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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473화 (473/741)
  • 472화

    일반적으로 무림인은 친구를 만들기가 어려운 환경에 있었다.

    언뜻 생각해 보았을 때 육체를 서로 부딪치는 경우가 많으니 그것을 통하여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좀 다르니 무공이 철저하게 비전(秘傳)이기 때문이다.

    무림인은 무공의 전달 과정에서 철저하게 외인(外人)을 차단한다.

    예의 '마법'이 아닌, 그러니까 신비가 깃들지 않은 '마술'의 영역에 있는 무공은 '트릭'을 감춰야 하기에 더더욱 그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대련 등의 경우도 같은 의도로 동일 인물과의 반복이 되지 않도록 조율하니 무공에 대다수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무림인은 외인과의 인연을 쌓을 기회가 드문 것이다.

    그나마 학교에서 인연을 맺을 기회가 생기긴 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신분일 경우 이 또한 의도적으로 시간을 내어야 하고 인연을 이어나갈 명확한 의지가 있어야 하니 여기에 할애할 시간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약리지의 경우만 봐도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약리지는 의선약가의 후계자로 무공에 그치지 않고 의사가 되기 위한 과정에도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다.

    그 유명한 수련의(修練醫) 과정.

    물론 '도시전설처럼 보이는데 현실'인 수준은 아니지만 빡세기로는 그에 못지 않은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니 친구를 사귈 시간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숭무고 학생들의 경우 그렇기에 마치 의무처럼 스케줄을 쪼개고 또 쪼개어 인맥을 구축하기 위한 시간을 만든다.

    그들에겐 그것 또한 일이었으니까.

    약리지는 억지로 그런 시간을 만들지는 않았으나 남사현이라는 소꿉친구가 있었다.

    인싸 남사현의 주변으로 모인 이들이 자연스럽게 약리지까지 포함하는 그룹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있는 어린 시절에 생기는 인연을 그대로 친구로 가져가는 패턴이다.

    다만 한 가지 문제라면, '너무 맑은 물'에서 사는 남사현과 그런 남사현을 이해하고 함께 행동하는 아이들과 약리지는 완전히 섞이지 못했고 얇지만 명확한 벽을 세웠다는 거다.

    그러니까…….

    "응, 그렇네. 너 친구 없구나."

    "팩트는 폭력이거든요, 선배."

    그 말을 증명하듯 약리지는 대미지를 입은 얼굴로 항의했다.

    "그래도 괜찮아, 리지야. 너처럼 예쁜 애가 아싸 찐따라니, 이렇게 레어한 특징을 가진 애가 또 어디 있겠어?"

    "이게 욕이야 칭찬이야."

    하얀 얼굴이 조금 붉어진 채 약리지가 아리송해졌다.

    도진은 피식 웃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좋은 의견이야. 계곡이라니."

    여름 방학.

    그래서 더 바쁜 이들이 많았지만 2박 3일, 아니 하다못해 1박 2일 정도는 시간을 낼 수 있을 거다.

    도진은 리지에게 과일 소주를 한 잔 따라주고선 말했다.

    "오케이. 그러면 내가 한 번 집행부 애들한테 연락해 볼게."

    * * * *

    사람을 모아 가자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모을 순 없다.

    함께 가서 웃고 즐길 수 있을 만한 멤버로 구성해야 했고 집행부의 멤버들이 딱이었다.

    -야, 넌 진짜 팔자 좋네. 우리는 바빠 죽을 거 같은데.

    -그러니까 우리 대신 잘 놀다 와라.

    오대용과 주정아는 함께 할 수 없었다.

    오성 하이테크로 발령이 난 뒤 아직 자리잡기에 한창인 오대용과 그런 오대용을 지지하는 주정아는 아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오대용이 그저 한 명의 사원이 아닌 오성의 중심에 선 직계 중 한 명이었기에.

    아직 주말에도 시간을 낼 정도의 여유가 두 사람에겐 없었다.

    -나는 진성 집돌이라. 멀리서 응원할게.

    나지윤도 그렇게 말하며 빠졌다.

    유지은은 해외에서 장기 업무를 수행 중이었기에 애초에 전화도 하지 않았다.

    "갈래!"

    "저도 갈게요, 오빠."

    소담과 윤상미는 대번에 수락했다.

    소담은 아예 손을 번쩍 들며 '저요, 저요!'하는 기색이었다.

    여기에 클로에와 성민혁, 성지인이 합류했는데 도진의 의견이 제법 작용했다.

    "너희들도 계곡 한 번 가서 힐링해야지."

    이야기를 꺼낸 약리지의 소꿉친구인 남사현은 함께 하지 못했는데.

    "아, 걔 해외 봉사 갔어요. 다른 애들이랑."

    이유는 이야기가 나왔던 자리에서 이미 들었던 거다.

    대신 벽태웅이 함께 가기로 했고 여기에 우서진도 합류.

    우서진은 제법 바쁜 시기였지만.

    "할아버지가 추억 만들고 오라고 하셨어요."

    우벽진이 그렇게 말하며 등을 떠밀어 주었던 덕분에 합류가 가능해졌다.

    '추억…….'

    도진은 우벽진이 말한 추억이란 단어에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그랬다.

    전생에서 도진과 동생들에겐 가족이 함께 놀러갔던 기억이 희미하기만 했다.

    도진이 어릴 때. 그러니까 동생들은 거의 아기 때 놀이동산에 딱 한 번 놀러갔던 게 처음이자 유일한 기억이었다.

    김서우가 사업으로 바빴기에 어딜 갈 만한 여유가 잘 없었다.

    서정원은 그걸 이해하는 사람이었기에 남편의 휴식을 존중해 주었다.

    다만 그렇기에 가족 나들이를 갈 기회를 잡는 건 어려운 일이었고 어느 정도 사업이 안정됐을 때 어렵사리 함께 놀이동산에 갈 시간이 생겼던 것이다.

    도진에겐 그때의 기억이 어렴풋했다.

    사실 어떻게 놀았는지, 좋았던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감정조차 거의 남지 않은 기억임에도 간간이 떠올리며 '좋았던 것'이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 추억이란 그런 것이다.

    아마도 우벽진은 도진보다 훨씬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우서진의 등을 떠밀었던 거다.

    안토니오 역시 비슷한 의도로 클로에의 스케줄을 조정해 주었을 거고.

    거기까지 생각한 도진이 주말,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응, 도진아."

    "우리, 가족 여행 가지 않을래요?"

    "응? 가족 여행?"

    "네."

    서정원이 예상 외의 말에 되물었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

    도진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가면 좋겠다 싶어서요. 말부터 꺼내본 거예요."

    그 말에 서정원은 대번에 아들의 의도와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김서우 역시도.

    "그래, 그렇네. 한 번 가면 좋겠네."

    서정원이 아들과 닮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고선 김서우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김서우는 아내, 그리고 장남을 위시한 아이들의 시선에 잠시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가 말했다.

    "내년 봄에, 한 번 가면 좋겠구나."

    "봄이요."

    "그래. 봄에."

    도진은 왜 봄인지를 바로 알았다.

    그때가, 김서우가 지고 있던 아주 커다란 '짐'이 사라지는 때였다.

    사업 실패로 인해 생긴 빚.

    스스로가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그 빚을 다 갚게 되는 날이 내년 봄 즈음인 거다.

    서정원이 미소가 진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아빠가 그렇잖니. 하던 걸 안 끝내면 안 되는 성격이잖아."

    "네, 그렇네요. 기왕 이렇게 된 거, 봄 돼서 제대로 놀고 올 계획을 미리부터 짜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응! 그럴 거 같아!"

    활달한 목소리로 유진이가 동의했고 반대로 조용한 성격이 된 호진이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네, 라고 했다.

    다만 담담함 속에 감춘다고 감춘 기쁨이 고스란히 드러나 도진이 싱긋 웃게 만들었다.

    "너희들, 가고 싶거나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메모해 둬. 참고할 거니까. 알겠지?"

    "응!"

    "응."

    그렇게, 봄에 함께 가족 나들이를 갈 계획이 하나 생겼다.

    * * * *

    가족이 함께 공유할 추억을 만들기 위한 계획은 조금 뒤였고 지금 당장은 도진을 포함하여 아홉 명이 함께 갈 추억을 만들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일단 장소는 확정되었다.

    "장소는 우리집 뒤에 있어요."

    "너희집 뒤에?"

    "네! 엄청 좋은 계곡이 있거든요."

    '우리집 뒤'라는 발언을 한 건 약리지다.

    그러니까 장소는 '약리지의 집 뒷산에 있는 계곡'이다.

    그런데 이게 말이 뒷산에 있는 계곡이지 그 뒷산이 결코 흔히 떠올리는 뒷산이 아니었으니 의선약가의 본가가 있는 첨단 의료 단지를 둘러싸고 있는 엄청난 규모의 산이기 때문이다.

    의선약가의 첨단 의료 단지는 양방만이 아닌 한방 또한 중요하게 다루고 여기에 필요한 약초 등을 어느 정도는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그 커다란 산의 절반 이상을 사유지로 두고 있었다.

    이 사유지 안에 경치 좋고 놀기 좋은 계곡이 하나 있다는 거다.

    멤버의 특성상 관광객이 몰리는 곳에 가는 건 여러가지로 무리가 있었으니 정말로 딱이었다.

    그렇게 장소가 정해지고 함께 모여 일정 등의 계획을 짰다.

    "오케이. 그러면 주말에 1박 2일로 노는 걸로 하자."

    논의 끝에 주말의 1박 2일로 일정이 정해졌다.

    아무래도 3일 동안 시간을 빼 맞추는 건 힘들었고 '아싸들의 모임'이다 보니 3일 간 논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도 작용했다.

    그리고 대망의 쇼핑이다.

    계곡에서 1박 2일을 보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쇼핑에 나섰다.

    가장 먼저 모두 함께 계곡에서 입을 옷을 사러 갔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런 곳에 가서 입을 만한 옷이 없었기에 기왕 이렇게 된 것 다 같이 쇼핑을 즐기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정해진 것이다.

    "수영복을 사야 할까요?"

    "계곡에서?"

    "아, 그건 좀 아닌가?"

    "그렇지."

    그런 대화가 오고가며 다들 편하고 가벼운 옷을 샀다.

    다만 클로에만큼은 수영복 매장에서 수영복을 구입했는데, 현실적이고 조금은 진지한 이유로.

    "래쉬가드를 샀구나."

    "네."

    전신을 감싸는 래쉬가드를 구매했다.

    꾸준히 연마한 불사마공의 성취로 피부가 갈라져 피가 울컥이는 일은 이제 없어졌지만, 그래도 아직은 그것을 다 극복하지 못했기에.

    다른 이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맨살이 드러나지 않는 래쉬가드를 구매한 것이다.

    "클로에니까 그것도 예쁘겠네."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날은 그렇게 옷을 사는 데 시간을 다 썼다.

    어떻게 보면 겨우 옷을 사러 간 거였는데 그 옷을 사기 위해 돌아다닌 시간이 제법 특별하고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은 휴가라 시간이 남는 약리지, 본가에 다녀온 뒤라 역시 시간이 남는 클로에와 함께 목록에 있는 것들을 쇼핑하러 다녔다.

    "일단 일회용 칫솔들, 젓가락, 숟가락, 티슈……."

    혹시 없어서 불편할지 모를 것들을 적다 보니 목록이 제법 길다.

    가능하면 캠핑카를 빌려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거 같긴 한데 그 계곡은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무리……

    "생각해 보면, 우리가 캠핑카를 들고 계곡 가는 것도 가능은 하겠네."

    "……네?"

    "아니야. 그냥 생각."

    그런 웃긴 생각들을 하면서 장을 보는데 생각보다 더 약리지가 서툰 모습이었다.

    유통 기한 체크는 클로에처럼 '공주님'이니 안 할 수도 있지만 여행가서 쓸 정도만 사면 되는 후추를 대용량으로 가져온다거나 말이다.

    "우리 리지, 이런 데 많이 약하구나?"

    "아싸 찐따라고 하지 마세요!"

    "어, 그런 말은 안 했는데."

    "어쨌든 그런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거라구요!"

    "선배는 어려운 말 잘 모르니 쉬운 말로 해 줘."

    "아잇!"

    토닥토닥거리면서 장을 다 보니 제법 어두워졌다.

    함께 저녁을 먹고 헤어졌는데, 헤어지는 때에 약리지가 씨익 웃으며 도진의 귓가에다 말했다.

    "선배. 사실 저…… 수영복도 가져갈 거예요?"

    딴에는 치명적인 필살기를 썼다는 생각에 만족한 약리지였으나.

    "봉봉아. 계곡에서 수영복을 입는 건 에티켓에 어긋나는 거야. 비행기 탈 때 신발 벗고 타야 되는 것처럼. 알지?"

    "아잇! 누굴 아싸 찐따로 알아욧?!"

    안타깝게도 도진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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