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460화 (460/741)
  • 459화

    안지오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판단의 근거와 계산이 여전히 맞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는 놈이었다.

    그때는 벌레를 눌러 죽이는 것보다 쉽게 짓이길 수 있을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벌레가 갑자기 너무 많이 커 버려 섣불리 건드려선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가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는 놈이라 생각했다.

    무공과 명성, 인맥이 제법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니다.

    그저 돈이 많은 이를 재벌이라고 부르지 않듯, 아직 김도진은 그와 '같은 물'에서 놀기엔 많이 부족했다는 말이다.

    양지에서 부딪치면 힘들겠지만 음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음지야말로 쌓아온 것들, 그리고 가진 것들의 진가가 드러나는 곳이니까.

    음지에서의 힘을 동원하는 것으로 그 기반이 없는 김도진을 얼마든지 뒤흔들고, 망가뜨리고, 무너뜨릴 수 있다고 안지오는 판단한 것이다.

    본격적으로 죽이려 한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만.

    그저 자신의 취미를 파고들려는 시도를 그만두게 만들 정도로만 흔들려 했다.

    이 정도라면 아주 간단히 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안지오에겐 있다고 누구나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게 뭔가.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이 잘못되었다.

    안지오는 자신의 사무실에 들어선 심복을 노려보았다.

    "물건입니다, 도련님."

    "……."

    심복이 내미는 USB를 받아 챙겼다.

    이것으로 당분간, 길면 한 달이 넘는 시간을 버텨야 하게 생겼다.

    -아들. 상황이 조용해질 때까지는 자중하자. 알겠지?

    -…네, 어머니.

    "어떻게 된 거야?"

    씹어뱉듯 묻는다.

    심복은 고개를 숙이며 뻔하디뻔한, 죄송합니다란 소리를 씨불였다.

    분노로 눈에 불이 튀는 듯하다.

    뻔한 소리 때문이 아니라 그 뻔한 소리가 최선이라는 걸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상황이 불에 기름을 부은 듯 분노를 크게 했다.

    차라리 교통사고였다.

    분명히 김도진을 노리고 음지에서의 힘을 움직였는데 갑자기 나타난 무슨 말도 안 되는 미친 마두 새끼에게 치여 버렸다.

    은살, 은살문이라고 하면 음지에서는 손에 꼽는 스페셜리스트들이다.

    상류층의 심부름을 확실하게 수행해 오던, 그래서 상류층이 편의까지 봐 주어 날개마저 달게 된 스페셜리스트 말이다.

    웬만해선 은살을 찾을 수도 없고 찾을 수 없으니 방해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이게 뭔가.

    안지오의 심부름을 하던 사진사를 포함한 흑도를 완전히 조져 놨던 미친 마두 새끼가 이번엔 그 은살문까지도 조져 버린 것이다.

    그냥도 아니다.

    무림인으로서의 생명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구실마저 하지 못할 상태로 만들어선, 그러고서도 숨을 붙여 세간에 드러나게 만들었다.

    그뿐인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찾은 건지 은살문이 지금껏 해 왔던 일들 여럿을 공개하여 동정은 커녕 비난만 받게까지 했으니 은살문의 놈들은 살아서 상상도 못할 지옥을 보게 됐다.

    - - - -

    곧 찾아갈게.

    - - - -

    그리고 그 지옥을 만든 미친 마두 새끼의 시선이 이제는 안지오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편지를 보냈지?

    도대체 뭐하는 새끼지?

    정체가 도대체 뭐야?

    잠룡문이 했을까?, 잠룡문이라기엔 너무 이질적입니다, 그동안의 행보를 생각하면 아니라 보는 게 옳지 않을까 합니다.

    미친듯이 뒤졌으나 정체를 포함하여 무엇 하나 찾을 수가 없었다.

    찾을 수가 없으니 맞춤 대비를 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안지오는 본래 김도진이 했어야 했을 대비를 자신이 하는 꼴이 되었다.

    모든 걸 막아야 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덮칠지 모를 위협에 벌벌 떨며 신경질적으로 방어를 해야 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된 게 벌써 일주일.

    안지오는 사소한 것 하나에도 신경질이 났고 물어뜯던 손톱은 완전히 아작이 났다.

    차라리 양지로 일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대대적으로 언론에 알리고 이슈화하여 대중의 눈과 시선을 끌어들여 놈을 압박할 수라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안 된다.

    '음지의 일'이니까.

    이슈화는 곧 스스로의 목을 죄는 행동이었고 때문에 오히려 안지오는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 제한되어 버렸다.

    여기에 평소 쌓아둔 인맥조차 활용할 수 없으니 은살문이 벌였던 일들이 드러나며 그와 연관되어 있던 이들이 줄초상을 치를 상황이기 때문이다.

    죽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그들이 안지오의 말을 들어줄 리가 만무하다.

    그러니까 안지오는, 그저 일정을 최소화하고 가장 안전한 자신의 어두운 방 안에 처박히는 것 이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심복이 건넨 USB를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컴퓨터에 꽂았다.

    "후우."

    USB에 담겨 있던 수준이 떨어지는 사진과 동영상이 즐거워야 할 시간에 불쾌함을 더한다.

    다만 위기감이 그 불쾌함을 메꿔 흥분을 더해 주었다.

    그렇게 안지오는 혐오스런 범죄의 영상으로 이끌어내는 흥분으로 불안함을 덮었다.

    * * * *

    살수가 토해낸 정보를 바탕으로 하여 도진은 은살문을 찾아 멸문(滅門)시켰다.

    하나도 빠짐없이 오래 살 수 있도록, 그렇게 오래 살며 최대한 벌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짐승이라 부르는 것조차 과분할 놈들이 최대한 가혹하게 죗값을 치르도록 벌(罰)에 중점을 두었다.

    그 과정에서 은살문은 멋대로 자신이 아는 것들을 떠벌렸고 본래 나지윤이 조사하던 것을 더해 이 죄의 근원을 찾을 수 있었다.

    "안지오. 정계의 젊은 용이라 불리던 만찢남."

    배경, 인성, 외모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어 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라 불리던 인간이었다.

    그 인간이, 이런 추악하기 짝이 없는 본성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나지윤은 그 추악한 인간에 대해 조사한 정보를 도진에게 모두 알려 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벌을…… 줘야지."

    답하는 도진의 말에는 약간의 텀이, 여러 감정이 있었다.

    나지윤이 웃으며 말했다.

    "고민하지 마, 김도진."

    도진과 나지윤의 눈이 마주한다.

    "쓸모없는 정도가 아니라 있어서 오히려 무수한 해악을 낳는 것들이잖아."

    "그런 놈들에게 벌을 주는 건 절대로, 잘못된 게 아니야."

    "너는 옳은 일을 하고 있잖아. 절대로 잘못된 곳까지 선을 넘을 일도 없을 거니까, 망설이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생각해. 내가 아는 김도진은 그러니까."

    나지윤의 말에 도진이 피식 웃었다.

    "나도 알거든. 전교 2등아."

    "뭐, 임마?"

    "고맙다. 알고 있는 건데, 그게 맞다고 확인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좋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옳다는 걸 알고 의심하지 않는다.

    실제로 천마신교의 교리에도 어긋나지 않으니 스스로가 아닌 교의 기준에 빗대어서도 일절 걸리는 부분이 없다.

    무엇보다 전생의 유진이를 그렇게 만든 죄의 근원. 그것을 벌하는 데 망설임은 존재할 수가 없다.

    다만 그에 동반되는 여러 감정들과 생각들은 어쩔 수 없으니 동조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역시 좋은 일이다.

    이 멋지게 생긴 친구놈은 정말로 얼굴값을 한다.

    그러니까 멋지다는 말이다.

    "좀 있다 보자."

    "그래."

    * * * *

    도진은 여전히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는 벚꽃이 완전히 진 등굣길을 소담과 함께 걷고, 집행부에 들르고, 잠룡문의 일을 처리하고, 가족과 밥을 먹고.

    그리고 세워둔 계획에 따라 일상이 아닌 일을 진행할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였다.

    "형!"

    "서, 선배님!"

    주말이라 느긋이 집으로 향하던 도진의 앞에 새내기 성민혁과 성지인이 나타났다.

    무언가 큰 것을 준비한 얼굴의 두 사람을 마주하며 도진이 미소지은 채 물었다.

    "왜 그래, 새내기들."

    "그게요……."

    성지인이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성민혁이 나섰다.

    "저희랑 저녁 드시지 않을래요?"

    "저녁?"

    "네! 클로에 선배님이랑 저희가 저녁 준비했거든요!"

    "어? 그거 말해도 되는 거야?"

    "아니, 이건 상관없지 않나?"

    무언가를 준비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게 좀 어설퍼 피식 웃음이 나오면서 그래서 더 좋다.

    도진의 미소가 좀 더 진해졌다.

    "음 뭐, 특별한 약속은 없으니까. 그래. 같이 저녁 먹자. 어디로 갈 거야?"

    "클로에 선배님 집이요."

    "오케이. 가자."

    오늘이 무슨 날이었던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는데 그것이 도진과는 본래 연이 없던 것이라 조금 긴가민가하다.

    "어서오세요, 스승님."

    "응, 안녕. 냄새 좋네."

    클로에의 집 거실에 들어서니 정말로 좋은 냄새가 난다.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하지만,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집밥'의 냄새다.

    "후배들과 같이 만들었습니다."

    "오, 완전 구첩반상이네."

    제법 커다란 식탁 위를 정갈한 반찬이 가득 채우고 있다.

    소고기를 굽고 나물을 무쳐 내고.

    거기에 보글보글 끓고 있는 가운데 된장국을 밥그릇 옆에 하나씩 덜어 놓았다.

    솜씨 좋은 어머니가 해 주시는 밥에 익숙한 도진이 보기에도 감탄이 나오는 정성이 보였다.

    "클로에랑 너희들, 음식 진짜 잘 하는구나?"

    "헤헤. 사실 대부분은 클로에 선배님이 하신 거구요, 저희는 그냥 거든 정도에요."

    "그래. 고맙다. 잘 먹을게."

    함께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그런데 도진이 수저를 드는 걸 기다리는 데 그치지 않고 후배들이 도진을 빤히 본다.

    "왜?"

    성민혁이 답했다.

    "음, 사실은요. 이게 다 오늘이 스승의 날이라서 준비한 거거든요."

    오기 전 혹시나 했던 게 정답으로 나왔다.

    스승의 날.

    스승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한 바로 그 날이 오늘이었다.

    그리고 후배들은, 클로에와 새내기들은 스승의 날 도진에게 감사하기 위해 이 식사를 준비한 것이다.

    "아……."

    담담할 줄 알았는데.

    막상 실제로 그 이유로 준비했다는 이야길 들으니 어쩐지 잘 말이 나오지 않는다.

    -허허.

    위지혁과 장호가 흐뭇하게 웃는 기색도 심상세계에서 느낄 수 있었다.

    성지인이 말했다.

    "사실은요, 정말로 좋은 걸 준비하고 싶어서 뭉쳤는데요. 그래서 상미 선배님이랑 서진 선배님한테도 여쭤봤는데요."

    -오빠는 몸에 뭐 걸치는 걸 안 좋아하셔. 그리고 특이하지만 과하지 않은 걸 좋아하셔.

    윤상미가 특히나, 수상할 정도로 도진에 대해 세세하게 알고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다만 그런 지식이 더해져서 안 그래도 무얼 선물해 드려야 할까 어려웠던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형은 안 그래도 손재주가 좋은 편인데 요새 할아버지랑 어울리면서 이젠 웬만한 건 선물하지도 못하게 됐단 말이지.

    그래서.

    클로에가 말했다.

    "그래서 정말 많이 고민하다가, 식사를 대접해 드리면 어떨까 하는 조언을 유지은 선배님께서 해 주셨습니다."

    "아하하. 그랬구나."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재 유지은이 과연 어떤 생각과 근거로 한 조언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좋은 선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저 이 '제자들'의 정성이 담긴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을 거라는 계산까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성민혁과 성지인이 예쁜 리본으로 장식된 식물이 수줍게 핀 화분을 가져왔다.

    "공기 정화랑 심신의 안정에 효과가 큰 식물이래요."

    "이건 우리가 정말 열심히 생각해서 선택한 건데, 형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그래. 좋네."

    "정말로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스승님."

    "아니, 진짜야. 벌써 정신이 맑아지는 거 같네. 고마워."

    거짓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정말로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고맙다."

    * * * *

    다음날.

    도진이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나지윤에게 말했다.

    "지윤아."

    "어."

    "작전을 바꾸자."

    이미 많은 걸 진행하고 준비한 작전이었다.

    조금 보태면 결행만이 남은 상황.

    그러나 나지윤은 얼굴을 찌푸리는 대신 오히려 멋드러진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이유는?"

    도진이 그에 뒤지지 않을 얼굴로 답했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져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