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화
아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생각하면 안 된다.
오히려 아이이기에, 선입견과 고집이 없기에 본질을 꿰뚫는 눈은 어른보다 나은 부분이 있다.
그리고 김호진은 천재였기에.
천재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남들보다 빠른 사람'이니 더욱 일찍 철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김호진이 전생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어떻게 느끼고 생각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김호진이 티를 내거나 말하고 다니지 않았으니까.
다만 분명히, 그것을 결코 드러내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굳은살이 마음을 가득 덮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진이 다시 기회를 잡아 다르게 만들어낸 삶에서의, 지금의 김호진은 딱지가 내리기도 전에 몇 번이고 헤집어져서야 만들어지는 굳은살로 마음을 감추지 않을 수 있었으니 순수하게 기뻐하는 얼굴로 릴리, 윌리엄과 함께 여름 방학 특강이 이루어지는 특설 강의동이 있는 한국대 안에 들어섰다.
"대학교는 정말 크네."
"그러게. 그냥 도시 같아."
호진이와 윌리엄이 그런 말을 주고받았다.
릴리 또한 내심 감탄했으니 그녀의 신분상 화려하고 장엄한 것들을 적지 않게 보아왔지만 그런 것들과 '대학교'는 또 느낌이 달랐기 때문이다.
"미아 되면 안 되니까 누나 잘 따라와."
"응, 누나."
"응."
하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어엿한 중학생이 된 누나로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릴리는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동생들을 이끌었다.
특설 강의동은 한국대의 랜드마크라 불리는 '꽃시계탑'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으며 특강을 위해 방문한 학생들을 위한 식당이나 휴게실 등 편의 시설까지 포함하여 새로 지은 건물이었기에 눈에 들어온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오늘은 낮부터니까…… 뭐 좀 먹을까?"
"응! 그러자."
"네."
동생들 잘 먹이라고 아빠에게 따로 용돈을 받은 것도 있었기에 릴리는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고…….
'음…….'
메뉴 앞에서 고민했다.
막상 혼자서 주문하려니 메뉴가 너무 많아 고민이 되었던 거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그래서 고개를 돌리고 동생들에게 물으니 바로 의견이 나왔다.
"난 매운 건 싫어."
"불고기랑 맑은 소고기국 정식 같은 거면 괜찮지 않을까요?"
"응. 그럼 그렇게 먹자."
짧은 삶의 절반 가까이를 한국에서 보냈기에 한국 음식에 대한 거부감은 없어 의견이 정해지자 주문 자체는 스무스하게 마칠 수 있었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셋과 달리 헤매는 '아이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이번 특강은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이렇게 셋으로 나뉘는데 보호자가 함께 오지 않은 아이들이 제법 많았다.
초등부와 중등부가 있는 만큼, 그리고 그런 어린 아이들을 보내는 게 일에 좀 더 집중해야 할 보호자들이 많았던 만큼 주최측이 그 부분까지 케어할 수 있는 인력을 세심하게 배치했다는 광고를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어린 아이들은 잠시 헤매다 그렇게 배치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주문을 했다.
'흐음.'
그리고 그 안에서, 호진이는 배치된 도우미에게 도움조차 구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또래 아이를 발견했다.
금발에 벽안을 가진 서양의 남자애다.
다만 그 외모가 빛이 바랠 정도로 숫기가 없는 얼굴이었는데 단순히 숫기가 없는 게 아니라 어둡고 위축되어 있는 분위기를 가득 두르고 있어 더욱 시선이 갔다.
"잠시만요, 누나."
"어, 왜?"
"쟤 좀 도와주게요."
잠시 지켜보던 호진이 마음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그리고 유창한 영어로 물었다.
"주문할 거야?"
"아! 응……."
말을 거니 흠칫 놀란다.
그러나 호진이가 웃는 얼굴로 마주보자 곧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경계를 풀지 않는 모습인 게 또 마음이 간다.
"여기 양식도 많은데, 마음에 드는 거 주문하면 돼."
"아니, 싼 게 뭐가 있나 싶어서……."
"싼 거?"
"응. 제일 싼 거……."
호진은 티가 나지 않게 아이를 살폈다.
릴리와 윌리엄을 자주 보았기에, 그리고 잠시 살았던 곳이 문월동이었기에 호진이는 소위 말하는 명품이란 걸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하물며 릴리와 윌리엄의 아버지인 웨일스 후작은 맞춤 양복 사업도 하고 있었으니 더더욱.
이름은 몰라도 그게 얼마나 비싼 것인지 정도는 눈대중으로 파악이 가능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아이는 분명히 부잣집의 아이였다.
심지어 릴리나 윌리엄 못지 않은.
그런데 싼 거?
호진이의 좋은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몇 가지 가정이 금방 도출되었으나 호진이는 굳이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게 괜찮지 않을까?"
"응, 그렇네."
"괜찮으면 우리랑 같이 먹지 않을래?"
"아, 그……."
"같이 먹자!"
"그래……."
호진이는 이 소심한 친구를 자신의 테이블로 데려왔다.
"아 열두 살이면 나랑 윌리엄이랑 동갑이네!"
"그, 그렇구나."
"반가워!"
"응, 반가워……."
음식이 나오고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며 말문을 텄다.
남자 아이는 호진이와 동갑이었으며 자신의 이름을 래미라고 했다.
처음엔 초식 동물처럼 경계가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그것이 풀리고 웃는 모습도 보여주게 됐다.
"동갑이니까 너 우리랑 같은 수업 듣겠네."
"응."
"우리랑 같이 앉아서 듣자!"
"응, 그러자."
그렇게 좋은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하며 첫 수업을 듣기 전까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타다다닥!
이야기를 나누던 호진이는 누군가가 거칠게 뛰어오는 소리를 듣고 시선을 향했다.
얼굴에서부터 불량한 끼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덩치 큰 남자애가 호진이가 있는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퍼억!
"켁."
"반가워, 래미."
"아……."
마치 몸통박치기를 하듯 거칠게 래미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인사를 했다.
얼굴을 들이대며 인사하는 덩치 큰 남자애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래미는 몸을 잘게 떨었다.
겨우 흐려졌던 어두운 분위기가 다시 래미에게 짙게 내려앉았다.
"누구야?"
호진이가 물었다.
그러나 래미에게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고 대신 덩치 큰 남자애와 그 아이의 일행으로 보이는 여러 명의 아이들의 시선이 호진이를 훑었다.
서양의 아이들은 호진이를 더러운 것 보듯 보고선 시선을 옮겨 버렸다.
그리고 윌리엄을 지나 릴리를 보고선 멈칫했다.
겁을 먹은 게 아니라 예쁜 릴리의 모습에 시선이 멈춘 것이다.
"누구야, 너희들?"
릴리의 물음에 아이들의 중심으로 보이는 녀석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래미의 친구들입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아이는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옷도 명품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 또래를 압도하는 기세가 자존심과 함께 섞여 있었으니 무공에 소질이 있다는 것까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인데요, 이렇게 특강에서까지 친구를 만나서 기뻐서 실례를 했네요."
"…그래."
"누나는 중등부 특강을 들으러 오신 건가요?"
"맞아. 그리고 이제 들어갈 시간이지."
"아, 그렇군요."
릴리의 단호한 말대로 수업 시간이 가까워졌다.
"수업 들으러 가자, 래미."
호진이는 래미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
"래미가 너랑 들을 이유가 없잖아?"
래미는 침묵했고 래미를 둘러싼 아이들이 경멸의 눈으로 보며 대신 거절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래미를 데려갔다.
"역시."
래미가 떠나고 릴리, 그리고 윌리엄과 같이 걸으며 호진이는 그렇게 말했다.
윌리엄이 시선을 주니 호진이가 설명했다.
"따돌림당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든."
"그랬구나."
문월동에서도 따돌림당하는 아이를 보았었다.
주로 어릴 적에 숫기없이 혼자 동떨어져 있던 아이들이 타깃이 되었고 래미가 딱 그런 모습이었기에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더 나아가, 래미가 방학동안이라도 도망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그 시도마저 무산되었으니 곁에 앉았던 래미가 그토록 충격받은 얼굴을 했었던 건 아닐까.
"그럼 특강 끝나고 여기서 보자."
"네, 누나."
중등부 수업을 듣기 위해 릴리가 떠나고 호진이는 윌리엄과 함께 강의실에 들어섰다.
소수의 아이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초면이라 데면데면한 가운데 래미를 데려간 아이들의 무리가 모여 제 세상인 듯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고개를 숙이고 빠져 나올 수 없는 늪에 허덕이는 듯한 래미까지.
호진이는 그 광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 * *
특강은 재미있었다.
초등부의 수준을 상당히 넘어 있었던 특강이었지만 실력있는 교수가 그것을 잘 풀어내 설명해 주었고 호진이는 눈을 반짝이며 새로운 지식에 즐거워했다.
"재밌었어?"
"응, 형."
형은 그 대답에 아주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막내 하고 싶은 거 다 해!"
딸바보란 단어는 꽤 들어봤는데 동생바보란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호진이는 몰래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그런 형이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말 좋았다. 이제 나이를 제법 먹었으니(?) 티는 웬만하면 내지 않을 거지만.
뭐 그런 밤을 지나 호진이는 다음날도 들뜬 얼굴로 이른 아침 집을 나섰고 오전의 특강을 즐겁게 들었다.
다만 한 가지.
래미를 끌고 나타나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아이들은 오늘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패거리의 아이들이, 기어코 호진이가 입을 떼게 만들었다.
점심 시간.
식당의 규모는 특강을 신청한 학생들을 모두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로 컸지만 주문을 위해 줄을 서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키오스크를 쓰지 않고 직접 주문을 하려는 아이들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어제와 달리 오늘은 줄이 길어졌다.
호진이는 그 줄의 제법 앞쪽에 서 있었는데.
스윽.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제법 큰 키와 덩치의 아이 둘이 끼어든 것이다.
머쓱한 기색조차 없이. 말도 없이. 심지어 더러운 것을 보는 눈으로 호진이를 내려다 보고선 새치기를 한 것이다.
호진이는 바로 말했다.
"새치기하지 마."
두 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무어라 영어로 지껄이며 당당하게 그 자리를 지켰고.
턱-
"어디 더러운 새끼가 손을 대는 거야!"
호진이가 어깨에 손을 올리자 버럭 큰 소리로 외치며 몸을 돌렸다.
"뭐야?"
"왜 저래?"
웅성이며 시선이 집중되었다.
허나 호진이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놈을 노려보았다.
"새치기를 하고서 뻔뻔하게 소리를 치는 거야?"
"너, 진짜 주제 파악을 못하는 구나?"
"어디 감히 나한테 손을 대는 거야! 더러운 자식이!"
호진이의 얼굴이 아이답지 않게 차가운 온도로 가라앉았다.
"말을 조심하는 게 좋아. 그리고 부끄러운 짓을 해놓고서 그렇게 뻔뻔하게 굴면, 큰 벌을 받을 거야."
"큰 벌? 미개한 원숭이 따위가!"
아이 중 한 명이 주먹을 내질렀다.
호진이보다 큰, 타고난 덩치의 아이가 내지르는 주먹은 제법 매서웠다.
쉬운 말로 일진 양아치.
그런 노릇을 하며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닐 만큼의 실력은 있었다는 말이다.
예전의 호진이라면.
이 주먹을 맞상대하기는 커녕 불량한 아이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그 누구보다 든든한 형이 있었다.
그리고 그 형이 가르쳐준 무공을, 호진이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익혔다.
후우웅-!
보인다.
신기하게도, 찰나에 도달해야 할 주먹이 느릿느릿 기어오는 것만 같다.
그러니까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연호신공의 체술(體術)을 따라 그저 반걸음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이미 주먹의 궤적은 멀어져 있었다.
그리고 주먹을 내뻗은 아이의 전신이 눈에 들어왔다.
주먹을 내뻗는 데에만 집중하여 온몸이 텅텅 비었다.
호진이로서는 이해조차 못할 만큼 엉망인 자세.
그 비어 버린 온몸 중 하반신을 무너뜨렸다.
툭.
"억!"
꽈당탕!
그저 가볍게 건드린 것만으로 수수깡을 쌓아두었던 것처럼 그 아이는 주먹을 내뻗다 말고 성대하게 바닥에 엎어졌다.
"FUCK!"
화들짝 놀란 아이의 친구가 반사적으로 덤벼들어 주먹을 내질렀지만 이쪽 역시, 전신이 비어 있긴 마찬가지였다.
똑같은 꼴로 바닥에 엎어지게 해 주었다.
꽈당!
"악!"
바닥은 푹신한 매트가 깔린 대련장이 아닌 딱딱한 바닥이었기에 두 놈은 고통에 콜록였다.
그런 둘을 내려다 보며 호진이가 말했다.
"너희 싸움 못하잖아. 그런데 왜 덤비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