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화
한국이 연신 설탕파 토벌로 인해 떠들썩한 때.
아마도 당분간은 그 이슈가 계속될 시기에 무형독이나 잠룡문이 아닌 '황룡 벽태웅'에 관한 관심이 더 큰 곳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벽태웅이 나고 자란 보육원이다.
조금은 먼, 혹은 다른 세상 이야기인 무형독이나 잠룡 김도진이 아닌 함께 나고 자랐으며 한솥밥을 먹은 식구였던 벽태웅이 더 가까운 곳이 바로 그가 자란 보육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벽태웅이 방문했을 때 아이들의 시선이 유독 더 진하게 다가온 것이었다.
자그마한 아이 몇몇이 와아아아, 하면서 달려오고 이제는 제법 머리가 굵은 아이들은 아닌 척하면서도 흘끔거리는 시선을 숨기지 못한다.
그것은 사춘기의 한창에 있는, 요 근래 데면데면해졌던 녀석들도 마찬가지였으니 벽태웅은 소리는 없지만 커다란 웃음을 얼굴로 보였다.
아무래도 살아온 환경이 그래서.
고모와 고모부 덕분에 사랑받고 자라 그것을 모르는 아이가 되진 않았지만, 주변에 약한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걸 이르게 알아 버린 아이들은 순수하게 기뻐하고 동경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게 되곤 했다.
벽태웅 또한 그랬다.
제법 머리가 좋았던 탓에 오히려 더 현실을 분명하게 파악하면서 눈치를 보게 되고 부정적인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됐었다.
그런 것들이 마주해 부정교합을 일으키며 동생들과의 사이가 삐걱이게 되었고 섣불리 손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우물쭈물하다 상태는 더욱 나빠져만 갔었다.
그런데 그것이, 거짓말처럼 해결되었다.
"얌전히 잘 있었어?"
"……어."
"안 다쳤어?"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 아닌 척 걱정을 드러내는 동생.
벽태웅은 가슴을 폈다.
"야. 형이 어디 다칠 사람이냐."
"그럼 다행이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걱정했던 것, 그리고 '장남'을 믿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동생들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벽태웅은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문제가 되었던 조직을 궤멸시키는 데 일조했고 그들은 일망타진되었다.
그뿐인가.
동생들을 괴롭히던 양아치 일진 무리들의 '보호자'였던 이들마저 감방으로 보냈다.
어디서 어떻게 새어 나갔는지 이무곤의 보호자 등이 설탕파의 구성원이었으며 벽태웅에 의해 잡혔다는 정보가 퍼졌던 것이다.
동생들을 괴롭히던 녀석들의 뻔뻔한 보호자를 황룡 벽태웅이 잡았다는 이야기는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화제였고 상당히 퍼져 나가며 동생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리하여 어린 동생들에게서는 순수한 동경의 시선을, 머리가 제법 굵어 버린 동생 녀석들에게도 신뢰의 시선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런 거구나.'
많이 고민하고 많이 헤맸었다.
그럼에도 답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풀이만 더욱 복잡해지는 듯하여 답답했었다.
하지만 이제 알겠다.
먼 곳만 보는 게 아니라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그렇게 하나씩 해 나감으로써 이윽고 먼 곳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도진 선배가 말했던 먼 미래의, 벽태웅이 되어 있을 법한 사람이자 미래까지.
사실 이번 일에서 벽태웅은 조연이었다.
그것도 수가 적은 조연이 아니라 수많은 조연 중에서 한 명 정도.
그동안 했었던 부정적인 사고방식으로 하자면 그렇다.
하지만 같은 생각을 해도 이제는 긍정적이면서 진취적으로 생각한다.
지금이야 수많은 조연 중 하나이지만 머지 않은 때에 주연으로 활약하게 될 거라고.
그러기 위해선 어쩌고 저쩌고 쉽지 않고 어쩌고.
솔직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런 생각들을 지우진 못했다.
그리고 지울 생각도 없다.
그것까지 다 포함해서, '덩치값'을 해서 짊어질 거니까.
사람은 본래 욕심과 결핍을 통하여 성장한다고 했다.
여기에 벽태웅은 내뱉은 말은 지켜야 하는 성격이기에.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숨기지 말고 나한테 말 해. 다 해결해 줄 테니까."
동생들의 앞에서 호언장담했다.
"오버하는 거 아니야?"
"임마. 형이야."
형이라고 해서 천하무적이 아니라는 걸 동생들은 이제 안다.
그걸 알면서도 형에게 적나라하게 말하는 걸 꺼리는 착한 동생들의 얼굴을 마주하며 벽태웅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 고모와 고모부에게 말씀드렸던 이야길 동생들에게도 해 주었다.
"형 취직했다. 화온에."
"화온?"
"그래. 선배가 사장님으로 있는 곳인데, 여기 치안 관리 업무 위탁받은 회사야."
"어? 그거 잠룡문 아니야?"
"맞아. 도진 선배의 잠룡문이 계약한 곳이지. 근데 거기에 한유아 선배의 화온도 협업을 하거든. 형이 거기 취직한 거야."
"와! 금봉 한유아?"
"그래, 임마. 그러니까 형이 이제 이 구역 보안관 같은 거란 말이지."
치안 관리 업무를 맡은 문파나 업체는 해당 구역의 경찰관에 준하는 권한을 가지게 된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만약 학교 폭력 같은 일이 또 발생한다면 벽태웅은 이제 더욱 적극적으로 해결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근데 형. 왜 잠룡문에 안 들어가고 거기 간 거야?"
아이들은 벽태웅이 김도진과 더 친하다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벽태웅은 잠룡문에서 일을 할 수도 있었지만…….
"형도 문파를 하나 세워볼까 해서."
"헐."
"문파?"
"그래. 문파."
선배가 해 주었던 말이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문파를 만들고 동생들에게 무공을 전파한다.
문파를 커다랗게 키워 보육원의 아이들을 고용하고, 무시당하지 않게 해 준다.
그런 미래가 벽태웅의 당장의 꿈이자 목표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잠룡문에 들어가는 대신 자신의 문파를 세우기 위한 경험을 쌓기 위해 잠시 머물 곳으로 화온에 들어간 것이었다.
벽태웅은 그런 자세한 이야기를 동생들에게 해 주진 않았다.
그저 씨익 웃으며 '형만 믿어, 임마'라고 말했다.
* * * *
"서류 제출 끝났고 승인도 났어. 이제 2주 동안 인수인계 기간인데, 그나마 화온이 원래 하던 업무이고 우리가 보조하는 형태니까 당분간은 좀 여유가 있을 거야."
"고마워요, 눈나."
오성아의 보고에 도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토벌 작전 이후 제법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집행부에도 얼굴을 겨우 비출 정도로 하루가 빡빡했는데 이제 숨을 좀 돌리게 됐다.
어쩌면 여러가지로 방해가 들어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런 것들이 일절 없었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한유아.
금화의 영애.
그러나 그 '영애'라는 신분이 그녀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곱게 '포장'하면서 동시에 가두기 위한 것이라는 걸 이번에 분명하게 알게 됐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금화의 금지옥엽으로 사람들에게 인식시키지만 그 외의 어떤 것으로도 인식시키지 않으려 하는 의도를 확실하게 보았다.
그러니까 그녀는 '화온의 대표'로서는 전혀 이슈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의 사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공은 물론이요 도진의 A-1 같은 세계마저 떠들썩하게 만들 만큼의 사례는 아니더라도 스물의 나이에 A-2를 획득한 건, 그것도 한유아라면 분명히 회자가 되었을 일까지도 말이다.
그 연장선상으로 화온이 잠룡문과 협업하는 걸 방해하지 않을까 했었는데…… 그런 시도까지는 없었다.
물론 모든 게 해결된 건 아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그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날 한유아의 꺼질듯 가련했던 미소가 도진의 제안에도 전혀 힘을 되찾지 못했던 것처럼.
다만 분명히 가까워질 수 있었다.
한유아가 품고 있는 문제는 대한민국 부동의 1위 기업인 금화와 얽혀 있다.
당장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것이고 한유아 또한 도진에게 온전히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었고 서로의 속내도 어느 정도 보여 주었으니 크나큰 진전이 아니겠는가.
도진은 한유아라는 너무도 탐이 나는,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던 인재를 데려오기 위해 그 거리를 계속해서 좁혀갈 생각이다.
그러다 제법 커다란 벽을 만나게 되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런 벽을 부수는 것 또한 즐거운 결과를 맞이하기 위한 과정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치안 유지 위탁에 한유아의 일, 그리고 벽태웅의 일까지 괜찮게 마무리 된 이번 사건은 이쯤에서 정리하고.
그와 연관된 또 하나의 심각한 일에 대해 도진은 생각했다.
'그놈.'
가면을 쓴 자.
놈은 체포되지 않았다.
죽은 놈은 체포가 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놈을 죽인 건 도진이 아니었다.
애초에 도진은 죄 지은 놈은 편히 죽여선 안 되고 살아서 오래도록 죗값을 받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의 소유자였고 그러하기에 결코 죄인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한유아를 업고 있느라 운신이 제한되는 도진을 죽이기 위해 절초를 펼쳤던 놈을 단 한 수로 제압했던 검기 역시 양팔과 단전 어림을 베었을 뿐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상처가 되지 않도록 했다.
검기를 보고 불신이 가득한 눈이 된 놈에게 도진은 굳이 더 말을 건네지 않았다.
양팔을 베었고 심지어 단전까지도 베었다.
술법을 사용한다 해도 근간이 되는 건 내공이었으니 내공의 근원인 단전을 벤 이상 놈은 모든 힘을 잃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설령 혀를 깨무는 시도를 포함한 어떤 시도도 도진이 사전에 차단할 수 있으니 오히려 추하게,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라는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그런 도진의 시선에.
놈은 이런 말을 읊조린 것이었다.
"부모도 못 찾을 놈이……."
"……!"
도진의 눈이 커졌다.
드물게도, 도진이 감정을 드러냈다.
그만큼 그 말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놈이 사용한 것은 '고대 무림의 언어'였다.
고대 무림의 흔적을 알려주는 여러 유물에서 볼 수 있는 말과 글.
그것은 중국어가 아니었으며 그 외 어떤 나라의 언어도 아니었으나 해석에 제법 진전이 있어 해당 분야의 박사라면 어느 정도 구사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진이 놀란 건 고대 무림의 언어가 아닌, 그 내용이었다.
-저놈…….
-…….
위지혁과 장호까지도 심상세계에서 반응한 그것은 욕이다.
부모를 욕하는 제법 수위가 높은 욕.
그리고 그것은 '현대의 욕'이 아니었다.
현대의 욕이라면 '부모가 죽은 놈'이라고 하지 '부모도 못 찾을 놈'이라고 하지 않는다.
결이 다른 것이다.
즉 놈이 고대 무림의 언어로 한 욕은 현대의 욕이 아닌 고대 무림의 욕이며.
이 욕은, 현대에 '알려지지 않은 욕'이었다.
그 어디서도.
도진은 그 욕을 위지혁의 이야기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알게 된, 현대에서는 아마도 유일하게 그 욕을 아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는 것은 곧.
"너. 고대 무림에 관해서 아는 게 제법 많은 모양이네."
"……!!"
도진의 말에 이번엔 가면을 쓴 자의 기세가 흔들렸다.
그 또한 초절정에 이른 영성이 트인 자.
대번에 도진의 말에 담긴 것들을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곧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럴 확률이 높을 거라 짐작하고 있긴 했다만, 네놈은 역시 '진짜'인 모양이군."
'진짜?'
도진은 굳이 묻지 않고 침묵했다.
그가 무심결에 더 많은 정보를 내뱉도록.
하지만 가면을 쓴 자는 그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궁금해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머지 않은 때에, 너 또한 알게 될 거니까. 진실을."
"그때가 되면, 너는 우리와 함께 있을 거다."
그렇게 말한 가면을 쓴 자는 곧 침묵해 버렸다.
어떻게 도진이 손을 쓰기도 전에, 놀랍게도 그의 뇌가 곤죽이 되어 사망해 버린 것이었다.
-뇌에 술법을 심어 두었구나. 독한 놈들이다.
장호는 그렇게 말하며 도진이 어쩔 수 없는 영역이라고 말 해 주었다.
물론 도진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딴 소리만 하고 죽어 버린 가면을 쓴 자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얻은 정보가 적지는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