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던 방송국과의 협업을 뒤엎은 뒤 정글 게임은 여규열을 포함하여 바른 엔터의 차원에서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했는데 거기에는 넷비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넷비전은 한국 진출 1년 동안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으며 소위 말하는 '헬적화' 되어 있던 한국의 OTT 시장을 과거 스마트폰 시대를 열었던 때를 연상케 할 정도로 휩쓸었으니까.
아직은 저평가 당하는 부분이 있고 낯설다는 이미지 또한 다 떨쳐내지 못했다.
그러나 미래를 알고 있는 도진의 입장에서 넷비전은 오히려 방송국보다 더욱 매력적이었으며 언제고 입성해야만 할 곳이라 생각했다.
일면식도 없던 크리스토프 뒤몽을 단번에 알아본 것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관련 정보를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편성을 포함하여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대안 중 하나였으니 판을 엎자마자 바로 여규열이 준비하여 연락을 넣었었다.
"거절을…… 당하셨다구요."
"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온 실무자의 거절 답신에 깔끔히 포기하고 다른 대안을 찾아 움직였던 것이다.
크리스토프는 도진의 말에 조금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우리는 아시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사를 세웠습니다. 관련하여 우리는 주목받는 콘텐츠가 있다면 설령 거절을 하더라도 해당 기록을 남기도록 되어 있지요."
이쪽에서 거절을 하든 저쪽에서 거절을 하든, 그에 관한 기록을 보관하도록 크리스토프가 직접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그게 되어 있지 않았다고, 크리스토프는 말했다.
그것은 곧.
"누군가가 큰 잘못을 했다는 거네요."
"예, 그 말대로입니다."
정글 게임은 그 체급도 체급이지만 이쪽 업계에서 특히 중요한, 한국에서의 관심과 이슈성이 체급보다도 컸다.
하물며 방송국과의 협업도 결렬된 상황이었으니 넷비전 입장에서는 좋은 조건을 제시하여 무조건 데려와야 할 대상이었는데.
오히려 바른 엔터에서 먼저 제안을 했음에도 그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다니 무언가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이거, 오히려 제가 또 도진에게 도움을 받게 되었군요."
이것은 결코 단순히 '실수'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혹은 여럿이 의도적으로 크리스토프와 회사가 원하는 방향과는 다른 쪽으로 업무를 주무르고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걸 전혀 생각지 못했던 장소에서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문제가 되는 부분을 처리하고 이 계약에 관해선 정식으로 다시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나에게 실수를 만회할 기회와 시간을 허락해 주겠습니까, 도진."
크리스토프의 부탁에 도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크리스토프."
* * * *
-'정글 게임',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OTT 기업 '넷비전'과 손잡았다!
-바른 엔터와 넷비전. 어떻게 만났나?
며칠 뒤 커뮤니티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퍼졌다.
김도진의 동생 김호진과 래미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바른 엔터와 넷비전의 정글 게임에 관한 계약까지가 뉴스로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국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프랑스를 들썩이게 만든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었으니 이슈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방송국이랑 협업 불발됐을 때만 해도 나가리 아닌가 싶었는데 ㅋㅋㅋ
-넷비전이 아직 한국에서는 저평가 받는 경향이 있는데, 다른 데서는 TV 그냥 쌉바르는 공룡 그 자체임 ㄷㄷㄷ
-와, 그럼 이제 바른 엔터 세계 무대에서 노는 거임?ㄷㄷㄷ
-아니 ㅋㅋ 그건 너무 설레발이고 ㅋㅋㅋ
부정적인 이야기, 이를테면 단순하게 흥행하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아들의 일로 도움을 받은 CEO의 독단으로 계약한 건 아니냐, 넷비전에서 몇 명 잘린 일과 관련한 음모론 등도 있었지만 큰 지지는 얻지 못했고 긍정적인 여론이 강했으니 바른 엔터 내의 분위기도 좋았다.
"언니, 들었어요? 정글 게임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 대상으로 서비스하기로 했대요."
"진짜?"
"네! 그래서 아예 헐리우드 쪽 연예인을 섭외할지도 모른대요!"
"와! 그럼 우리도 이제 한류스타 가는 거야?"
눈을 반짝이며 묻는 건 설현주다.
그 강아지 같은 시선에 도진이 웃으며 답했다.
"막 화산도 터지고 돌덩이 피하는 그런 장면 넣으면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건 CG로 하면 되니까 된다는 거지?!"
"어허. 요즘 대세가 리얼인 거 몰라요? 하여간 요즘 애들은 근성이 없어요, 에잉!"
"…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와."
뭐 그런 느낌으로 불안은 사라지고 기대감이 감돈다.
도진은 그 기대감이 설레발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흥행은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데, 적어도 기(技)의 부분에서는 만점을 먹고 들어갈 생각으로 만들 거니까.
운에서도 넷비전과의 계약으로 어느 정도는 점수를 땄으니 그 기대가 완전히 배신당하는 일은 없을 거라 보았다.
그렇게 정글 게임의 문제가 착착 해결되는 동안 래미는 잠룡문에서 호진이와 함께 땀을 흘렸다.
어떻게 보면 속가 제자 1호였는데 바로 그 1호가 세계적인 기업인 넷비전의 아들이라는 게 재미있는 인연이었다.
-네 동생이 좋은 변화를 만들어 냈구나.
-예.
도진이 스승 위지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위지혁과 장호는 도진이 전생에서 보았던, 어떻게 흘러들어 보았던 꺼라위키의 크리스토프 뒤몽에 대한 문서의 내용을 말해 주었다.
그 문서에서 크리스토프는 누구보다 학교 폭력에 관해 적대적이었으며 근절과 처벌에 관한 강한 주장과 투자를 했던 인물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그런 행동의 이유가 약물 중독 등의 이유로 폐인이 된 아들 때문이란 기록도 있었고 말이다.
뒤몽 부자는 전생과 달리 그런 아픔을 겪지 않게 됐다.
하지만 크리스토프는 이번 일로 학교 폭력 근절에 관한 투자를 결심했으니 그야말로 해피 엔딩이다.
그리고…… 무형독.
도진은 갑작스런 방송국 고위 간부의 훼방에서 무형독의 '심술'을 느꼈었다.
명확한 근거가 없는 느낌이었지만 때로 느낌은 명확한 증거 이상으로 본질을 꿰뚫는 법이고 나지윤 또한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 넷비전에서 수작을 부렸던 이들까지 나옴으로써 느낌은 확신이 되었다.
"역시나 이렇다 할 증거는 없었어."
나지윤은 만난 자리에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의심가는 부분은 있었지. 부정기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사상 집회에 나간다거나."
"…사상 집회?"
"응. 뭐 이렇다 할 간판도 내걸지 않았고 주장도 하지 않는데 꾸준히 모여서 토론회 같은 걸 하나 봐."
"이상하네."
"그렇지.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모두 주위의 좋은 이웃이라는 거야. 남을 헐뜯지 않고 오히려 솔선수범해서 착한 일을 하는."
수상하다.
본래 사기꾼이란 '나 사기꾼이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의 믿음을 주는 외모와 언행을 보여주니 그것이 바로 사기꾼의 자질인 거다.
나지윤은 생각을 정리하며 말했다.
"이번 일을 조사하면서 든 생각인데, 무형독은 어쩌면 단순한 집단이 아니라 종교 단체일지도 모르겠다는 거야."
"…종교 단체?"
"응. 그저 단순한 집단이라고 하기엔 그 덩치가 너무 커. 그러면서도 구성원들이 주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거지. 그게 몇 년도 아니고 십 년도 아니고 훨씬 긴 시간 유지되고 있어."
…일리가 있다.
아니, 단순히 있는 정도가 아니라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다.
도진이 특히 거기에 공감하는 건, 무형독과 같이 언급하는 것부터가 기분 나쁜 일이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천마신교가 바로 그런 종교에 기반을 둔 집단이며 그 천마신교의 교주가 되어야 하는 게 도진이기 때문이다.
"네 말대로 훼방을 당한 무형독의 심술이 드러난 게 방송국과 넷비전이었는데 무인도 아니면서, 절대로 외부에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러면서도 충성할 수 있으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거지."
돈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단계에서의 무언가가 있어야만 했다.
"거길 한 번 파고들 수 있겠네."
"맞아. 정식으로 한 번 조사 방향에 관해 이야기를 해 보려 해."
'종교 단체'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강력하게 영혼에 파고드는 사상 정도는 있어야만 이야기가 성립된다고 나지윤은 보았고 적중한다면 꼭꼭 숨어 몸통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 무형독에 가까이 다가갈 결정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도진은 나지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스승들에게 말했다.
-설마, 혈교(血敎) 놈들은 아니겠죠?
종교 단체하니 문득 떠오르는 이름을 꺼내는 도진이다.
-글쎄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구나. 혈교 놈들이 술법에 상당히 뛰어났으니…….
-놈들은 교주가 그런 꼴을 당하고도 결국 다시 세를 회복한 끈질긴 놈들이었으니 배제할 순 없을 거다.
스승들이 마냥 부정적이지 않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 영역이었으니 사실은 희박하다고 봐도 좋았다.
도진은 허허, 웃었다.
천마신교에 혈교라니.
생각만으로도 현대가 무림에 잠식당하는 중인 것만 같다.
* * * *
일을 하나 처리하고 나니 어느새 방학도 절반이 훌쩍 지나 있었다.
호진이는 제법 밝아진 래미와 함께 특강을 여전히 듣고 있었고 프랑스에서는 크게 난리가 난 사건의 주인공인 비카르 가문의 사업체들 주가가 우하향 중이다.
물론 잘못을 한 아이들에 대한 처벌 또한 가볍지 않았고 학교 폭력과 관련한 이슈로 교육계마저 들썩이는 중이라고 본가에 다녀온 클로에가 이야기해 주었다.
래미의 아버지로서 크리스토프의 분노가 그만큼 무섭게 작용하고 있다는 거다.
정글 게임은 이제 가시화된 것들을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촬영 준비에 들어갔고 이에 대한 일은 역시나 전문가들에게 일임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제 도진은 지켜보기만 하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날.
도진은 연락이 온 후배와 오랜만에 만남을 가지게 됐다.
"잘 지냈어?"
"아뇨. 엄청 힘들었어요."
새하얀 얼굴에 새하얀 옷이 눈의 요정을 연상케하는 그녀는 다름 아닌 2학년 약리지였다.
의선약가의 금지옥엽이자 약봉(藥鳳) 약리지.
어느새 새내기에서 헌내기가 된 지도 반 년인 그녀는 요 근래 교육이다 실습이다 상당히 바쁘게 지냈다.
2학년 여름 방학은 사회에 나가기 전 집중적으로 무언가를 준비하기에 적격인 시기다 보니 특히나 의가(醫家)의 구성원이 될 약리지로서는 바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바쁜 방학을 보내던 약리지가 도진을 찾아온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선배."
"응?"
"우리, 사람 모아서 계곡 가요!"
"…갑자기?"
"네. 갑자기요. 가고 싶어졌어요."
"어, 음. 그렇구나……."
초롱초롱한 눈에 정말로 가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하다.
앞서 2주 정도 휴가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시간을 이용하여 힐링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다만.
"친구들이랑 가는 게 낫지 않겠어? 사현이는?"
기왕 간다면 소꿉친구인 남사현을 포함하여 친구들과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도진이었다.
그런 도진의 물음에 약리지가 술 한 잔을 꼴깍 원샷해 버리고선 말했다.
"같이 갈 친구 없어요!"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