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화
-제법이구나.
도진의 눈으로 지켜보던 위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에 깃든 그 도(道)이자 심(心).
무도(武道)란 피상적인 기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도이자 마음이 깃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강거혁은 기(技)에 그 마음을 담아냈다.
위지혁이 보는 현대의 무론(武論)은 과연 감탄할 만한 부분이 있었다.
그가 살던 시대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지식이 있었고 그것이 과학이 되어 세상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바꾸어 놓았다.
그 지식이 무공에도 발휘되어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으니 대표적인 성과 중 하나가 전음과 비슷한 효과를 가지되 압도적으로 난도가 낮은 섭음술이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명암이 있는 법이고 무공에서도 바로 그 과학이 독이 되어 버린 부분이 있었으니 기(技)를 오직 식(式)으로만 분석하려 든다는 것이다.
무공을 무술(武術)로만 보고 무도(武道)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무공은 신비의 영역에 이르기가 지난하니 마음과 이치가 깃들지 않은 기술에는 신비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다.
강거혁은 그것을 해냈다.
그것을 해냈기에 강거혁의 무공은 한 차원 높은 신비의 영역에 이를 수 있었다.
단순한 기술이 아닌 마음이자 이치가 근본에 녹아들었고 그것이 모든 기술에 영향을 미쳐 신비를 자아내는 것이다.
"크흑!"
분명히 거대하고 또 거대했던 공태식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작아 보인다.
그는 여전히 태산처럼 거대함에도.
그를 마주하는 강거혁의 기세가 마치 바람처럼.
세상을 가득 채우고 살랑이는 바람과 같아 겉으로 보이는 거대함을 무색하게 해 버리는 것이다.
허허롭기에 동시에 거대하다.
그것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인식한 공태식이 이를 악물고서는.
꾸웅-!
강하게 진각을 내딛었다.
"흡!"
"윽."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하게 터져 나온 기세가 비무대를 넘어 학생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동시에.
"어, 어어?"
"헉!"
지켜보던 이들이 경악했으니 기세를 줄기줄기 흘리고 있는 공태식의 주먹에, 유형화된 기가 감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형화된 기.
그것은 현대에서 현실이 된 신비인 '권기(拳氣)'였다.
"궈, 권기? 어어?"
"서, 설마 공태식 노사님이 경계를 넘으신 거야?"
유형화된 기를 두르는 것은 오로지 경계를 넘어선 이만이 가능한 영역이다.
흔히들 그렇게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모두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경계를 넘어선 이는 넘지 못한 이와 완전히 차별화되며 결코 범접할 수 없는 격차가 그 사이에 있다.
그러니까 이 승부는 공태식이 권기를 보여 준 시점에서 이미 결판이 나 버렸다고.
모두는 그렇게 생각했다.
강거혁이 부드러운 미소를 띤 그대로 말했다.
"자네, 벌써 그런 경지에 도달했나?"
공태식이 강거혁의 물음에 표정에 여유를 씌우며 답했다.
"세월이 얼만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친구."
"하하. 그렇군. 그렇지."
공태식의 대답에 강거혁은 고개를 주억였다.
예전이라면 그 대답에 애써 티를 내지 않으면서, 그렇기에 더욱 속에 화가 쌓였을 텐데.
이제는 전혀 그런 걸 느끼지 않으니 참으로 제자가 고맙고 스스로가 대견스럽다.
그리고 동시에 꿰뚫어 보았다.
저것은 분명한 권기이지만, 그것을 구사하는 공태식은 아직 경계를 넘지 못했음을.
-놈의 무공과 자질도 나쁘지는 않구나.
-그렇습니까?
위지혁은 도진의 물음에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뒤에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으니 도진 또한 신안(神眼)으로 다 보았기 때문이다.
저것은 고급 무공의 힘을 빌려 구현한 권기다.
그러니까 순수한 경지의 결과가 아니라 무공의 초식이 힘을 보태어 구현한 '기술'의 영역이란 말이다.
-이 세상에서도 오래 지나지 않아 검기의 위상이 제법 낮아지겠구나.
장호의 말대로였다.
무공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기술의 난도는 낮아지게 된다.
그것은 검기조차 예외가 아니어서 발전한 무공은 시전자의 미숙함을 더 많이 메꾸게 되고 검기에조차 이르게 해 주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아직 조금 먼 이야기였고 그렇기에 공태식의 권기는 부정할 수 없이 대단한 것이었다.
초식의 힘을 빌렸다지만 그것은 '조금'이었다.
즉 공태식은 경계의 너머를 분명히 볼 수 있는, 그 문턱의 앞에 있었고 아주 조금 모자란 부분을 초식의 힘을 빌린 것이다.
…본래는 아주 화려하게, 철저하게 계산하여 가장 빛날 수 있는 순간에 보여 주려 했다.
이를테면 숭무고를 완전히 짓뭉개고 무화고가 대한민국 최고의 교육 기관임을 증명하는 순간에.
동시에 그것을 증명하는 게 자신이 될 수 있도록.
하지만 그것은 물건너가 버렸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평생 자신의 아래에 있던 놈이 자신의 머리 위로 기어올라 가려는 것만큼은 제지해야 했다.
그런 생각으로 공태식은 온 힘을 다해, 평생의 내공을 다 그러모아 주먹을 내질렀고.
거기에 강거혁 또한 정면에서 마주 주먹을 내뻗었다.
'어리석은…….'
공태식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득의양양함이 배어난다.
하지만 아니었다.
강거혁은 깨달았으니까.
스승님이 말씀하셨던, 더 좋은 무인이 될 것이라던 그 말씀의 뜻을.
거신공은 '타고난 자'의 무공이다.
그 기원이 그러했으며 전수자들 또한 그러했다.
그렇기에 타고나지 못한 자로서의 경험이 없었다.
그 경험이 없었기에 그저 강한 자로서의 생각과 이치만이 거신공에는 깃들어 있었다.
'더 강한 자'에게 맞서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강거혁이 알고 있으니까.
스승이 바랐던, 깨우치길 바랐던 것을 깨우칠 수 있었다.
그것을 가능케 해 주었던 제자에게 전수하기 위해 궁구한 그것을.
제자에게 보여 주기 위해 강거혁은 내뻗었다.
'미안하구먼, 친구. 하지만 어쩌겠나. 소중한 제자가 지켜보는 비무이잖나. 양보는 못 해 주겠어.'
거신공(巨神功). 격발(激發).
꽈아아아아아앙-!!
* * * *
격발은 체내의 내공을 폭발시키듯 운용함으로써 가진 내공 이상의 힘을, 그것도 순간적으로 터뜨리는 내공 운용법이다.
강거혁은 그것을 그저 '육체를 타고난 이를 위해 개발된 운용법'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 그것을 '약자가 강자를 이기기 위한 수법'으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고 그 발상의 전환에 이치가 깃들어 더 강한 자를 이기기 위한 수법으로써도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이 정면 대결에서도 공태식의 주먹을 강거혁이 이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심지어 주먹의 맞부딪침에서도 말이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도진은 강거혁의 주먹에도 분명히 찬란한 빛이 맺혔음을 놓치지 않았다.
"어서 의무실로 모셔 가게나."
폭음과 함께 공태식은 비무대 밖으로 포탄처럼 튕겨 나가 처박혔다.
비무장이 경악과 혼란으로 점철된 가운데 강거혁은 조용히 말했고 그에 무화고의 학생들과 교류회 직원들이 공태식을 의무실로 옮겼다.
"그리 다치진 않았을 거야. 그 친구 단단한 거야 자네들이 더 잘 알지 않나."
강거혁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고 실제로 어마무시했던 폭음과 달리 공태식의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육체는 말이다.
그렇게 소식이 전해진 뒤 비무는 계속되었고 결과는 숭무고의 압승이었다.
무화고의 수준은 과연 높았으나 숭무고의 수준 또한 높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앞서 인솔 교사 간의 비무 결과가 멘탈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으니 더더욱 일방적인 비무 결과가 나왔다.
첫 타자로 태종훈이 나섰는데, 피지컬이 돋보이는 무화고의 학생을 마주해 오히려 더 진한 인상을 보여 주었다.
단순히 몸이 좋다는 게 아니라 더 거칠고 포악하다는 걸 상대가 본능의 영역에서 느끼게 만드는 기세 때문이었다.
상대는 시작도 전에 기선을 제압당했고 당연히 패배했다.
두 번째로 나선 학생 또한 이문호가 격차를 보여 주며 승리했는데, 그럼으로써 3전 2선승의 규칙에 따라 숭무고가 승리했다.
인솔 교사 간의 비무 결과는 포함하지 않고 엔트리에 이름을 올린 학생들 중 먼저 2승을 올린 쪽이 승리하는 룰이었다.
공태식의 제자인 허성호가 나서지 않았고 1학년들끼리 승부하여 숭무고가 압승한 그림이 되었다.
그리고 이날 공태식과 강거혁의 비무는 당연히 세상을 뒤흔들어 놓았다.
-헐 ㅁㅊ 무림 르네상스 피지컬 투탑이 동시에 경계를 넘었다고?
-ㄷㄷㄷㄷㄷ 머임. 레알루다 무림엔 은거이사가 모래알처럼 많다 그거임? 사실 알려진 것보다 경계 넘은 고수가 존니스트 많은 거 아님?
-아니 ㅋㅋ 오바들 좀 하지 말고 ㅋㅋㅋ;;
-내가 숭무영재고 다니는데, 다른 교수님이 말씀하시길 경계를 넘지는 못했어도 그 근처에 도달하면 좋은 무공의 힘으로 권기를 구사할 수도 있대. 실제로 그런 고수들 이야기도 제법 있잖아?
-아, 그런 거임?
-ㅇㅇ 아는 애들은 다 아는 이야기임. 물론 그것도 전나 대단한 거 맞음 ㅋㅋ
이 시대에 검기를 포함한 유형화한 기의 구사는 경계를 넘어선 초인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사실 발전한 시대를 아직 인지하지 못했기에 유지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이번 일로 깨어지게 됐다.
경계를 넘지 못해도, 그 언저리에 도달한 무인이 수준 높은 무공을 익히고 있다면 그 힘을 빌어 유형화된 기를 구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제법 퍼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된 사건의 주인공인 공태식과 강거혁의 명성이 드높아졌음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여기서 과거 항상 승리자였던 공태식과 패배자였던 강거혁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한 부분이었다.
* * * *
두 노고수의 이야기로 들끓었던 토요일이 지나 주말의 끝인 일요일이 왔고 비무 대회의 2일차가 되었다.
제법 빠르게 진행된 비무 대회였기에 오후에 숭무고의 차례가 돌아왔고 그 상대는.
"……."
"……."
제법 죽상인 학생들이 여럿 섞여 있는 수성고등학교였다.
"와, 탈락 확정이네."
"대진운이 그런데 어쩔 수 없지."
섭음술로 남일이라고 학생들이 맘 편히 수군거린다.
다만 그 내용을 부정할 수는 없었으니 수성중고가 그 재력을 바탕으로 제법 수준 높은 학생들이 포진하고 있다지만 '무력파'로 분류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수성고의 상대로 무려 숭무고가 올라왔으니 결과는 명약관화한 것이다.
때문에 먼저 나선 수성고의 인솔 교사는 다 내려 놓은 얼굴로 나섰고.
"수고하셨습니다."
한 수 배운다는 마인드로 비무에 임해 최선을 다하고선 웃는 얼굴로 포권을 하고 내려갔다.
그리고 학생들의 차례.
누가 먼저 나서느냐로 눈치 싸움이 벌어지려던 차에 시크한 얼굴로 앞에 나서는 여학생이 있었으니 예의 도진도 잠깐 시선이 갔던, 유독 돋보이는 여학생이었다.
그 여학생이 비무대 위에 올라오더니 시선을 도진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기, 김도진 선배님이 올라와 주시면 안 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