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도진 일행은 고급스런 유니폼을 차려입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홀로 이동했다.
홀은 흔히 '상류층의 파티'라고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구조를 따라가고 있었다.
테이블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호화로운 음식들을 뷔페 형식으로 준비하여 원하는 것을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는.
다만 그것이 전형적이지 않도록 고급스럽게 준비했다는 데서 차별화된 것이 돋보인다.
"각자 다른 거 덜어와서 나눠 먹을까?"
"네."
도진의 제안에 따라 중복되지 않도록 여러가지를 덜어와 나눠 먹었다.
이문호와 태종훈, 감우상 3인방도 거기에 일단은 섞였다.
이문호와 태종훈이 조금 어색한 반면 감우상은 씨익 웃으며 먼저 이야기를 건네곤 했으니 좋게 말하면 친화력이 좋은 거고 나쁘게 말하면 뻔뻔한 모습이다.
그렇게 음식을 즐기는 사이 이번 글로벌 무림학교 교류회를 연 주최측이 등장해 마이크를 잡았다.
"반갑습니다, 차세대 무림을 이끌어갈 후기지수 여러분들. 저는 화랑재능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
60대의 고급 양복을 차려입은 남성이 자신의 소개를 시작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글로벌 시대에 어쩌구, 한국 또한 발 맞춰 어쩌구로 시작하는 그것은 소위 말하는 '교장의 연설'을 연상케 한다.
다들 비슷한 감상이었던지 눈은 향해 있지만 귀는 닫혀 있는 모습들이다.
다행히 무대 위에 선 이사장은 그런 학생들의 기색을 느꼈던지, 아니면 본래 그런 구태의연한 말들로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던지 본론으로 들어갔다.
도진은 그 성격상 '좋은 청자'였기에 시작부터 이사장의 말을 경청해 주었고 이번 글로벌 무림학교 교류회에 관해 간단히 정리할 수 있었다.
이미 책자를 통해 파악했던 대로 이번 교류회는 여러가지 콘텐츠를 준비하고 참가자들이 개중 마음에 드는 것들을 선택하여 참가할 수 있도록 해 두었다.
"뭐부터 볼까?"
그래서 도진은 인솔 교사로 왔되 학생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강거혁 대신 나서서 후배들을 보며 물었다.
가장 먼저 의견을 말한 건 감우상이었다.
"기업 홍보 부스에 가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괜찮네."
미운놈이었으나 의견은 도진과 일치했다.
도진 또한 기업 홍보 부스에 먼저 가 보는 게 좋겠다 싶었던 것이다.
도진이 고개를 끄덕이니 대부분의 멤버도 고개를 끄덕였기에 그렇게 숭무고는 기업 홍보 부스로 향하게 됐다.
기업 홍보 부스.
말 그대로 기업의 홍보를 위해 마련된 곳이었는데, 이번 교류회를 밀고 있는 이들 또한 중요 아이템으로 생각하는 곳이었다.
이곳은 단순히 기업 자체를 홍보하는 게 아니라 기업의 상품을 홍보하는 곳이었으며 그 상품은 국내보다는 외국의 것들에 치중되어 있었다.
목적은 그것이다.
국외의 '무림 관련 물품'을 수입해 와 고급화 전략으로 판매한다.
그 홍보와 판매의 장이 될 교류회는 그렇기에 중요했다.
"부스트 건틀렛(Boost gauntlet)이라는 상품입니다."
안내 직원이 학생들의 시선에 프로페셔널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하는 건 장갑에 여러가지 장치가 달린 물건이다.
"특정 동작을 트리거로 입력하고 이렇게, 차징이 된 상태에서 활용하시면."
안내 직원이 그 장갑을 직접 끼고 사람 형태의 더미에 주먹을 내질렀다.
꽈앙-!
"강력한 추진력을 이용하여 강화된 공격이 가능합니다."
마치 내지르는 주먹에 부스터를 단 듯한 효과였다.
속도는 곧 힘. 장갑에서 말 그대로 부스터가 작동돼 주먹의 속도를 더했다.
여러 부스에서는 이런 느낌의 제품들이 가득했다.
학교 안에서 볼 일이 드문 그것은, 무림인의 전투력을 높여 주는 과학의 산물들이다.
서양 무림에서는 이런 발명품들이 상당히 활성화 되어 있었으며 학생들 또한 무복처럼 일상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한국의 무림에서도 도움이 되는 여러 발명품들이 일상화되어 있었는데 학생들 사이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 건 문화,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정말로 단단한 방어구가 있다고 하자.
일격필살의 한 수를 가지고 있는 무인이 그 방어구를 착용한다면 웬만한 공격을 몸으로 받으며 기회를 만들어 상대에게 그 일격필살의 한 수를 꽂아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동양에서는 대체로 이렇게 생각한다.
당장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방어구에 의존하게 되고 무공의 발전에도 저해가 되지 않겠는가.
허나 서양은 관점이 다르다.
전력의 상승이 되고 그 방어구를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무공을 발전시키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하고.
극단적으로 압축한 것이지만 대체로는 이런 느낌이다.
때문에 서양에서는 그런 발명품들을 학생 시절부터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만 동양에서는 우선 학생 시절엔 도구에 의존하지 않고 무공 그 자체에 집중하는 쪽으로 교육을 하는 것이다.
한국은 그러니까 학생 시절엔 순수하게 무공을 수련하고 사회에, 본격적으로 무림에 나가면 이와 관련한 부분을 '취업 연수'와 같은 형태로 따로 교육을 받곤 한다.
도진은 어느 쪽이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문에 '중용'을 택했다.
무공의 근본적인 부분을 궁구하되 이런 것도 있다는 걸 알려 주어 사고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다.
그렇게 여러 제품을 구경하던 중 성지인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응, 왜?"
말을 받는 건 어느새, 은근슬쩍 성지인의 옆에 붙어 있던 감우상이다.
성지인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으나 꺼낸 말이었기에 이어서 말했다.
"좋은 제품들 같은데 무림에서 이런 것들이 활발하게 쓰이는 건 못 본 거 같아요. 우리나라가 특히 그런 건가요?"
"좋은 질문이야."
굳이 성지인이 존대로 물었으나 감우상이 나서서 말했다.
"분명히 이렇게 보면 상당히 도움이 될 거 같은데 정작 무림에서는, 사실 서양에서도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고수들은 이런 걸 잘 사용하지 않아."
"왜냐. 이유는 간단해. 그 사람들에게는 효율이 나오지 않거든."
정답이었다.
아직 무림과 관련한 이런 발명품들은 '효율'이 부족했다.
당장 처음으로 봤던 부스트 건틀렛만 해도 그렇다.
실력이 부족한 무인들에게야 좋은 무기가 될 수 있겠지만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그걸 쓰는 것보다 스스로의 주먹을, 내공을 쓰는 게 바로 그 '효율'면에서 더 나았으니까.
파괴력이야 조금 더 올라가겠지만 그로 인한 밸런스의 파탄이 오히려 손해로 이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발명품은 업계가 제법 활성화된 것과 별개로 의외로 무림에서 그리 활약하고 있지 못하다.
아직 조금 더 발전할 필요가 있는 단계였다.
"그렇구나……."
감우상의 설명에 성지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연스럽게 반보 움직였다.
거리를 좁히려는 감우상의 시도를 무위로 만든 것이었다.
몇 번이나 반복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진의 곁에서 상미가 전음으로 말했다.
-자꾸 추근덕대네요.
도진이 슬쩍 웃으며 답했다.
-응, 그러네.
-정말 뻔뻔한 거 같아요.
불행했던 과거에 일진 양아치들이 얽혀 있었기에 이문호 패거리를 한 마디로 '극혐'하는 상미였다.
이는 성민혁과 성지인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런 성지인에게 치근덕거리는 '픽업 아티스트' 감우상이었으니 상미의 말 그대로였다.
다만 도진이나 상미가 굳이 나서서 말을 하는 것도 뭐한 상황이었으니 감우상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게 컸다.
집행부 입부가 결정되고 집행부실에서 머물게 되면서 감우상은 성지인에게 추근덕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노골적이라면 한 마디 하겠는데 감우상은 그런 면에선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음으로써 무언가 지적하거나 문제로 비화되지 않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지인의 성격상 이런 미묘한 선에 걸친 문제에 관해 강하게 말하지 못하는 게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괜찮아. 일단은 지켜 봐.
도진은 상미를 다독이며 그렇게 말했다.
언제까지고 성지인을 아기처럼 품에 안고 모든 걸 해결해 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이런 미묘한 일에도 잘 대처하는 방법까지 배울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교류회에 성지인을 데려온 것이었다.
"다만 한 가지, 무림에서 누구나 쓴다고 할 정도로 쓰이고 있는 물품이 있으니 바로 이거! 이너 슈트야."
그렇게 감우상의 끈덕진 추근덕거림을 성지인이 말없이, 완벽하게 피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발이 멈춘 곳이 이너 슈트를 취급하는 곳이었다.
이너 슈트.
이미 세계 장인 박람회에서 본 적이 있는 물건이며 도진이 '플랙스'하여 설탕파 토벌 작전 때 지급했던 장비이기도 하다.
고급 제품은 방탄·방검의 효과를 가지고 있으며 충격 흡수나 상처가 난 부위의 압박 기능까지도 보유하곤 하는 현대 과학의 정수 중 하나.
때문에 서양은 물론이고 동양에서도 '육식계'에 종사하는 무인이라면 무조건 구비하고 있어야 할 필수품의 영역에 있는 것이 이너 슈트였다.
감우상은 그 부분을 짚어 가며 부스의 이너 슈트 하나를 들고선 말했다.
"이건 우리 집에서 수입한 물건인데요."
그렇게 말하는 감우상의 위로 보이는 부스의 간판에는 '감화 글로벌 로지스'라고 쓰여 있다.
감화 글로벌 로지스의 위로는 감화물산이 있으며 감화물산은 감우상의 집안인 현화 그룹에 속해 있으니 그 말대로였다.
감우상은 직원을 대신하여 이너 슈트를 들고서 설명했다.
"기존의 이너 슈트는 방탄과 방검, 그리고 움직임에 제한이 되지 않는 부분에만 집중해 왔잖습니까. 그런데 이건 좀 다르더라구요. 저도 직접 미국에 있는 본사에서 본 건데, 놀랍게도 호신강기의 기능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음?"
"어?"
감우상의 말에 여기저기서 함께 보던 학생들이 놀람이 담긴 목소리를 흘렸다.
그만큼 '호신강기'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컸다.
호신강기(護身罡氣).
말 그대로 몸을 지키는 강기로 일반적으로는 몸 주위에 방어막처럼 강기를 두르는 형태로 묘사된다.
마치 코팅을 하듯 몸에 두르는 형태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어쨌든.
이 호신강기란 건 아직 '소설의 영역'에 있는 수법이었다.
애초에 강기란 것 자체도 실제다 허구다 말이 나오는 판인데 호신강기는 차례가 멀었다는 말이다.
다만 호신기(護身氣)라고 해서 몸에 내공을 돌려 충격을 흡수하는 등의 수법은 실제로 경지에 이른 고수들 사이에서는 '패시브'처럼 사용되고 있다.
감우상이 집중된 시선에 씨익 웃으며 말했다.
"뭐, 호신강기는 사실 과대광고구요. 호신기의 기능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좀 자세히 이야기해 줘 봐요."
구경하던 여학생 중 하나가 채근한다.
감우상이 거기에 흥이 더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게 그러니까 특수한 공법과 재료가 더해져서 내공을 흡수할 수 있거든요? 근데 이게 내공을 흡수하면 단단해진단 말예요. 그럼 어떻겠어요? 방어력이 더 높아지겠죠? 그러니까 그게 호신기 역할을 한다 이 말이죠."
"오……."
"진짜 그런 게 있어?"
사람들의 높아진 흥미가 커지는 웅성거림으로 나타난다.
그 주목에 감우상이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어선 그 시선을, 성지인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어때. 한 번 입어볼래?"
그렇게 수작을 거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