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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466화 (466/741)

465화

유진이도 그랬지만 호진이도 일찍 철이 들어 버렸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이었고 유진이와 호진이는 그걸 알 정도로 똑똑했으니까.

그리고 또 착해서.

동생들은 일찍 철이 들었고 떼를 쓰지 않았다.

그래서 유진이가 그랬듯 호진이도 티를 내지 않았지만.

도진은 호진이가 계속 공부를 하고 싶어했다는 걸 알았다.

어쩌면. 아니 분명히.

호진이는 계속 공부를 했다면 의사든 검사든 무엇이든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현실과 조금 타협해서.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돈도 많이 벌고 말 그대로 의사든 검사든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런 미래에 도달하기 위한 길을 걸을 수가 없다는 걸 그 좋은 머리로 대번에 깨달았기에.

호진이는 망설임없이 책을 접고 당장 돈을 벌기 위해 노력했다.

기술을 배웠다.

빨리 딸 수 있지만 공부가 어려웠던 자격증을 땄고 제법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바닥이 없는 늪이라 생각했던 곳에서 그나마 가정을 지탱할 수 있었던 건 그러니까 막내의 덕분이었다.

그 대가로 호진이는 미래를 지불했다.

그러니까, 도진에게 그것은 빚이었다.

갚을 수가 없는.

그 갚을 수가 없었던 빚을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에 도진은 감사했다.

다만 그것을 그저 빚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다.

그건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뭔가 뭔가'니까.

그래. 말로 하긴 뭐하지만 어쨌든 뭔가 걸리긴 하는 그런 단어 대신.

나이 차가 제법 나는 장남으로서 우리 소중한 막내가 하고 싶은 건 다하게 해 주고 싶다는 그런 거다.

굳이 돈을 벌기 위해 공부하지 않아도 좋다.

그것이 생산적이지 않고 쓸데없다는 말을 듣는 것이라도 좋다.

그저 순수하게 알고 싶은 것을 알아가는 즐거움에 살아도 좋다.

"우리 막내, 하고 싶은 거 다 해."

"응, 고마워. 형."

불과 1년 전만 해도 이럴 때엔 '형!' 목소리를 높이며 와락 안겼었는데.

이제 열두 살이 되었다고 제법 무뚝뚝해져 버렸다.

그래도 귀엽긴 하지만, 역시 아쉽다.

"안겨도 되는데, 호진아."

호진이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형. 형 품은 임자들이 많으니까."

흘긋. 호진이의 시선과 상미의 시선이 찰나에 스쳤다.

"응?"

"나도 이제 독립할 때가 됐지."

"…막내야?"

이른 중2병이 온 걸까.

도진은 생각했다.

* * * *

시간은 금방 흘러 1학기가 끝나고 여름 방학이 찾아왔다.

1학년과 2학년 때엔 돌아보면 순간이었지만 당시엔 제법 길었던 시간이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라진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 듯 3학년의 여름 방학은 금방 찾아와 버렸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3학년이 되면서 여러 행사에 불참하고 동시에 외부에서의 일에 바쁘다 보니 그리된 것이다.

그리고 호진이가 들을 특강도 코앞으로 다가왔다.

호진이가 들을 여름 방학 심화 특강은 주로 일대의 명문 학교를 대상으로 참가자를 모집했는데 면면이 상당히 호화로웠다.

소위 말하는 일타 강사뿐 아니라 학문적으로 명망이 높은 교수들까지 포함돼 있었으니 자연스레 참가비가 비쌀 수밖에 없었고 그 돈을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학부모들을 둔 학생들을 대상으로 홍보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성립된 특강에는 호진이는 물론이요 도진에게도 반가운 얼굴들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릴리와 윌리엄이다.

웨일스 후작가의 아이들.

릴리 에디나 웨일스, 그리고 윌리엄 루크 웨일스.

릴리는 유진이와 동갑이고 윌리엄은 호진이와 동갑인데 바로 그 두 사람도 이번 특강을 듣는 것이다.

웨일스 후작이 약 한 달여를 한국에 머물게 됐는데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다.

"잘 됐네. 호진이 잘 부탁해, 릴리."

"네, 오빠!"

이제 5학년.

아직 도진의 눈에는 물가에 내놓은 막내였다.

뭐 릴리도 어리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똑 부러지는 성격에 '중학생 누나'니까 윌리엄과 함께 호진이도 잘 챙겨줄 거라 믿었다.

외적으로는 따로 잠룡문에서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경호도 할 거니까.

그런 식으로 호진이가 릴리, 그리고 윌리엄과 함께 특강을 듣는 동안 도진은 잠룡문의 일에 집중했다.

치안 유지 업무까지 포함하여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일이 수월해진 부분이 많아졌다.

하지만 일이란 게 항상 그렇듯 평탄하지만은 않다.

변수가 발생하는 건 일상이고 그 변수가 좋지 않은 경우 또한 적지 않으니 그 변수가 이번엔 바른 엔터가 진행하던 프로젝트에서 발생했다.

"흐음, 그러니까 방송국 쪽에서 갑자기 강짜를 부린다 이거죠?"

도진의 말에 마주 앉은, 바른 엔터의 다섯 파트장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갑자기 이래 버리니까 좀 당황스럽네요."

40대의 남자이지만 힙한 스타일의 복장에 붉은색으로 염색한 머리가 잘 어울리는 그는 도진이 바른 엔터의 일을 전적으로 맡긴 다섯 파트장 중에서도 최고참인 여규열이다.

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실력자이면서 경영인으로서의 능력도 갖추고 있는 그는 그렇기에 바른 엔터가 진행하고 있는 대형 프로젝트 중 하나인 '정글 게임 프로젝트'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 움직이고 있었다.

일이 잘 되어 이제, 드디어 본격적으로 정글 게임의 촬영에 관한 부분을 논의하게 됐다.

늘 해오던 대로 잘 풀릴 거라 생각을 했는데…… 여기서 갑자기 방송국이 태도를 바꿨다.

"웬만하면 좋게 좋게 협의를 하려 했습니다. 사실 이 바닥이 그렇잖습니까. 끼워팔기도 할 수 있고 뭐 좀 PPL 욕심을 낼 수도 있는 거죠."

그는 제법 둥근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웬만한 부분은 수용하고 모난 부분이 있으면 깎아 잘 굴러가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로서도 들어줄 수 없는, 말 그대로 강짜를 방송국 측에서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DS쪽 친구들이 못 나오게 됐으니까 어차피 다른 친구들 섭외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부분에서 뭐 웬만큼은 방송국 쪽에서 추천하는 애들을 쓰려고는 했는데……."

그게 좀 많이 과했다.

논란이 터져서 자중하고 있는 사람을, 그것도 여전히 비난 여론이 거센 사람을 둘이나 넣자고 하는 거다.

"원래 그렇잖아. 이런 프로에서 구르고 고생하는 거 보여주면서 이미지 좀 새로 가져가는 거지. 지들도 그거 잘 아니까 열심히 할 테고 그러면 좋은 그림도 잘 나올 거잖아. 오히려 여 파트장이 더 견적 잘 뽑을 텐데?"

말이야 맞는 말이다.

단, 그게 시청자들한테 인정과 용서를 받을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거지.

음주 사고 세 번이면 스트라이크를 넘어 그냥 아웃이다.

또 한쪽은 도박을 하다 걸렸는데 그 과정에서 팬들한테 돈을 빌려 그것마저 다 탕진한 게 드러났다.

그러고도 뻔뻔하게 큰 소리를 치는 게 아직도 너튜브에 박제되어 있다.

그런 것들을 출연시키겠다고?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갔다.

그뿐인가.

"갑자기 정 국장님보다 높으신 분이 투자자랍시고 데려와서는 깽판을 치는데 와, 저도 의자 집어 던지고 싶더라고요."

톡 까놓고 말해 정글 게임 프로젝트의 '갑'은 바른 엔터였다.

방송국은 예능 국장인 정은정 국장이 진심을 보임으로써 겨우 한 발을 걸칠 수 있게 된 거다.

그러니까 정은정을 대표로 한 방송국과 이야기가 잘 되어 생각보다 빨리 촬영에 관한 협의까지 이른 거였는데…….

"아니, 우리도 어엿한 투자자이기도 하잖습니까. 우리의 목소리를 좀 들어달라는 건데 그걸 그렇게 칼 같이 자르는 건 갑질 아닙니까?"

"갑질이라니요. 원하시는 게 있으면 정식으로 절차 밟아서 회의를 해야지 일방적으로 요구하시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어허! 요구라니요! 말이 과하시네!"

"자자, 생각해 보세요. 펀딩 투자자분들의 목소리만 목소리가 아니고, 우 사장님도 어엿한 투자자 아니십니까. 그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정글에서 매 식사마다 버너 써서 요리하는 모습을 무조건 넣으라고 하시는 걸 들어드릴 순 없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무려 본부장이란 사람이 외부인을 데려와 터무니없는 소릴 해대니 제아무리 둥글다는 여규열이라도 삐죽삐죽 가시가 솟는 걸 억누르기 힘들었던 것이다.

여기에 화룡점정으로.

"허, 참! 말이 안 통하시네! 아 그러지 말고 대표 좀 봅시다, 대표! 거 아무리 그래도 이쪽도 부사장님까지 오셨었는데 바른 엔터도 대표가 한 번은 나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 소리까지 들으니 빡쳐서 도진을 찾아왔다는 거다.

"흐음."

도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쯤 되면 뭔가 냄새가 난다.

방송국이 갑자기 뭔가 욕심이 나서 그러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입김이 작용한 건 아닐까 하는 냄새가.

그러니까 그 입김의 주인은 바른 엔터가, 더 나아가 어쩌면 도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다.

그래서 이렇게 훼방을 놓을 목적으로 수작을 부렸다.

그리고 아마 그 입김의 주인은…… 어쩌면 무형독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나간 것일까.

'뭐, 모르는 거지.'

바할라에서의 사건으로 어쩌면 '전쟁'이 날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무형독은 좀체 꼬리조차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겁쟁이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거대하기에.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발생할 변수를 꺼리는 쪽이라고 나지윤은 판단했고 도진은 거기에 동의했다.

그러니까 그럴 수 있는 거다.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지만 성질이 나니까 이런 식으로 빙 둘러서라도 한 대 때리고 싶다는.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도진의 생각일 뿐이고 진짜일지 아닐진 모를 일이다.

뭐, 지금 단계의 대응에서는 굳이 거기에 관해 얽매일 필요는 없다.

그런 건 유능한 나지윤의 답청문과 바할라의 정보 단체에 맡기면 될 일이고 도진은 당장 해야 할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니까.

도진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그러면 이틀 뒤 회의는 저랑 같이 가도록 하죠."

도진의 말에 여규열이 전염된 듯 마주 씨익 웃으며 답했다.

"예, 대표님."

* * * *

그리하여 이틀 뒤.

도진은 양복을 차려입고 여규열과 함께 방송국 회의실로 향했다.

시간에 맞춰 도착하니 회의실 밖에서 은빛 안경테가 인상적인 정 국장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본래 당당하던 얼굴이 무겁고 어둡다.

도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국장님. 국장님은 최선을 다하셨고 약속을 지키셨으니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국장보다 위에 있는 이들이 개입하여 판을 어지럽힌 일이다.

정 국장의, 예능국 국장으로서의 권한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던 정 국장은 사과함으로써 약속을 다한 것이었다.

물론 좋은 사람들이 다 그렇듯 정 국장은 도진의 말에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렇게 무거운 얼굴의 정 국장과 달리, 회의 시간에 10분이나 늦어서 나타난 본부장이란 인간은 낯도 두꺼워 씨익 웃는 얼굴이었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저쪽 회의가 좀 늦게 끝나서."

털썩!

가볍게 자리에 앉고선 도진에게로 시선을 향한다.

"아이고, 이거이거. 그 얼굴 보기 힘든 바른 엔터 대표님도 오셨네. 반갑습니다. 본부장을 맡고 있는 강나철입니다."

"예, 안 반갑지만 김도진입니다."

"……예?"

"안 반갑지만 김도진입니다."

"……."

강나철의 웃고 있던 얼굴에 균열이 간다.

동시에 참석한 이들 중 방송국 사람들이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

도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즉시 본론을 말했다.

"죄송한데 제가 좀 많이 바빠서요. 지각하신 분 때문에 회의가 지연 됐으니 바로 본론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규열 파트장님 통해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의견 절충이 되지 않으면 진행이 힘드시겠다구요."

"……."

강나철이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을 또르륵 굴렸다.

도진이 그런 강나철을 마주하며, 사무적인 미소를 띠고서 말했다.

"힘든 부분을 굳이 절충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예?"

"투자금은 그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 협업은 없던 걸로 하죠."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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