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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470화 (470/741)

469화

'아…….'

신일강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눈앞에 떨어진 거대한 문제에 안 그래도 아슬아슬한 머리카락이 빠지지 않도록 붙잡기 위해서.

그는 학원가에서 제법 성공한 강사로 문화재단의 이사장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사장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번에 공을 들여 추진한 사업이 바로 '여름 방학 글로벌 심화 특강'이다.

무공(武功)이란 게 세상의 주류 중 하나가 되면서 서양에서 동양으로 공부를 하러 오는 게 흔한 일이 되었다.

그 시류에 편승하여 상류층 자제들이 비싼 수업료를 내면서 들으러 오는 특강 브랜드를 하나 만들자는 생각으로 추진한 것이다.

가진 인맥과 자금, 로비까지 포함하여 만족할 만한 강사진을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서양의 사람들이 동양에서 배우길 원하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동양의 사상'을 체감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로.

그렇게 강사진을 구성하니 나머지는 순조로웠다.

서양의 명문가를 끌어들일 수 있었고 소문이 나니 한국의 상류층도 문의가 밀려들었다.

신일강은 대번에 평가가 올랐고 또 한 번 인생의 정점을 갱신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

당당히 서 있는 소년, 아니 아이가 있다.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는 소위 말하는 '교무실'의 역할을 하는 곳에 와 있음에도 한 점의 잘못이 없다는 얼굴로, 그것도 억지로가 아닌 당당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이다.

옷은 그야말로 먼지투성이에 엉망이 되어 있고 코피까지 나 휴지로 막아둔 모습임에도 당당한 것이 인상적이다.

…문제는 이 아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김도진'의 막냇동생 김호진이라는 거다.

더 무시무시한 건, 아예 생각하기도 싫고 보기도 싫어 눈을 질끔 감게 만드는 광경이 아이의 뒤에 펼쳐져 있다는 거다.

"훌쩍."

콧물을 삼키는 아이, 눈물을 훔치는 아이,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아이까지.

김호진에게 성대하게 두들겨 맞은 서양의 아이들이 맞은편에 모여 있다.

양측이 싸운 건데 혼자인 쪽은 비교적 멀쩡하고 오히려 여럿이 그야말로 '줘터진' 몰골로 훌쩍이고 있는 거다.

'…잠룡이 막냇동생을 제대로 가르쳤다는 거겠지.'

도피하고 싶은 맘이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지만, 현실은 그가 도피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쿵!

문이 거칠게 열리고 안에 들어서는 건 딱딱한 인상의 청년이다.

고등부의 그 청년은 신일강이 특히나 공을 들였던, 서양의 고객들 중에서도 VIP라 할 수 있는 비카르 가문의 장남이었다.

비카르 가문은 프랑스의 귀족가이면서 동시에 군벌 세력에도 포함되어 있는 무가(武家)였다.

그런 무가의 장남이었기에 청년, 프레데릭 비카르는 고등학생임에도 상대를 존재만으로 위압하는 덩치와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그 기세가 가장 먼저 신일강에게로 향했다.

"동생이 싸움에 휘말렸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 예. 사소한 문제가 조금 발생했습니다."

신일강은 일단 떠오르는 대로, 문제를 축소할 생각으로 그렇게 운을 뗐지만 프레데릭은 거기에 전혀 응해주지 않았다.

"사소한 문제요? 저 모습을 보면 결코 사소해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리고 기세는 당당하게 선 호진이에게로 옮겨갔다.

"싸움이 발생했고 저 아이가 먼저 덤볐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들은 게 맞나?"

"네, 네!"

"맞습니다, 형님."

시선이 향하자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이고 무리의 리더 역할을 했던 아이이자 프레데릭의 동생, 가브리엘 비카르도 긍정했다.

그 반응에 호진이에게 가해지는 프레데릭의 기세가 더욱 강해진다.

"무공 실력이 또래보다 조금 뛰어나다고 해서, 비카르가에 폭력을 행사한 겁니다. 이게 사소한 문제입니까?"

질문의 대상은 신일강이지만 기세와 힐난은 오롯이 호진이에게 가해진다.

웬만한 아이라면 입조차 떼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 정도의 기세였다.

하지만 호진이는 그 기세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동생도 그랬는데 형은 오히려 더 나쁜 사람이었네요."

"…뭐라고?"

전혀 겁먹지 않고 오히려 비난하는 호진이의 태도에 프레데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형이라고 하면 동생이 어떤 아이일지, 어떤 나쁜 일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 않을 텐데. 또래 친구를 괴롭히는 동생을 방치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이제 그 흉을 덮으려고 하다니. 부끄러운 줄 아세요."

"감히!"

후오오-!!

버럭 터져 나온 고함 소리에 내공의 여파가 뒤따른다.

'아, 안 돼!'

서류가 비산하고 끼어들지 못한 채 천변만화하던 신일강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죽어간다.

그런 신일강의 바람과 반대의 방향으로 상황은 치달아 호진이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며 프레데릭이 말했다.

"우리 비카르 가문을 모욕하겠다는 건가?"

"모욕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동생이 스스로 하고 있는 거예요."

호진이는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결코 이길 수 없는 난폭한 기세가 짓누르지만, 그것은 호진이를 굴복시키기엔 턱없이 모자란 것이었다.

호진이가 곁에서 항상 보아왔던 형에 비하면.

프레데릭의 기세는 그 어떤 당당함도 거대함도 갖추지 못한 소인배의 것이었으니까.

"가문의 명예를 위한다면 약자를 괴롭혀서는 안 되고 그러했다면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하는 거예요. 당신처럼 잘못을 외면하고 오히려 덮기 위해 뻔뻔하게 소리치는 게 스스로 명예에 먹칠을 하는 거라는 걸, 교육을 받았다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물론이에요. 나는 책임지지 못할 말은 하지 않아요."

"어린아이라 해서 모욕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네가 책임지지 못한다면 보호자에게라도 끝까지 책임을 물을 것이다."

처음엔 그저 호진이의 잘못으로 몰아가기 위한 '쑈'였다면 이제는 순수한 분노로 그가 말한다.

어린아이가 감당할 수 없는 기세와 말로 협박한다.

그러나 그건 결코 호진이를 협박할 수 없었다.

두웅-!

"헉!"

호진이를 위협하기 위해 날뛰던 기세가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그저 사라진 게 아니라 너무나 무시무시하고 흉포한, 동시에 그 이상으로 거대한 기운에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짓이겨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형!"

"그래, 호진아. 어떤 명예도 없는 새끼가 우리 막냉이를 때리려고 했을까?"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는 김도진이 있었다.

말은 가벼운 형이지만 그 기세는 완전히 다르다.

비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이기에 숨쉬는 것조차 잊을 만큼의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다.

내공의 기세로 하는 압박이 아닌 오롯이 존재감만으로 그런 감정을 느끼게 만들었기에 경이롭다.

그리고 그 기세의 근원을 담은 시선이 프레데릭을 마주했다.

"그래, 나한테 책임을 묻고 싶다고?"

"……."

"내가 얘 형이거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봐."

프레데릭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나름 재능이 없는 놈이란 소릴 들으면서도 악착같이 무공을 익히고 상대를 물어뜯으며 위로 올라갔던 '미친개' 프레데릭이었으나, 그 악착이 아무런 생각조차 못하도록 머리를 가득 채우는 본능의 경고를 이겨낼 정도는 아니었기에.

"내가 아는 애가 말해 주더라고. 영국이랑 프랑스에는 '결투'라는 게 있다고. 서로가 정답일 때 결론을 내기 위해서 결투라는 걸 한다고. 지금은 분명히 우리 막내가 정답이겠지만 내가 크게 양보해 줄게. 결투 한 번 할까?"

"……."

도진이 다시 물었고 프레데릭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무공이 주류가 되고 무공이 발전할 수 있도록 거시적 관점에서 탄생하고 유지되어 온 것 중 하나가 '결투'였다.

프레데릭은 그것을 어머니가 집착하던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즐겨 사용해 왔지만 이번엔 그것이 결코 정답이 되지 못한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으니 대답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비참하고 또 참담한 심정으로 그저 침묵하고 이 자리의 주도권을 김도진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고.

"그건 그리 현명하지 않은 방법인 것 같군."

막다른 곳에 몰린 순간 마치 구원처럼 그의 부모님이 나타났다.

도진의 시선이 새로 나타난, 프레데릭과 가브리엘의 부모에게로 향했다.

아버지 쪽은 척 봐도 군인이라는 티가 난다.

강직하고, 타협이 없는 인상.

그에 비해 어머니 쪽은 스스로의 약함을 애써 감추려는 듯 가시가 비죽비죽하다.

그리고 프레데릭과 가브리엘의 구세주를 본 듯한 시선은 어머니 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도진이 둘을 마주했다.

"그리 현명하지 않은 방법이라구요?"

"당연히 현명하지 않지! 힘으로 겁박하는 게 뭐가 현명한 방법이야!"

"…여보."

"당신은 뭐가 그렇게 침착해요! 애가 저렇게 맞았는데!!"

아버지 쪽은 침착하게 이야길 진행하려는데 어머니 쪽에서 성질을 못 이겨 목소리를 높인다.

그야말로 하는 꼴이 치와와다.

"…목소리, 높이지 맙시다."

"……."

듣다 못해 아버지 쪽이 묵직하게 말하니 그제서야 좀 조용해졌다.

물론 불만은 반비례하여 드글드글 끓는 얼굴이다.

"계속 하시죠."

도진은 조용히 지켜보다 다시 말했고 프레데릭과 가브리엘의 아버지가 끊겼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느 쪽이 문제를 제공했는지, 그리고 누가 먼저 폭력을 썼는지에 대한 명확한 규명이 아직 되지 않았지. 거기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게 옳지 않을까 하는데."

"타당한 이야기네요. 그런데, 그거 이미 답 나온 거 아닌가요?"

"아니야. 모두가 납득할 만한 명확한 조사가 아직 되지 않았지."

문제와 잘못을 덮거나 회피하려는 성격과 태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말 그대로 모든 걸 명확히 한 뒤 이야기하자는 것이었다.

때문에 도진도 이 부분에는 동의한 때였다.

"증거라면 여기 있어요."

도진의 곁에 있던 호진이가 나서서 휴대폰을 꺼냈다.

도진이 기특함이 담긴, 다 아는 얼굴로 물었다.

"호진아, 그건?"

"쟤들이 래미를 괴롭혔던 모습들이랑 인종 차별을 했던 것까지 다 촬영해 놨어요."

"헉!"

"……!!"

가브리엘 패거리들이 눈을 부릅뜨고 화들짝 놀랐다.

그래봐야 아직 열두 살. 이런 식으로 꼼꼼하게 촬영을 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뭐야, 저 동양인 놈.

-어디 우리가 노는 곳에 더러운 동양인 놈이 끼어드는 거야. 안 그래, 래미?

래미를 끌고간 곳에서 발언하는 모습들이 아주 깔끔하게 재생된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너무나 명확한 증거였다.

"……그렇군. 우리 아이가 잘못을 했군."

"여보!!"

"조용히 하시오! 인정할 건 인정을 해야 하는 거야. 내가 아비로서 사과하겠네."

어머니가 오냐오냐하면서 애를 잘못 키워서 이 사단이 난 거다.

하지만 잘못은 그녀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 쪽 또한 큰 책임이 있었으니 도진은 말했다.

"그걸로 끝인가요?"

"아이에게도 분명히 사과를 시키겠네."

"그리고요?"

"…무엇을 원하는가."

도진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웃기시네요. 아이가 잘못될 동안, 아내가 아이를 잘못 키울 동안."

"뭐야!"

쿠웅-!

다시 목소리를 높이는 그녀에게 도진의 시선이 향한다.

어마어마한 공포가 그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도진의 시선은 그 옆으로 향한다.

"그걸 그저 방치하고, 외면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면서 뭐가 그리 당당한 거죠?"

"……."

그래. 그는 공정하고 당당한 얼굴이었지만 사실은 그럴 만한 자격이 없었다.

밖에서야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로서는 죄인이었단 말이다.

집과 아이에 관해서는 무관심했다는 게 처음 두 형제의 시선이 어머니 쪽에만 집중되었던 데서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여기에.

"사과는 당연한 거지 그걸로 속죄했다 생각하려는 오만한 태도가 가관이네요. 당신들은, 그리고 아이들은 벌을 받아야 하는 겁니다. 그만큼의 죄를 지었다는 거죠."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철저한 재발 방지와 합당한 벌을 스스로 내린다 해도 모자랄 상황에 말이다.

그는 스스로를 당당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 기저에 오만함과 선민의식이 깔려 있었다는 거다.

그런 도진의 발언에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서며 동의했다.

"맞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무거운 처벌을 받기를 바랍니다."

새로 나타난 중년 남성은 급히 뛰어온 듯 옷과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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