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화
스윽-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었다.
"정신이 들어?"
그리고 시야 한구석에서 빛을 가려 그늘을 만드는 얼굴이 보였다.
찰랑이는 머릿결에 단정한 얼굴.
단순히 예쁜 게 아니라 특별한 예쁨이 엿보이는 그 얼굴의 주인은 예고의 성격이 강한 화명고등학교의 여학생이다.
'어, 뭐지?'
내가 얘랑 놀다 어디서 잠이 들었나?
아직 제대로 돌지 못한 머리가 잠시 그런 생각을 했고.
'……!'
욱신-!
몸을 일으키려다 느껴지는 전신의 통증이 급속히 느리던 머리의 RPM을 올리게 만들었다.
"어, 갑자기 움직이려고 하면 아플 거래."
마치 절굿공이를 전신으로 쳐맞은 반죽이 된 것만 같은 욱신거림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필름이 끊기기 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이너 슈트의 성능을 보여 주기 위해 성지인의 주먹을 몸으로 받았고.
…필름이 끊겼다.
'아. 씨발…….'
그 말 밖에 떠오르지가 않았다.
만약 평소에 픽업 아티스트로서 남에게 보여주는 모습을 철저하게 컨트롤하는 연습을 해 두지 않았다면 여학생이 보는 앞에서 소리내어 그것을 말했을 것이다.
그만큼 골때리는 상황이었다.
번듯한 계획이 있었다.
자신이 추진하여(그리고 아랫사람들을 부려) 진행한 일이었다.
아버지도 흡족해 한 성능이었던 슈트를 이번 교류회를 기회로 홍보하여 괜찮은 실적 하나를 더할 생각이었는데.
꼴이 너무 우습게 돼서 뭐라 해야 할지도 모르게 됐다.
"그…… 일은 잘 수습됐어. 사람들도 진짜 괜찮은 물건이라고들 하더라."
"…그래."
사실 이 여학생도 감우상이 썸을 타는 여럿 중 한 명이자 준비된 게스트로 이너 슈트를 홍보하기 위한 현장 광고의 합을 맞춰 두었었다.
한데 그것마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여학생은 감우상을 위로하기 위해 반응이 제법 긍정적이며 홍보도 모로 가긴 했지만 어쨌든 서울로 갔다고 잘 됐다는, 단순 위로가 아닌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지만 그걸로 감우상의 금이 가 버린 프라이드가 회복될 수는 없었다.
수많은 것들을 단 두 글자로 함축해 주는 단어만이 머릿속을 채운다.
'아. 시발…….'
* * * *
감우상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었다.
그 점심을 즐기는, 바로 옆에 앉아 성지인을 챙겨 주는 윤상미의 얼굴이 제법 밝았다.
"자. 이것도 먹어."
"네, 네에. 감사합니다."
홍보 부스에서 있었던 성지인의 한 방이 그렇게 상미의 얼굴을 밝게 만들어 주었다.
성질 대로 쏘아붙일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 화로 쌓이던 상미였다.
그렇게 쌓인 화를 성지인이 '명존쎄'로 시원하게 풀어 주었다.
뭐 진짜 명치를 '존나 세게' 때린 건 아니었지만 대신 아랫배를 겁나 세게 때려서 애가 정신줄을 놓게 만들었으니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뭐, 이런 그림을 그린 건 아니었지만…….'
도진도 슬쩍 웃으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상미가 그랬듯 당사자인 성지인 역시, 오히려 당사자이기에 말로 하지 못한 것들이 더더욱 속으로 쌓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것을 당장 표현하지는 못하고 조금씩 조금씩 쌓여 이윽고 폭발하는 형태가 되지 않을까 했는데…….
이렇게 예상치 못한 형태로, 예상보다 훨씬 빨리, 그것도 주먹으로 표현하게 될 줄이야.
역시나 계획이란 건 현실에서 여러가지 변수로 인해 달라지기 십상이었다.
물론 이런 형태의 변수는 얼마든지 환영이다.
흔히 하지 못할 경험은 그만큼 큰 경험치가 되니까.
그 경험으로 조금 들뜬, 그리고 대놓고 즐거워하는 이들의 분위기를 지금은 즐기게 두었다.
"아, 저는 조금 일이 있어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저도 같이 좀 다녀오겠습니다. 점심시간 끝나기 전엔 돌아오겠습니다."
이문호와 태종훈이 이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문호는 교류회와 관련하여 일이 있는 기색이었고 바늘 가는 데 실 간다고 태종훈도 따라나선 것이다.
그렇게 불편한 이들이 빠졌던 점심시간이 끝나고 다시 모든 인원이 모였다.
여기에는 감우상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제법 표정 관리를 잘하는 모습이었다.
오전에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고 관대한 도진은 굳이 그 부분을 찌르지 않고 일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후에는 홍보 부스 구경을 계속하는 걸로 괜찮겠지?"
"예."
오늘 하루는 홍보 부스 구경으로 스케줄을 모두 채우기로 했다.
볼 것은 아직 많았고 그렇게 구경으로 하루를 채우는 게 좋을 거라 도진은 생각했다.
그래.
분명히 아직은 업계의 물품들이 부족한 게 많다.
-존나 병신 같은데?
-당장 사자!
같은 분위기의 물건들이다.
흥미가 가고 당장 보기에 좋아 보이지만 막상 실제로 쓰려 하면 여러가지 구멍이 숭숭 나 있는.
하지만 그렇기에 계속되는 관심과 피드백 속에서 업계는 급속히 성장한다.
도진이 기억하는 미래에는 한국 역시 시류에 편승하여 학생 때부터 그렇게 발전한 물품들의 사용을 전제로 한 커리큘럼이 갖춰질 만큼.
그러니까 미리부터 이런 것들을 경험하여 두면 좋다.
'클로에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클로에 덴젤은 그렇게 발전하는 업계에 밀접하게 연관되는 공방계의 사람이자 서양의 문화에서 배운 학생이었기에 도진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아쉽게도 클로에는 바빴기에 함께하지 못했다.
다른 이들도 그랬지만 우서진과 클로에 역시 각자 집안에서의 일과 수련으로 스케줄이 워낙 빡빡했던 것이다.
클로에의 경우 차라리 도진의 도움이 짧은 주기로 필요했다면 시간이 났을 텐데 이제는 혼자서도 진도를 나갈 수 있을 만큼 수련이 궤도에 올랐기에 그러기까지 미뤄 두었던, 밀렸던 것들을 처리하느라 더욱 바쁜 시기였다.
'대용이도 그렇고.'
이번 교류회에 참가한 기업 중에는 오성의 계열사도 있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계열사이니 오성 하이테크로 발령난 뒤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오대용이 올 일은 없었다.
"그럼 오후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주말에는 어떻게 할까?"
"비무는 어떻습니까?"
의견을 낸 건 이문호였다.
도진의 시선이 향하니 이문호가 말을 이었다.
"내일부터 주말간 비무 대회이지 않습니까. 상품도 좋은 편이니 참가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응, 그러네."
이문호의 말에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그램 중엔 당연히 비무 대회도 포함되어 있었다.
길게 이어지는 건 아니고 주말,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간 진행되는 것이었는데 오늘까지 참가 신청을 받아 토요일 오전까지 대진표를 확정, 진행하는 일정이다.
만약 비무가 길어진다면 월요일까지도 진행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고 했다.
'용봉지회'하면 비무가 그 꽃이니 나쁘지 않다.
실전만큼은 아니라 해도 타인과의 비무는 그 자체로 크나큰 경험이자 성장의 양분이 되어 주니까.
그 경험이 특히 많이 필요한 시기인 성민혁과 성지인은 필참이다.
다만 한 가지 슬쩍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으니.
"참가 현황은 어때?"
도진의 물음에 이문호가 바로 답했다.
"웬만한 상위권 학교는 다 신청을 한 것 같습니다."
"오, 그래?"
조금은 의외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대한민국 부동의 1위라는 숭무고가 왔는데.
그 참가 여부를 따질 것도 없이 상위권 학교가 이미 다 신청을 했다는 것이 조금은 의외였던 것이다.
그런 도진의 생각에 답하듯 태종훈이 말했다.
"그쪽 입장에서는 숭무고가 이번 비무에 꼭 참여하길 바라고 있을 겁니다."
"그래?"
"예. 이름을 날릴 기회이니까요."
태종훈의 말은 그것이었다.
숭무고가 대한민국 부동의 1위라고 하지만 그것을 모두가 인정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상위권 학교일수록 경쟁심을 불태우며 그 이름을 빼앗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능력이 되면서도 숭무고에 가지 않는 학생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이유로 숭무고가 아닌 다른 명문 무림고를 택한 학생들 역시 있다.
'평범한 숭무고의 한 명'이 되기보다 '명문 무림고의 1등'이 되기를 바라는 학생도 있고 말이다.
그러니까 '숭무고라고 뭐. 내가 더 센데.'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여타 명문 무림고에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걸 증명할 기회라고 생각하며 그들은 비무 대회에 참가 신청을 넣었다는 말이다.
그런 배경으로 상당히 치열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번 비무 대회에는, 제법 특이한 부분이 있었으니 학생들만이 아닌 인솔 교사 또한 참여한다는 것이었다.
뭐 여러가지 의도를 가지고 설정한 룰이었을 텐데 도진은 괜찮은 룰이라 생각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강 노사님."
"나쁠 것 없지."
강거혁은 허허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 또한 어디가서 비무를 거절할 성격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강거혁에 벽태웅, 이문호, 태종훈, 그리고 성민혁과 성지인까지 참여 서류에 이름을 기입하던 중 강거혁이 물었다.
"자네는 안 나갈 텐가?"
슬쩍 웃으며 묻는 말에 도진이 아하하 웃었다.
"저도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제가 끼기엔 좀 그렇네요."
도진은 3학년이면서 사실상 이미 학생이 아닌 무림인이라 해야 했다.
그런 입장에서 어떻게 '애들 싸움'에 끼겠느냔 말이다.
전생을 포함한 나이도 나이이고 그 경지도 그렇다.
그래서 숭무고의 비무 대회 참여 멤버는 인솔 교사 강거혁에 다섯 명의 학생으로 추려졌다.
* * * *
주말동안 진행될 예정의 비무 대회 참가 학교 중 강력한 우승 후보는 둘로 좁혀졌다.
첫 번째로는 단연 숭무고다.
대한민국 부동의 1위 무림고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숭무고였으니 강력한 우승 후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 안에 도진과 상미가 없다 해도 말이다.
여기에 인솔 교사인 소거인 강거혁 또한 무림 르네상스 시절부터 이름을 떨친 맞설 자가 드문 고수다.
그리고 두 번째가 바로 강거혁의 친구인 태산 공태식이 인솔 교사로 온 무화고였다.
높은 무공 실력에 더해 특히나 돋보이는 피지컬을 특징으로 하는 학생이 많은 무화고는 손꼽히는 명문 무림고로 이번 교류회에 참가한 학생들 중에서는 숭무고를 제외하고 가장 기세가 돋보였으니 자연스레 우승 후보로 꼽힌 것이었다.
그리고 토요일 오후 비무 대회 당일.
온전히 랜덤으로 완성된 대진표는 무슨 운명의 장난이었던지 첫 번째 대결부터 하이라이트 매치였으니.
숭무고 vs 무화고.
강력한 우승 후보인 두 학교의 대결이 되었다.
"와, 개쩌네."
"그러게. 시작부터 숭무고 대 무화고가 되네."
웅성거리는 가운데 넓은 비무대 위로 가장 먼저 오르는 건 학생들이 아닌 인솔 교사로 온 두 노고수였다.
소거인 강거혁. 그리고 태산 공태식.
무림 르네상스 시절, 그러니까 20년도 더 전에 이름을 떨쳤던 두 고수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다시 마주한 것이다.
"옛날 생각 나는구먼."
공태식의 말에 강거혁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게나 말이야. 참 오래된 일인 것 같아."
"하하! 아직 칠순 잔치도 안 했는데 그러면 안 되지."
우렁우렁한 소리로 공태식이 웃고선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면 옛날엔 참 우리끼리 대련도 많이 했는데 말이야."
"그랬지."
옛 추억을 말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역시나 악질이었다.
그 옛날. 대련에서 강거혁은 단 한 번도 공태식을 이긴 적이 없었으니까.
지금 마주한 두 사람의 어찌할 도리가 없을 정도로 현저한 격차를 보이는 체급차가 그대로 반영되어서.
"그럼, 잘 부탁함세."
"나야말로 잘 부탁하네."
"시작!"
쾅!
그 '즐거운 추억'을 곱씹으며 공태식은 시작부터 강렬한 주먹을 내뻗었고.
꽈아아앙-!!
그 주먹을, 자그마한 강거혁이 정면에서 맞받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