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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474화 (474/741)
  • 473화

    대망의 계곡 가는 날이 되었다.

    도진은 슈킨팍시에 짐을 한가득 싣고 아침부터 길을 나섰다.

    "타, 서진아."

    "고마워요, 형."

    "감사합니다, 스승님."

    바로 옆집의 이웃인 우서진부터 시작하여 클로에, 소담과 상미까지 픽업했다.

    "냐앙."

    그리고 도진의 어깨에서 상미의 어깨로 폴짝 뛰어 이동하는 솜이까지 여섯이 함께 약리지의 본가로 향했다.

    약리지의 본가, 의선약가에는 이미 가 본 적이 있었기에 내비게이션을 켤 것도 없이 최단거리로 움직였다.

    서울의 외곽으로 빠져 의선약가로 이어지는 전용 도로에 진입하니 거대한 산에 폭 안기듯 자리잡은 첨단 의료 단지가 곧 모습을 드러낸다.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었기에 정문을 지키는 무인과 간단한 이야기를 하고 확인 절차를 거친 뒤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의선약가의 관계자들을 위해 준비된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니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벽태웅과 성민혁, 성지인이 다가왔다.

    보육원의 일을 돕기 위해 일찌감치 면허증을 따고 차까지 가지고 있던 벽태웅이 후배 둘을 태우고 온 것이다.

    이렇게 보니 벽태웅도 확실히 선배의 태가 난다 생각한 도진이었다.

    벽태웅의 차는 픽업 트럭이었기에 도진이 싣고 온 것의 두 배는 되는 양의 짐을 싣고 왔다.

    "일찍 왔네?"

    "예."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짐을 내린다.

    여기서부터는 차를 이용할 수 없었기에 미리 들고 올라갈 수 있도록 짐을 정리해 두었다.

    "앗! 일찍 오셨네요!"

    벽태웅이 과연 '인간 중장비'다운 면모를 보이는 가운데 약리지가 쪼르르 달려왔다.

    새하얀 원피스 차림의 그녀는 햇살을 받아 싱그러운 이미지를 두르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뒤로 천천히, 그러나 느리지 않게 걸어오는 중년인이 한 명 있었으니 약리지의 큰아버지인 약지청이다.

    도진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가장 먼저 나서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예, 반갑습니다."

    한참 어린 도진에게 예의를 잃지 않고 은은한 미소로 인사를 받아주는 그는 다름 아닌 우벽진의 부탁으로 도진네의 영약을 좋은 보약으로 만들어 주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평범한 인상이지만 거기에 깃든 부드러운 미소와 분위기가 그를 특별하게 만든다.

    의선약가의 가주인 의선 약지후의 형으로 의선의 형으로서 모자람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

    그 평가에 걸맞게 그런 위치와 명성에도 겸손함을 잃지 않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리지의 친구분들이 오신다고 하여 마침 손이 남는 제가 나왔습니다."

    제아무리 약리지가 함께 한다지만 외부인이 의선약가의 사유지에 출입하는 일인지라 정문 통과 절차와는 별개로 가문의 사람에게 확인을 받아야만 했다.

    보통은 적당한 사람이 나왔을 텐데 이번엔 무려 가주의 형이자 무림의 명숙이 나왔으니 거기에 대한 설명을 약지청이 직접 해 준 것이었다.

    "본래는 조금 더 타이트한 절차가 필요하지만…… 우리 가주가 워낙 딸을 예뻐하다 보니 이번엔 그런 과정이 생략되었습니다."

    "아잇! 큰아버지!"

    "평소엔 큰아빠라고 하면서 이렇게 밖에서는 단어를 고르는 게 참 귀엽지 않습니까?"

    "하하. 동의합니다."

    "아이잇!!"

    약리지가 파닥거리지만 약지청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

    거기에 도진이 하하 웃었고 좋은 분위기에서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저희는 동행하지 않으니 재미있게 하룻밤 머물다 가시면 됩니다."

    "예,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저번의 보약. 감사했습니다."

    "하하하! 예. 그럼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약지청은 도진의 인사에 흐뭇하게 웃고선 약리지를 두고 돌아갔다.

    "좋으신 분이네요."

    "응. 그런 이야기 많이 들으셔."

    성민혁의 말에 약리지가 어깨가 올라가서는 대답했다.

    약리지가 아버지 못지 않게 좋아하는 사람이 큰아버지임을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티가 나는 모습이다.

    '흐음…….'

    그렇게 만남은 더없이 좋았지만 그 분위기와 달리 의선약가는 조금 어수선함이 묻어나는 모습이다.

    도진은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는데, 도진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대부분이 알고 있는 일 때문이었다.

    의선약가는 세계적인 의가로 여러 곳과 협약을 맺고 있으며 중국에도 그런 가문이 하나 있었으니 그 유명한 화타(華陀)의 진전을 이었다 주장하는 원화문(元化門)이다.

    화타는 실존 인물이지만 그가 실제로 과연 얼마나 대단한 의술을 지녔는지, 그리고 얼마나 대단한 '무공 실력'을 지녔는지에 관해서는 명확하게 전해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걸 명확하게 할 만한 사료(史料)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런 시대에 화타의 진전을 이었다 주장하는 가문이 일정 기준 이상의 실력과 명성을 지닌 것으로 기준을 두어도 몇이나 되는데 그중 하나가 원화문이었다.

    원화문은 의술도 의술이지만 특히 오금희(五禽戱), 화타가 창시했다는 기공(氣功)을 문파의 절기로 홍보함으로써 유명해졌다.

    바로 그 원화문이 얼마 전 동일하게 화타의 진전을 이었다 주장하는 다른 문파와 충돌이 있었다.

    의성문(醫聖門)이란 이름의 문파가 돌연 자신들이 진정한 화타의 후예이며 원화문이 익히고 있는 오금희가 가짜라고 선언한 것이다.

    원화문으로선 결코 그냥 넘아갈 수 없는 일이었고 다툼으로 번졌다.

    이 과정에서 원화문이 특허를 낸 의술 중 하나가 자신들의 기술을 훔쳤다는 주장까지 하면서 다툼은 격화되었고 여기에 의선약가가 휘말림으로써 한국에서도 큰 뉴스가 되었다.

    협약을 맺은 원화문이 의선약가와 교류하는 과정에서 바로 그 훔친 기술을 전수했고 의선약가가 그것을 사용했다며 시비가 걸린 거다.

    거두절미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해당 문제로 진행된 소송은 의성문이 패소했다.

    사실 주장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어 관련 지식이 있는 이들은 모두 의성문이 패소할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오금희에 관해서만큼은 누가 맞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지루한 싸움이 지금도 이어지는 중이었다.

    의선약가가 어수선한 건 그런 배경으로, 소송과 관련한 부분이 해결되어 직접적으로 문제에 얽히진 않게 되었으나 그 여파가 아직 남은 것이다.

    그 사정을 모두가 알고 있었으나 누구도 티를 내지 않았다.

    약지청이 힐링을 위해 찾아온 조카와 조카의 친구들이 신경쓰지 않을 수 있도록 티를 내지 않았듯, 오늘은 그런 머리 아픈 이야기를 하는 날이 아니었으니까.

    "오케이. 그러면 올라갈까."

    "네!"

    각자 짐을 들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산에 올랐다.

    약초 채취 등을 한다지만 자연을 보존하고 오히려 그 기운을 더 강하게 하기 위해 의선약가에서 공을 들이는 만큼 그저 안에 들어선 것만으로도 느낌이 확 달라진다.

    영약까지는 아니어도 좋은 기운을 품은 식물들이 자라는 곳이다 보니 감각이 뛰어난 무림인에겐 그야말로 최고의 삼림욕 장소다.

    "여기로 가면 돼요."

    자기집 뒷산(?)이었기에 약리지가 앞장서서 걸었다.

    모두가 무림인이었던 만큼 제법 무거운 짐을 지고도 가파른 산길을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었고 오래 지나지 않아 물내음이 나고 물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폭포가 있어요."

    "오, 폭포가?"

    "네!"

    도진의 말에 약리지가 기대하라는 얼굴로 성큼성큼,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약리지의 걸음에 맞춰 상당한 속도로 나아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약리지가 말했던 폭포를 볼 수 있었다.

    콰아아아아아-!

    "와……."

    "경치 좋네."

    굳이 내공을 운용하지 않았기에 흐른 땀을 훔치며 집행부 멤버들이 감탄했다.

    탁 트인 시야에 절벽이 병풍처럼 늘어서고 그 가운데를 폭포가 힘차게 내리꽂히고 있었다.

    마침 며칠간 비가 왔기에 폭포의 기세가 대단했고 내리쬐는 햇빛에 물안개와 무지개까지 걸려 절로 감탄이 나오는 풍경이 완성되었다.

    "가뭄이면 물줄기가 많이 약해지거든요. 때를 잘 맞춰 온 거 같아요."

    "응, 그렇네."

    약리지의 말에 도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미소가 지어지는 건 풍경이 좋아서일까, 아니면 날이 좋아서일까.

    아니. 이건 아마도 좋은 이들과 함께 왔기 때문일 것이다.

    쏴아아아아아-

    시원한 폭포 소리를 들으며 우선 짐을 내려놓고 정리했다.

    약리지가 말하길 가문의 사람들이 자주 찾는 장소는 아니지만 그래도 간간이 방문하는 곳이라 했는데 그 말대로 희미하게 사람의 흔적이 보였다.

    "우선 텐트부터 칠까?"

    "네!"

    폭포에서 좀 떨어진 곳에 평평한 공터가 있었기에 가져온 텐트부터 꺼냈다.

    하룻밤 편히 머물 수 있도록 8인용 텐트 두 개를 샀다.

    일반적으로 6인용 텐트가 네 명이 여유를 두고 머물 수 있는 정도 크기라고 직원이 설명해 주었기에 일부러 8인용을 산 거다.

    "텐트 쳐 본 적 있는 사람?"

    도진이 물었고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도진의 시선이 약리지의 앞에서 멈추었다.

    "왜 날 봐요, 선배?"

    "응, 귀여워서."

    "…아닌 거 같은데."

    그렇게 무경험자들이 두 개의 텐트를 치게 됐다.

    설명서가 있었기에 그것을 보고 차근차근 해 보기로 했다.

    한쪽은 도진이 중심이 되어 움직였고 다른 한쪽은 우서진과 벽태웅이 도맡게 됐다.

    "우선 그라운드 시트를 깔고……."

    도진이 설명서를 중얼거리니 클로에와 상미가 나서서 바닥에 시트를 깔았다.

    "폴대를 치고."

    폴대 하나는 설명서를 읽는 도진이 박았고 나머지를 소담과 약리지가 박았다.

    "아, 거기 잡아줄래?"

    "네, 오빠."

    텐트를 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요즘 텐트가 워낙 잘 나와 원터치도 있다던데 매장엔 그게 없어 조금 설치가 번거로운 걸 샀다.

    함께 힘을 합쳐 그런 텐트를 세우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이 정답이었다.

    원터치까진 아니지만 혼자서도 어떻게든 칠 수는 있는 것이었고 실력 있는 무림인이라면 그것이 더욱 수월해진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휙휙 몸을 쓰는 대신 여유롭게, 함께 움직여 뚝딱뚝딱 보기 좋게 텐트를 완성하는 경험은 과연 나쁘지 않았다.

    텐트를 다 치고 옆을 보니 우서진과 벽태웅은 이미 완성하고 주변의 정리까지 하는 중이었다.

    "역시 서진이랑 태웅이야."

    장인의 후계자인 우서진과 인간 중장비 벽태웅의 조합은 과연 발군이었다.

    "오케이! 텐트도 다 쳤고 그럼 이제 물에 들어가 볼까?"

    "찬성!"

    텐트에 테이블 등 세팅을 다 완료하니 정말로 그럴싸한 캠프가 완성됐다.

    그 캠프에 짐을 정리하고 남녀 나뉘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리고 함께 들고 나온 것이 있었으니 고무 보트에 튜브 등의 물놀이 장비였다.

    바람을 채우기 위해 공기 주입기도 함께 들고 왔는데, 전동이 아니라 수동이었다.

    "제가 채우겠습니다."

    벽태웅이 솔선수범하여 나섰다.

    후욱, 후욱, 후욱.

    그리고 수동이 전동이 되는 마법을 보았다.

    "와, 진짜 잘하는구나, 너."

    "보육원에서 많이 해 봤습니다."

    무림인이니까 전동 못지 않은 효율이야 당연히 보일 수 있는 것이겠지만 전문가의 포스까지 풍겨 모두가 감탄했다.

    그렇게 바람까지 다 넣은 뒤 물에 들어가기 전.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도진이 모두에게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수영 배운 사람?"

    "……."

    놀랍게도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어……."

    그랬다. 아무도 이런 계곡에 놀러온 적도, 수영을 배운 적도 없었던 거다.

    도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약리지에게서 멈추었다.

    거기에 반사적으로 약리지가 아잇, 하고 항의하려던 순간이었다.

    "냥."

    한 명, 아니 한 마리가 앞발을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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