은 무공보다 의술에 더 집중하는 의가의 사람들이다.

재능이 없지는 않아서 오랜 세월 꾸준히 수련하여 절정에 이른 정도였다.

그러니까, 직설적으로 말해 상황만 만든다면 얼마든지 습격하여 죽일 수 있는 수준이라는 소리다.

이들은 숙소에서 머물다 새벽에 습격을 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몰리고 몰려서 도움을 청하지도 못하고 인적이 드문, 의선약가가 반절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이곳 산까지 몰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마지막 힘을 짜내어 의선약가가 소유하고 있는, 그러니까 의선약가의 영역에 들어서자 그들은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했다.

'왜?'

습격을 당하고 목숨을 위협받았기에 그들은 당장 넓게 생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제 3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보았을 때 이건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상당한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결코 적지 않은 거리를 도주하여 결국 의선약가의 영역에 도달했다.

말이 되지 않는다.

의성문이 사주를 한다면 '죽여라', 하다못해 '생포하라'고 하는 게 일반적일 테고 그렇다면 인적이 드문 곳으로 몰아붙였을 때 전력을 다해 죽이든 생포하든 해야만 했으며 애초에 의선약가의 구역으로 진입하는 것 자체를 차단해야 정상이다.

한데 그걸 허용하는 걸로도 모자라 그냥 물러갔다고?

의선약가의 소유라 해서 그 넓은 구역을 다 철저하게 지키진 못한다.

때문에 의선약가의 경계는 외곽을 감시 카메라 등으로 지키고 의료 단지 주변에 철저하게 전력을 집중하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더 추격할 수도, 공격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상하네요."

"음?"

도진은 그 생각을 혼자 하지 않고 모인 이들에게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렇군."

"확실히."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화문의 두 사람 또한 불쾌해하지 않고 납득하였고 그래서 불편한 얼굴이 되었다.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것이군요."

"예.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습격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일단은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엔 정보가 부족했다.

그리고 그 정보가, 날이 밝자마자 의선약가를 찾아왔다.

"마교의 마공(魔功)을 익힌 잔당을 데려오시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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