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456화 (456/741)

455화

흑도에 몸담은 자는 입이 무거워야만 한다.

무겁지 못한 자는 어떤 형태로는 제거당하기에 그것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강제되는 규율이었다.

그는 그것을 '의리'라는 단어로 포장하며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스스로를 인지할 수 없다는 것이,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일지 상상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빛조차 없는 우주에서 그저 정신만이 떠다닌다면.

아니.

그 우주라는 것조차 느낄 수 없이, 아무것도 없기에 오히려 무한한 곳에 정신만이 덩그러니 남아 언제 죽을지조차 모르는 시간을 감내해야만 한다면.

그 공포는.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그는 그런 공포를 체험했기에 무너졌다.

동시에, 눈앞에 분명히 존재함에도 보이지 않는 존재가 '공포의 근원'이라는 걸 본능으로 체감했기에 아는 것을 고스란히 실토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의, 의, 의, 의뢰를, 의뢰를! 의뢰를 받아서 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타고난 언변과 성격에 무공까지 익힌 뒤로 단 한 번도 매끄럽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혓바닥이 제대로 굴러가지가 않는다.

하필 지금!

그런 스스로의 혀가 답답하고 무서워 미칠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 그러나 분명하게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존재는 재촉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섭고 또 무섭다.

"그렇구나. 심부름센터 직원이구나."

"예, 예!"

의뢰를 받아 이것저것 일을 하는 업소를 심부름센터라고 한다.

다만 요즘에 와서는 그 의미가 나쁜 쪽으로 편향되었으니 그쪽에 종사하는 흑도가 많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흑도의 심부름센터 중 한 곳의 소속이었다.

물론 아지트를 포함한 일체의 정보는 비밀이었지만.

"안내해."

"아, 알겠습니다."

그는 공포에 절어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아지트를 향해 움직였다.

부르릉-

낡은 오토바이에 시동이 걸리고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내달린다.

보통의 경우, 이렇게 달리며 몇 분의 시간이 지날 정도면 어느 정도는 정신을 차리게 된다.

그리고 딴생각을 한다.

실제로 그는 한 번 그런 경험이 있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다리 한 짝의 감각이 여전히 없다.

그리고 그렇게 감각을 앗아간 미지의 공포가, 보이지 않음에도 분명하게 자신의 목줄을 틀어쥐고 있다는 걸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기에.

그는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시키는 대로 아지트를 향해 달려 도착했다.

오토바이의 시동이 꺼지고 그가 선 곳은 후미진 골목의 낡은 2층짜리 상가 건물이었다.

1층에는 '진상찜'이란 단어가 허연 간판에 무성의하게 쓰여 있는, 작은 창문마저 틀어막아 내부가 보이지 않는 배달 전문점이 입점해 있었는데 그 외관만으로도 굳이 들어갈 생각이 들지 않는 곳이다.

애초에 행인조차 볼 일이 거의 없는 곳이고 그렇기에 흑도의 아지트를 위장하기에 제격이었다.

그는 다리 한 짝의 감각이 여전히 없었기에 걸음을 질질 끌며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

딸랑-

후미진 밤의 골목에 유독 요란한 종소리가 울리고 카운터에 나태하게 앉아 있던 중년의 여자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녀는 흑도에 오래 종사한 인간답게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은밀히 버튼을 눌렀다.

이 바닥에서는 의심이 가면 무조건 행동해야 한다.

뒤에 씨발거리며 헛수고했음을 아는 게 일이 벌어지는 것보다 무조건 나은 것이다.

때문에 지하에 대기 중인 무인들에게 즉시 신호를 넣고서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무슨 일이야, 너."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딱. 따다다닥.

대신, 이빨과 함께 온몸을 벌벌 떠는 그의 시선이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

'뭐야 이 새……!'

아아아아악!

그 시선을 따라가 확인한 모습에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분명히 나와야 할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으니 목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동시에, 피를 철철 흘리는 그녀의 손이 분명하게 뇌에 전달해야 할 감각 또한.

느낄 수가 없었다.

"지하로 안내해."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 순간 분명하게 한 가지를 이해했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해.'

흑도의 밑바닥 인생이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나 절망, 죽음을 맞이하는 건 흔한 일이다.

중요한 건 그런 때를 맞닥뜨렸을 때 선택을 잘 해야 한다는 거다.

그녀는 본능이 경고하는 대로 목소리를 따르기로 했다.

홀을 지나 작고 더러운 방의 옷장 마지막 서랍을 여니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타났다.

둘이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가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전자 기기가 놓인 아지트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 아지트에 머물던 흑도의 무인들은 모조리, 무기를 들고 있었다.

"어떤 놈이야."

뚝. 뚝.

비상 버튼을 누르려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중년 여자가 흘리는 피냄새를 그들은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스윽.

지금껏 모습을 보이지 않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그와 그녀의 가운데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모습은 그 자체로 공포였다.

온통 시커먼 것으로 모습을 감춘 이가 말했다.

"스토킹 의뢰에 관한 모든 것. 실토해."

"이런 미친 새."

스걱.

얼토당토않은 요구에 상소리를 뱉어내던 입이 다물렸다.

비상 연락망을 이용하여 외부에 연락하려던 이의 손목에서 피가 터졌기 때문이다.

"끄윽."

힘줄이 잘렸다.

허나 문제는 힘줄이 잘렸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실행한 것이 그들이 인지하지도 못할 순간에 쏘아진 검풍이라는 것이었다.

'고, 고수……!'

그 한 수로 충분했다.

그들의 앞에 나타난 이가 그들 모두가 죽을 각오로 덤벼도 옷자락조차 스치지 못할 고수라는 걸 알기에는.

심부름센터의 사장은 그것을 분명하게 깨닫고서는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렇게 파업하려는 머리를 어떻게든 쥐어짜내 이 상황을 타파하려 했던 그는.

스걱-

"아아아악!"

"무, 무슨!"

경고도 없이 직원 둘의 양 발목에서 피가 터져 나뒹굴자 눈을 치떴다.

무언가 원하는 게 있어서 왔을 텐데 이렇게 경고도 없이 애들을 병신으로 만든다고?

아무리 하류 인생이라 해도 무공을 익혔기에 피가 터진 발목이 회생하기 어려울 만큼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는 걸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더욱 두려운 건, 그렇게 양 발목의 힘줄이 잘려 나뒹군 직원이 넘어지고 나서야 비명을 질렀다는 거다.

인지하기도 전에 당했다.

여기에 또 하나 그가 알지 못하는 것.

그것은 나뒹군 직원이 스스로의 눈으로 상처를 보았음에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명이 고통이 아닌 공포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가지 생각과 감정으로 갑자기 나타난 고수의 눈을 마주했고.

'아.'

일순 멍해졌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로서도 처음 보는 눈이었다.

하지만 그 눈이 무엇인지는,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눈은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눈이다.

아니. 단순히 그런 게 아니다.

도축(屠畜)? 그것조차 과분하다.

그저 도살(屠殺).

고기를 얻기 위해서도 아니고 단순히 참혹하게 죽여 버릴 것을 보는 눈이다.

맹세컨대 뒷골목 흑도에서도 상대를 이런 눈으로 보는 자는 없을 것이었다.

어떻게. 아무리 인성이 말살된 이라 해도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저런 눈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직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는 그런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닌 공포 그 자체였다.

"말해."

"…말하겠습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아는 것을 모두 이야기했다.

그것 외에는 그 어떤 수도 없었으니까.

"우리도 의뢰인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철저하게 비대면으로 의뢰와 보수를 주고받았습니다."

의뢰는 전용 메신저를 전용 휴대폰에 설치하여 받았다.

오직 양방향으로만 작용하는 휴대폰에 역시 의뢰를 주고받기 위해서만 기능하는 메신저를 이용했다.

보수는 메신저에서 지정한 장소에 현금으로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단 하나도, 아는 게 없었으며 이들을 통해서는 더 건질 수 있는 게 없었다.

"저희가 대상을 정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의뢰주가 지정해 주는 인물을 찍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 대상이, 이번엔 문월동에 있었던 거야?"

"예. 맞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사장의 대답에 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스르릉!

그리고 사장은 본능적으로 칼을 빼들었다.

스으으으으…….

살기(殺氣)가 내려앉는다.

분명하게 살기이지만 사람을 죽이겠다는 의지가 아닌, '고깃덩이를 도살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살기이기에 더욱 공포스러웠고 그것이 생존에 대한 집착을 끌어냈다.

"다, 다 대답해 줬잖아! 왜!"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발악하듯 외치며 무기를 꼬나쥐는 이들을 보며 고수는, 도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결코 죽이지 않는다.

도진에게 있어 죄인의 죽음이란 차라리 안식이요 도피이니까.

언제나 그랬듯.

그들에게 줄 것은 죽음이 아닌 삶에서의 끝이 없는 '속죄(贖罪)'다.

다만 이번은 평소와 결이 다르니.

스걱-

"아아아악!!"

그 속죄의 기준은 법(法)에 따르지 않는다.

스걱!

"아, 안 돼애애애!!"

* * * *

아침.

어떤 속보가 보도되었다.

-오늘 새벽 3시경 한 흑도 문파의 문도들이 잔혹한 모습으로 발견되어 관할 경찰서를 술렁이게 만들었습니다. 순찰을 돌던 무인들의 앞에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난 문도를 따라간 곳에는…….

새벽.

치안 유지 계약에 따라 순찰을 돌던 해당 구역을 담당하는 무인의 앞에 피투성이에 얼굴이 공포로 가득한 중년 여자가 갑자기 나타났다.

"아, 안 아파! 상처가 나는데 안 아파! 귀, 귀신!"

횡설수설하는 그녀를 따라가 보니 손발의 힘줄이 고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피투성이의 흑도 문파 무인들이 지하 아지트에 널부러져 있었다는 거다.

경악한 무인들이 연락을 하여 대번에 경찰과 무림맹의 무인 등이 출동했으며 그 소란으로 제법 큰 뉴스가 되었다.

무림이 있는 세상이기에 사람들의 인식 또한 과거와는 제법 달라졌다.

허나 그렇다 해도 '현대'이다.

단 한 명도 죽지 않았지만 조직의 구성원 전체가 불구가 된 채, 피투성이가 된 채 발견되는 건 결코 보통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ㄷㄷ;;

-어디 뭐 미친 마두라도 나타났나?

-마두라기엔 해충들인 흑도 조졌으니 다크 나이트 아님?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어쨌든 일대에 경계태세 떠서 지금 분위기 ㅎㄷㄷ함.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소식에 숭무고 또한 여기저기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손속이 너무 과하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어차피 세상에 해롭기만 한 흑도들을 치워줬으니 잘 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도진은 언제나처럼 기숙사 앞에서 소담을 만났다.

이제 저물어가는 벚꽃길은 그렇기에 더욱 흐드러지는 연분홍이어서 절경이다.

그 길을 함께 걸으며, 소담이 문득 도진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응. 왜?"

약하지만 간절하게 잡은 손끝에 도진이 웃으며 소담과 눈을 맞추었다.

소담이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 아?"

"응, 괜찮아."

걱정스런 물음에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소담의 깊은 눈동자에 담긴 불안은 해소되지 않았다.

다르다.

지금껏 알고 보아온 도진과는 무언가가, 분위기의 결이 조금 다른 것을 소담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걱정스런 눈동자로 도진을 보고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소담의 모습에 도진이 완전히 몸을 돌려 마주하고선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옷소매를 잡았던 손을 마주잡아 준다.

단단하게.

"나는 너에게 화내지 않을 테니까."

"나는 너에게 항상 웃어줄 거니까."

"변하지 않을 거고, 계속 지금처럼 있을 거니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도진의 약속에 소담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도진은 웃으며 다시 몸을 돌려 걸었다.

잡았던 손을 계속 잡은 채로.

그 손에 이끌려 걸으며 소담은 고개를 푸욱 숙였고 붉어진 얼굴로 생각했다.

'반칙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