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465화 (465/741)

464화

바할라에서의 일로 사람들은 무형독의 많은 것이 드러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틀린 생각이었으니 무형독은, 그렇게 드러난 것 이상으로 거대하고 깊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에서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인 태무진이 벌인 공작이 그러하다.

태무진은 대외적으로는 대호문의 문주이자 의천검가의 수족으로 여겨지고 있다.

허나 사실은 그 반대다.

의천검가가 대호문을 부리는 게 아니라 대호문이 의천검가를, 태무진이 의천검가의 가주를 은밀히 컨트롤하는 것이다.

대놓고 꼭두각시로 부린다는 게 아니다.

은밀하고 완만하지만 분명하게, 본인은 인식하지 못할 만큼 거시적인 영역에서의 컨트롤이다.

진실을 안다면 모두가 경악할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너무나 거대하여 눈치채지 못할 공작은 의천검가에서 끝나지 않았으니 놀랍게도, 안민선과 안지오 또한 그 공작의 영역에 있었던 것이다.

사실 당연히 가졌어야 할 의문이다.

대호문은 그 특성상 '중앙 집권적'이다.

한데 그런 대호문에서 설령 문주의 동생이라 해도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하고 대립한다고?

이상하지 않은가.

심지어 그 세력이 적지도 않았다.

애초에 싹이 자라기도 전에 짓밟았어야 할 것을 태무진은 방치한 것이다.

'방치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끔 유도했고 그들이 의도대로, 안민선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무형독의 차원에서 은밀하게 지원해 주었다.

목적은 하나였다.

안민선과 안지오의 타락.

선량한 이를 타락시키는 게 아니라 본래 그러한 이들을 그저 조금,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완만하고도 간접적으로 유도하여 그들이 무형독이 원하는 길로 가게 만들었다.

한데 그렇게 공을 들였던 것이…… 엎어졌다.

김도진은 모를 것이었다.

그가 망친 게 얼마나 거대한 작업이었는지.

그것은 그들이 보고 있던 미래가 그들이 의도한 대로의 인간이 된 안지오가 대통령에 당선되고도 더 넓은 영역에 있다는 데에서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게나 거대한 만큼의 공을 들였던 작업이 참, 어이없는 데서부터 시작해 무너진 것이다.

다만 그들은 그만큼 거대한 작업이 수포로 돌아갔음에도 분개하지 않았다.

분명히 화가 나고, 일전엔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지만 이제 그러지 않기로 마음을 가다듬었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는 건 그들이 그리고 있는 그림에 비하면 이번 일조차 무수한 가지 중 하나에 불과했기에.

사소한 것 하나 하나에 집착하기엔 그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고 거대했던 것이다.

동시에, 그렇기에 김도진을 당장 제거하려 들지도 않는다.

-계획이란 게 항상 그대로 진행될 수는 없는 일이지.

-오히려 변수를 제거하려 들다 일을 망치는 법이니까.

-깔끔하게 대안에 따라 움직이도록 하지.

무형독의 힘을 쓰면, 김도진을 제거할 수 있을 거라 그들은 확신한다.

그게 어렵지도 않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일이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그런 식의 사소한 변수와 행동으로 인해 크게 어긋날 수 있는 것이다.

일견 이해할 수 없는 규칙이나 법도가 거시적인 영역에서의 필요에 의해 존재하듯.

동시에 다른 가능성도 있다.

-그놈은 가능성이 있으니까 말이야.

-가치없는 도적놈들과는 다른, '진짜'일 테니.

-때가 되면 한 번 대화를 나눠봐야겠지.

그러니까 그들은 당장 김도진을 제거하기보다는.

-자네 말이 일리가 있구먼. 그래, 맞아. 이쯤 되면 그놈이 하늘의 뜻을 대신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어.

김도진이 바로 '하늘의 뜻'을 대신하기 위해 존재하는 장애물로 여겼다.

하늘이 그들이 원하는 바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을 대신 전하는 존재로.

태무진의 말에 많은 이들이 동의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은 하늘의 뜻에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렇다면, 보란듯이 거부해 줘야겠지.

카자카미 노보루의 사나운 미소에 태무진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우리는, 하늘을 믿지 않으니까요."

* * * *

어느덧,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지도 3년이 더 지났다.

짧다면 짧은 세월인데 그 밀도가 워낙 높아서일까.

도진은 그 3년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처음엔 막연히 전생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는 목표를 잡고 달려왔는데 차곡차곡 시간이 쌓이다 보니 한 문파의 문주가 되어 있었으며 주위에 참으로 소중하고도 대단한 인연이 많이 생겼다.

잠룡문주.

오성과 깊은 연이 있으며 심지어 금화의 영애와도 인연이 있다.

무림 전담 타격대와도 친한 것 같은데 대한민국 최고의 대장장이 가문이 이웃 사촌이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후기지수들도 독점하다시피하고 있다.

금전적으로도 손꼽히는데 다른 건 말할 필요도 없이 '바할라와 친하다'는 것만으로도 설명이 끝나 버린다.

이렇게 짚어 나가면, 3년이 길게 느껴지는 게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걸 이뤘다.

동시에 앞으로 그 3년이 짧게 느껴질 만큼의 미래가 펼쳐져 있으니 도진은 지금 아주 조금.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다.

아직 스스로를 '소천마(小天魔)'라 칭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모든 면에서 순항하고 있지만 딱 하나.

천마심공의 5성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음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을 하나로 묶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도진이 천마신교의 교주가 될 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누군가는 도진이 '누구인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 간극은, 아직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대로 고착돼 버리면 언젠가는 크게 벌어져 문제가 될 것이다.

때문에 도진은 노력하고 있었다.

그 노력 덕분에 천마심공은, 천마신공의 성취는 4성의 완숙에 이르렀다.

그리고 벽에 부딪쳤다.

이 벽을 부수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시야를 넓히기 위해 본격적으로 장호에게 사신공을 사사받기도 해 또 큰 성취를 이루었다.

덕분에 화경(化境)의 경지에 도달하지는 못했으나 지금의 도진은 진심으로 실력을 발휘한다면 준비되지 않은 화경의 고수라면, 그러니까 경지를 넘어선 고수조차 단 한 수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무인이 되었다.

허나 그럼에도 도진은 아직 벽을, 경지를 넘지는 못한 것이다.

이제 곧 학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할 때가 올 시기임에도.

"끌끌. 우리 제자도 그래도 사람이긴 하구나."

"예."

위지혁과 장호는 그런 도진의 자그마한 조바심에 오히려 끌끌 웃었다.

"역시 티가 납니까?"

도진의 물음에 위지혁은 당연하지, 하고선 말했다.

"제자야. 역시 프로 재능충이라 그런지 조바심도 아주 프로급이로구나."

"…제가요?"

"그래. 아니 세상 어떤 재능충이 천마신공을 단! 3년 익히고서 5성을 넘본단 말이냐. 말하고 보니 정말 프로 재능충은 다르구나."

"……."

"나 때는 말이야, 마흔 되기 전에 5성을 찍으면 세기의 천재라고 했었다. 젖 떼기 전부터 무공에 입문한 놈들 기준으로 말이야."

사실이었다.

아니, 애초에 입문하는 것조차 세기의 도전이었던 게 천마신공이다.

물론 그들 모두가 압도적인 천재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도진은 아주 약간 불퉁한 얼굴로 질문했다.

"스승님은 어떠셨습니까?"

"나? 나야 뭐 서른 되기 전에 5성 넘겼고 마흔 되기 전에 교주였지. 근데 뭐 나를 다른 놈들이랑 비교하는 건 좀 그렇지 않느냐."

"…그러시군요."

분명히 날 칭찬하려던 거 같은데 아닌 거 같다.

그런 생각을 한 도진이었지만 스승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기에 이내 옅게 웃었고 위지혁도 피식 웃었다.

"걱정할 것 없다. 너는 잘 하고 있으니. 뭐, 약간 조바심을 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겠지."

제자는 이미 벽의 앞에 서 있으며 그 벽을 부수기 위한 준비도 다 되어 있다.

남은 건 오직 하나.

그 벽을 부수기 위한 계기요 깨달음뿐이다.

그리고 위지혁과 장호는 직감하고 있었다.

머지 않았다고.

* * * *

여름 방학을 코앞에 둔 시기였다.

방학이 되면 시간이 많이 비는 만큼 도진은 잠룡문에 조금 더 신경을 쓸 생각이었다.

그리고 주말. 본가에 머물고 있던 도진에게 윤상미가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오빠."

"그래, 상미야. 어서 와."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저 보고 싶어 찾아온 것이다.

웃으며 맞이해 주는 도진의 모습에 기뻐하며 상미가 주위를 살폈다.

"호진이 말고는 안 계신가 봐요."

"어. 모두 바쁘니까."

아버지는 방학을 앞두고 바빠진 회사에 특근.

어머니 또한 자기계발과 회사의 일로 특근.

유진이는 연습생으로 실력을 쌓느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김도진의 동생'이라는 신분은 차라리 족쇄이기에.

유진이는 스스로의 실력으로 인정받기 위해 남들의 배 이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뭐 그런 배경으로 집에는 도진 외에 자기 방에서 공부하고 있는 호진이뿐이었다.

"네에. 아이스크림 케이크 사왔는데, 간식으로 주러 가도 될까요?"

"좋지."

상미가 선물로 사 온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먹기 좋게 잘라 접시에 담아 함께 가지고 갔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노크를 하고 들어가 간식을 건넸다.

"고마워요, 누나."

"응. 맛있게 먹어."

간식을 주고서 책상을 가볍게 훑는데 호진이가 공책에 끄적인 무언가가 보였다.

그런데 그 문구가 워낙 심상치 않아 도진의 눈이 슬쩍 커졌다.

- - - -

제목 : 등산

올라갈 땐 오빠 동생

내려올 땐 여보 자기

- - - -

'이게…… 뭐지?'

조심스럽게 옆으로 시선을 향하니 상미 또한 하얀 볼이 붉어져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을 눈치챈 호진이가 아, 하고서 말했다.

"인터넷에서 본 건데요. 짧은 두 문장에 진짜 많은 걸 함축한, 정말로 잘 쓴 시라서 인상 깊었던 거여서 한 번 끄적여 봤어요."

"아, 그렇구나……."

호진이의 설명에 상미가 고개를 끄덕인다.

영혼이 반쯤 빠져 있긴 한데, 그 반 남은 영혼에 시가 제법 인상 깊게 남은 것처럼 보였다.

-호오. 등산은 좋은 문화로구나.

-아니, 스승님.

호진이가 점점 요상해져 가고 있다는 건 느꼈는데 정말 이대로 두어도 괜찮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된 도진이었다.

그렇게 충격을 선사한 호진이가 무언가 소책자를 꺼내더니 도진에게 건넸다.

"형."

"응. 뭐야?"

물으면서 제목을 확인하니 '여름 방학 심화 특강'이라고 쓰여 있었다.

"학교에서 오늘 나눠준 건데, 신청하면 유명 교수님들이 하시는 강의를 방학 동안 들을 수 있대. 나, 이거 들어도 될까?"

듣고 싶어하는 게 그대로 보이는 얼굴이다.

'그랬지.'

유진이와 호진이는 이사를 오며 명문 학교로 전학을 갔다.

도진의 걱정과는 달리 제법 잘 적응하고 있었으며 특히 호진이의 경우 이제는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성적이 좋았다.

'호진이는 머리가 좋았으니까.'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정확히는, 공부하여 새로운 것을 아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녀석이었다.

아마도.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했으며 하고 싶은 공부를 맘껏 하게 해 주었다면 노벨상 정도는 따지 않았을까 하고.

전생의 도진은 생각했었다.

책자를 훑어보니 특강 신청에는 제법 큰 돈이 필요했다.

호진이는 특강을 듣고 싶었지만 이 때문에 장남인 도진에게 물은 것이었다.

'이 녀석 모으고 있는 용돈으로는 모자라니까.'

아마 모은 용돈으로 해결이 가능했다면 이렇게 도진에게 묻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기특했다.

도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우리 막냉이가 듣고 싶으면 당연히 들어야지. 당장 신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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