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화
선도고등학교는 무림학교 중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역시나 '무투파'라 불릴 정도는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도고등학교는 명문고를 꼽을 때 무조건 한 손에 꼽히곤 했으니 그 구성원인 학생들 다수가 정계를 배경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력(武力)으로는 조금 아쉬움이 있지만 대신 권력(權力)에 있어서는 최고라는 이야기다.
안지오는 그런 선도고에서 권력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학생회장에 올랐을 만큼 특출난 학생이었다.
더더욱, 고등학교에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인 한국대에서마저 총학생회장을 지내면서 스스로의 특별함을 더 확실하게 증명했다.
선도고의 학생회장에 이어 한국대의 총학생회장 출신.
그리고 어머니인 정계의 거물 안민선 의원 아래에서 정치에 입문, 정치를 배워 나가는 젊은 용.
이렇게 보면 분명히 대한민국 피라미드의 정점에 자리한 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것은 관현그룹이나 카자카미 가문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현재의 안지오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것이 그 둘인데.
때문에 심복은 여유에 의문을 가졌고 안지오는 그 이유를 간단히 말해 주었다.
"살수(殺手)를…… 말씀이십니까."
"그래. 살수. 간단하고 효과 확실하잖아?"
안지오는 사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관현그룹도, 카자카미 가문도, 그 외 김도진에 박살난 모든 곳들이 정말로 멍청하기 짝이 없다고.
김도진은 분명히 그 나이에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무력을 지니고 있으며 인맥 또한 어마무시하다.
하지만.
그래봐야 지금은 '일개 문파의 문주'에 불과하다.
하물며 과거는 더 말할 것도 없으니 손쓸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정면에서 부딪치는 양지가 아닌 '음지의 방법'이 말이다.
심복은 고개를 숙였다.
"예.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상대를 치는 것에는 정공법만 있는 게 아니다.
그 주변을 침으로써 상대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것이며 이를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 안지오에게는 얼마든지 있었다.
"원래 지킬 게 많은 놈이 약한 법이지."
안지오의 입꼬리가 추악하게 뒤틀린다.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정계란 건 누가 더욱 더러운가를 겨루는 장이라고.
그러니까 더러울수록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는 곳이라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고 가르쳐 주었다.
대신, 들키지만 말라고 하셨다.
-그 취미, 계속 유지해도 좋아. 하지만 들키지는 마. 알겠지, 아들?
-네, 어머니.
안지오는 어머니와 약속했고 지금껏 잘 지켜오고 있었다.
시행착오도 몇 번 있었지만 아주 훌륭하게, 깔끔하게 처리하며 오히려 노하우를 얻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의 모습에 흡족해 하셨으니 이번에도 잘 처리함으로써 또 한 번 신뢰를 쌓을 생각이다.
안지오의 시선이 심복에게로 향했다.
"뒤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건 너희 전문이니까, 맡겨도 되겠지? 대호문."
심복이, 대호문(大虎門) 소속의 무인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예. 도련님."
* * * *
저녁.
도진은 나지윤과 독대하고 있었다.
"일단 서민희의 스토킹에 관한 부분인데, 어렵다기보다는 단순히 업무량이 많아 번거로운 부류야."
웹에서는 물론이요 현실에서의 꼬리도 워낙 잘 숨겼다.
때문에 놈을 추적하려면 사진의 구도와 범위까지 감안하여 일대의 CCTV를 모조리 확인, 동선을 그리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일개 사생팬이 했다고 하기엔 수준이 높아."
"…개인의 영역에서 벌인 일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거야?"
나지윤이 도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뭐 이렇게 되면 또 나름의 방법이 생기긴 하는데 역시 시간이 좀 걸릴 일이었지. 그런데 여기서 네가 가져온 게 이어져 버린 거야."
그러면서 나지윤이 꺼내는 것이 특색없는 스마트폰 몇 개와 노트북 두 개다.
오늘 새벽, 도진이 조사해 달라면서 가져온 것이었다.
나지윤은 이것들의 출처를 대번에 짐작했을 것이다.
새벽에 있었던 일을 알고 있을 테니까.
정보라는 건 하나를 알고 있으면 그와 연관된 여러가지가 저절로 따라오는 법이다.
허나 나지윤은 이것들의 출처는 물론이요 그 외의 것들도 무엇 하나 묻지 않았다.
요즘 조금 달라진 분위기의 도진을 또한 잘 알고 있음에도.
그것이 나지윤의 도진을 믿는 방식이었으니까.
정보를 다루는 이로서 도진에 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
관심을 가지면, 파고 들면 원하지 않는 것까지 알게 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묻지 않고 그저 믿는 것이.
그 잘생긴 얼굴로 도진을 마주하며 그림처럼 웃는 것이 나지윤이었다.
"넌 진짜 맘만 먹으면 다 후리겠다, 야."
"뭔 소리야, 임마."
피식 웃고선 나지윤이 말했다.
"이 휴대폰이나 메신저 자체로는 뭘 추적하기가 힘들어. 그런 구조니까."
시중에 파는 걸 그대로 쓰지 않고 개조를 한 물건이다.
여기에 승인된 계정의 메시지만 받는 앱을 썼으니 더욱 추적이 안 된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단서가 되는 부분이 있지."
그것이 바로 개조된 부품, 그리고 앱 그 자체를 파고드는 것이다.
어떤 부품이 쓰였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개조를 했는지.
앱 또한 어떤 코드를 썼는지부터 시작해 은연중 드러나게 되는 구조적인 특징 등을 통하여 범위를 좁힐 수 있다.
물론 말이 쉬운 거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쉽지 않은 일을 할 수 있기에 답청문은 답청문인 것이다.
"같은 조직에 속해 있지는 않았지만 서민희의 사생팬으로 보였던 놈도 같은 심부름을 하던 놈이었어."
나지윤은 확정하여 말했다.
도진이 '벌'을 내린 놈들이 하던 것과 같은 작업을 서민희를 스토킹하던 놈도 하고 있다고.
"같은 방식으로 몸을 숨기고 작업하고 있어. 차이가 있다면 스토킹의 대상이지. 네가 잡은 놈들은 뒤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쪽. 그러니까 대담하게 작업을 했고 서민희의 경우엔 뒤탈이 있을 수 있으니 조금 더 신중하게 한 거야."
"…규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크네."
"맞아. 그래서 좀 덫을 놔 봤어."
"덫?"
"어. 이건 절대로 웬만한 수준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일정 이상의 힘을 가진 개인, 혹은 단체가 진행한다고 하기엔 또 그 목적이나 의도에서 의문이 생기지."
"그렇네."
겨우 스토킹 따위를 이 정도 규모로 진행할 이유와 목적을 찾기 힘들다.
"그러니까 이건 다른 목적이나 이유로 진행한 일이 아니야."
"그러면?"
"그 자체가 목적이나 이유인 거야."
스토킹,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도촬 자체가 목적이나 이유.
"이건 아주 대단하신 힘이 있는 어떤 인간이 취미로 벌이고 있는 일일 확률이 높아."
취미.
그 단어가 도진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의 온도를 극단적으로 낮춘다.
스으으으…….
'취미.'
전생에서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지이이익. 찌이익!
스스로의 얼굴을 손톱으로 긁어내던, 끔찍한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공포와 광기에 절어 있던 유진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스스로의 모습을 스스로 망쳐야만 했던 유진이.
유진이를 그렇게 만들었던 게.
한낱 힘있는 놈의 유희(遊戲)였다.
-예? 수사 중지요?
-예. 범인을 찾을 수가 없으니 수사가 진행될 수가 없는 거죠.
-아니, 피해자가 한둘이 아닌데 수사 중지라뇨! 그것도 지금도 활개를 치고 있는데!
-저기요, 저희도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에요. 밤 새가면서 잠복하고 탐문하고 해도 나오질 않는 범인에만 매달려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정 답답하시면 무림맹에 현상금이라도 걸어 보시든가요.
무어라도 하기 위해 다리를 끌며,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경찰서를 찾아갔었다.
하지만 경찰은 귀찮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항의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범인은 끝까지 잡히지 않았고 사건이 보도되거나 기사화되는 일조차 없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다.
힘있는 놈이었던 것이다. 범인이.
그러니까 도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망가진 동생에게 식어 빠진 통닭이나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이쯤 되면 아주 약간 기척을 내 주면 반응이 오게 돼 있거든. 이 정도나 되는 일을 취미로 벌일 수 있는 놈들은 한정돼 있어. 반응이 있으면 절대로 놓치지 않아."
"그래. 그렇구나. 고맙다, 지윤아."
"새끼가 징그럽게."
나지윤은 괜히 그렇게 받아치고선 확신을 담은 얼굴로 말했다.
"며칠 걸리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 확신은 이틀도 지나지 않아 사실이 되었다.
잠룡문주의 앞으로 편지 하나가 도착했다.
그 내용은.
- - - -
경고한다.
이 이상 우리를 알려고 할 경우, 너의 주변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은살(隱殺).
- - - -
청부 살인 집단의 경고였다.
"아. 하하하."
도진은 편지의 내용에 웃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하하하하하하!!"
전생을 포함해 태어나 처음으로 미친듯이 웃음이 나왔다.
그냥.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웃는 도진에게 또 한 명의 스승이 말했다.
-살수(殺手)와의 실전 수련을 할 기회로구나. 준비는 되었느냐?
스승, 사신(死神)의 물음에 그 이름을 잇는 제자로서 도진은 답했다.
-예, 스승님.
* * * *
한 샐러리맨이 있었다.
일에 치이며 별 의욕없이 사는지 헐렁헐렁 걷는 남자다.
눈에 띄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존재감이 영 없지도 않은, 그야말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 중 한 명.
소설이라면 엑스트라조차 되지 못할 그런 타입이다.
허나 그렇기에 그는 이름 높은 청부 살인 조직인 은살(隱殺)의 구성원이었다.
모름지기 살수(殺手)란 그래야만 했다.
기척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삼류다.
과하게 기척을 감추는 건 이류다.
일류란 그것이 부족하거나 과하지 않아 자연스러워야만 한다.
자연스럽게.
그래서 오히려 더욱 은밀하고도 기억에 남지 않도록.
그렇게 스며들어 있다 한순간에 타깃을 처리하는 것이 일류인 것이다.
그는 스스로가 일류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보라.
절정 고수마저 눈치채지 못하게 단번에 목을 따 버릴 수 있는 그를 누구도 눈여겨 보지 않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그가 무림인이라고조차 여기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번 임무도 그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잠룡문주의 주변인을 손봐 달라고 했다.
본인도 아니고 주변인. 심지어 너무 가까운 인물도 아니고 적당한 관계의 인물을 적당히 손봐 주기만 하면 되는 의뢰였으니 오히려 시시할 정도다.
사전 조사는 이미 끝내 두었다.
모든 CCTV의 범위를 파악해 두었고 타깃의 이동 경로를 포함한 세세한 부분까지도 숙지하고 있다.
여기에 변수까지 고려하여 시행 장소와 도주 루트까지 완벽.
남은 건 자연스럽게 접근하여 일을 벌이는 것 뿐이다.
그리고 벌써 절반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는 위치까지 왔을 때였다.
스으으으…….
마치 사신이 목덜미에 차가운 숨을 뿜어낸 듯 소름끼치는 기세가 그를 옭아맸다.
눈앞에는, 거짓말처럼 온몸을 시커멓게 두른 것이 서 있었다.
'인간'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존재가.
'뭐……야?'
더욱 무서운 것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존재를 인식한 것이 오직 자신뿐이라는 것이었다.
주변은 일상 그대로인데 오직 자신만이 갑자기 비정상의 세계로 격리된 것만 같다.
그를 그렇게 격리시켜 버린 존재가 말했다.
"…그렇게 티나게 다니면, 모른 척 할 수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