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457화 (457/741)
  • 456화

    달라진 분위기의 도진을 걱정하는 건 소담만이 아니었다.

    "후배."

    "네, 선배."

    "요즘…… 좀 나쁜 남자가 되려고 하는 거야?"

    유지은은 단어 선택을 고민하는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도진이 피식 웃고선 말했다.

    "아뇨. 전 나쁜 남자 안 좋아하거든요."

    "응. 그건 나도 그래. 나는 나쁜 남자 별로더라. 아니, 이게 아니고!"

    고개를 붕붕 젓고선 유지은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리고 이내 불만이 있는 기색으로 볼을 부풀리다 결국 말을 꺼냈다.

    "내가 아는 후배는 그러니까 나이 많은 오빠 같은 사람이었단 말이야."

    나이 많은 오빠.

    그러니까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자상한 아빠 같은 오빠'를 말하고 싶어하는 거라 도진은 이해했다.

    평소 '눈나'이고 싶어하는 생각이 있는 유지은으로서는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이다.

    "근데 요즘은 좀, 그래. 집에서는 자상한데 바깥에서는 사실 아주아주 무섭고 잔인한 사람인 그런 거 말야."

    "하하하. 역시 선배네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도진의 모습에 유지은은 눈으로 '그렇게 얼버무리려 하지 마'라고 말했다.

    그래서 도진은 조금 진지한 얼굴로, 유지은의 눈을 정면에서 마주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정말로."

    "내가 선배가 달릴 수 없는 길로 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선배가 가서는 안 될 곳으로 가는 일도 없을 거고, 선배가 내 등을 볼 수 없게 되는 일도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마요."

    "……응."

    진심을 담은 말에 유지은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소담에 이어 그렇게 유지은도, 그리고 다른 이들도 몇몇은 대화로 몇몇은 시선으로 괜찮다고 해 주었다.

    하지만 조금 더 밀도 높은 대화를 해야 하는 이들도 있었으니.

    "어서 오세요, 독마전주. 그리고 소전주."

    조용히 도진을 찾아온 독마전주 위취련과 소전주 위연서다.

    위연서가 한 걸음 뒤에서 조용한 가운데 위취련의 깊은 눈동자가 도진을 마주한다.

    "소지존. 저보다 오히려 더 잘 알고 계시겠지요."

    도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천마(天魔)는 따르는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무심한 하늘을 대신하여야 하는 이다."

    항거할 수 없는 세상의 불행과 악의(惡意)에 무심한 하늘과 부족한 법(法)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징치하고자 하는 것이 천마신교의 교리다.

    다만 개인의 힘에는 한계가 있으며 그 기준이 올바를 것이라, 또 다른 불행을 낳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할 수가 없다.

    때문에 그 믿음을 올바르게, 그리고 한계없이 행사하기 위한 존재가 필요했으니 그것이 바로 천마이다.

    천마란 설령 그 대상이 하늘의 아들이라는 천자(天子)라 해도 행사에 막힘이 없을 것이며 또한 그렇기에 그 행사에 있어 어딘가에 치우치거나 과함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인간의 법과 행사를 다 믿지 않기에 스스로가 '마(魔)'로 불리는 걸 꺼리지 않으나 동시에 그렇기에 더더욱 그 기준에 있어서는 엄격해야 한다.

    그 엄격한 기준이 되는 자 또한 천마이어야 한다.

    천천히 읊조리듯 말하는 도진에게 위취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군요."

    도진은 웃으며 미안하다고 했다.

    "걱정을 끼쳐서 미안해요. 하지만 이번 일은, 소지존으로서가 아닌 입장에서 처리하고 싶었거든요."

    위취련과 위연서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소지존으로서가 아니라는 말씀은……."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천마신교의 인도자가 아니라,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을 제거하는 자로서의 마음가짐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그리고 천마신공의 것이 아닌, '전혀 다른 기세'가 흘러나왔다.

    위취련이 굳은 얼굴로 도진을 마주했다.

    "소지존, 그것은……."

    "무명공(無名功)이에요. 이름이 없는 무공이죠. 누구에게도 불릴 일이 없었으니 이름 또한 필요가 없었어요. 다만 그 존재만큼은 세상에 풍문으로 널리 알려졌으니 사신의 무공, '사신공(死神功)'이라 불렸죠."

    "사신공……."

    독마전의 전주와 소전주는 경악했다.

    눈앞의 존재가 천마의 후계자라는 걸 안다.

    그 이름에 걸맞는 이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허나 그럼에도 경악하고 말았으니 그런 고금제일의 존재라 해도 다 담기 힘들 거라 생각한 천마신공 이외에, 또 다른 신공을 소지존이 익히고 있다 말했기 때문이다.

    도진은 담담히, 그러나 사신공을 운용하고 있기에 다른 존재감을 풍기며 말했다.

    "스승님에겐 의제(義弟)가 한 분 계셨거든요. 원류가 되는 무공은 고대 무림에서 사신(死神)이라 불리는 분의 무공이에요. 전해 내려온 기록에는…… 없었죠."

    "…예."

    사신의 기록은 현대에는 물론 독마전에도 전해지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장호에 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도진이 일부러 흘리는 기세에서 그 신공이 상상도 못할 절세의 무공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들의 지존이 될 무인은 '과대평가'했던 것보다 오히려 더 거대했다.

    "또 한 분의 스승께서는 말씀하셨어요. 나와 내 무공은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는 자들을 제거하면서 연마되었다, 라고."

    사신은 본래 무림공적이었다.

    정(正)과 사(邪), 심지어 관(官)마저도 가리지 않고 도리에 어긋난 이를 구분없이 처단했기에.

    고금제일인이자 고금제일천마였던 위지혁이 사라진 후 봉문에 가까운 침묵을 하던 마교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적이 되었다.

    여염집 처자를 간살한 이.

    백성을 수탈하고 노예로 부리던 관리.

    정파의 가면을 쓰고 인면수심의 죄를 저지른 이.

    그러나 처벌받지 않던 이들을 구분없이 도살한 장호는 무림공적이 되었으나 동시에 민초의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민초의 희생이 나오지 않게 했다.

    그들이 그를 숨겨주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세상의 그 누구도 장호를 볼 수 없었고 그의, 사신의 선고를 막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무림공적에서 사신(死神)이 되었고 위지혁 이후 무림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천마에 가장 가까웠던 이라 불렸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가 천마가 아닌 '천마에 가장 가까웠던 이'라고 불렸다는 부분이다.

    "두 분의 가치관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어요. 천마와 사신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가 말예요."

    가장 크게 드러나는 부분은 그것이다.

    "사신의 선고와 행사에는, 벌이 중시된다는 거죠."

    벌(罰).

    그래, 벌이다.

    도진은 전생에서 동생에게 평생 지우지 못할 상처를 남긴 자들을 벌주고자 했다.

    도(道)보다 벌에 중점을 두려고 했다.

    그래서였다.

    도진이 천마신공이 아닌 사신공을 운용한 것은.

    "…그러셨군요."

    위취련은 도진이 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신교의 소지존이 아닌 사신의 후계자로서 힘을 행사하고자 했기에 천마신공이 아닌 사신공을 운용하고 있으니 그 분위기가 달랐던 것이다.

    그 행사는 조금 '아쉽다'.

    교리에 어긋나지는 않지만 천마신교가 바라는 이상적인 천마와는 아주 조금, 거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도진이기에 위취련과 위연서에게 미안하다 말했다.

    하지만 위취련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소지존. 소지존께서는 올바른 길을 가고 계시니까요."

    생각지 못했던 말에 도진이 되물었다.

    "제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구요?"

    위취련이 연륜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지존께서는…… 아직 소지존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소지존. 그것은 아직 천마의 이름을 이었다 선포하지 못하는 도진을 부르는 호칭.

    그러니까 괜찮다.

    "더 많은 것을 알고, 경험하고, 배우셔야 하는 시기이지 않습니까. 사실은 소녀와 소녀의 제자가 과욕을 부리고 있는 것이지요. 소지존께서는 그것을 자비롭게 다 받아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과연, 어머니이자 스승으로서의 삶을 산 독마전주는 보통이 아니라 생각하고 만 도진이었다.

    * * * *

    이른 아침.

    여러 대의 모니터가 걸린 어두운 방 안에서 욕구에 충실한 손놀림이 한창인 남자가 있었다.

    슥슥슥슥.

    손놀림을 재촉하는, 그의 욕구를 자극하는 건 모니터에 커다랗게 띄워진 사진들과 동영상들이다.

    겁에 질려 도망치는 각양각색의 여자들.

    학생도 있고 성인도 있다.

    일부는 넘어져 속살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 특별할 건 없었다.

    요즘 세상의 '야동'이란 건 얼마든지 그런 것들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것이 성인을 대상으로 한 연출 비디오가 아닌 '실제'라는 것이다.

    그래. 그것들은 야동이 아니었다.

    범죄자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연출하고 찍은.

    끔찍한 범죄 영상이었다.

    "후우……."

    범죄로 오늘 첫 욕구를 푼 그가 일어나며 숨을 내쉬었다.

    텁텁한 공기에 공기순환기를 돌린 뒤 어두운 방을 나섰다.

    그리고 샤워 후 옷을 갈아입은 뒤 하루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도련님."

    방을 나서자 고용된 이들이 정중히 인사했다.

    남자는, 도련님이라 불린 젊은 남자는 보기 좋은 웃음을 지으며 그 인사를 받아 주었다.

    "네, 좋은 아침입니다. 정 아주머니."

    단순히 답을 하는 게 아니라 이름과 얼굴까지 기억하는 그 태도에 고용인들은 그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좋은 집안의 잘난 아들로 태어났음에도 그런 모습이었으니 좋아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안지오.

    정계의 거물인 안민선 의원의 아들이자 정계의 자제들이 모이는 선도고의 학생회장을 지낸 스물넷 정계의 젊은 용.

    장차 거대 정당의 대표가 될 것이라 사람들이 확신하는 인재이자 무공의 경지도 낮지 않은 한 수가 있는 무림인이다.

    사회지도층에서도 핵심에서 살 것이 확실시되는 선택받은 인간.

    그럼에도 오만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아랫사람에게도 친절하고 미소를 잃지 않는다.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

    …라고 외부에서 평가받는 그에게,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는 치부가 있다는 건 당연히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비밀이었다.

    지금까지는 완전범죄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철저하게 비밀이 지켜지고 있었다.

    한데, 오늘은 마가 끼었는지 아침부터 좋지 않은 소식을 그것도 두 개나 심복에게 듣게 되었다.

    "…우릴 파는 놈들이 있다고?"

    "예."

    "그리고 그게 잠룡문이라고?"

    "…그렇습니다."

    죽을 죄라도 진 듯 보고하는 심복은 얼굴을 들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잠룡 김도진이 있는 잠룡문이 결코 밝혀져선 안 될 안지오의 은밀한 취미이자 활동에 관해 조사를 시작,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 더.

    "그놈 그거 사진 찍는 재주가 제법이었는데, 어떤 미친 마두한테 걸려서 조직이 싹 당했다고."

    "예."

    근래 그가 가장 좋아하던 '사진사'가 소속되어 있던 심부름센터가 멸문을 당했다.

    사지근맥이 다 절단된 채 발견되었다니 어떤 미친놈인지 대담하기 짝이 없다.

    어느 쪽도 좋지 않은 일이다.

    때문에 심복은 무거운 마음으로 보고를 하러 들어왔는데, 생각보다 안지오의 얼굴이 나쁘지 않다.

    "그래, 잠룡문이란 말이지. 잠룡문. 김도진……."

    그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간다.

    심복은 그 모습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관현그룹에 카자카미 가문까지 조졌던 바로 그 '김도진'과 엮이고 말았단 말이다.

    한데 어떻게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심복이 의문을 가지는 중에 안지오가 말했다.

    "경고를 좀 해야겠어."

    "경고…… 말씀이십니까."

    "그래, 경고."

    경고. 도대체 어떤 경고일까.

    어떤 경고를 할 생각이기에 이렇게 여유만만인 걸까.

    그런 심복의 의문에 안지오가 비뚜름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살수(殺手)를 보내자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