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화
한유아가 누워 있던 곳은 병원의 고급 1인실이다.
허가받지 않은 이는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고, 그 말은 곧 도진이 갑작스러운 방문을 한 게 아니라 미리 연락을 하고 방문했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나서 들렀는데 아직 안 깨어나셨길래요. 그냥 가려다가 먹을 거라도 좀 두고 가려고 했는데 타이밍 좋게 딱 일어나셨네요."
"아, 응……."
도진을 마주한 한유아의 반응이 평소같지 않다.
여유롭고, 조금은 과한 아재 개그를 죽이 맞아 주고받던 모습 대신 볼을 조금 붉힌 '가련한' 얼굴이다.
도진은 그런 그녀의 태도를 굳이 찌르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모습이었기에.
그날.
가면을 쓴 자를 상대로 승리했던 도진이 사용한 것은 틀림없이 '검기(劍氣)'였다.
본래는 지금 현실의 도진이 결코 사용할 수 없었을 경지의 수법.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다름 아닌 한유아였다.
수많은 거짓말로 뒤덮여 있던 가면을 쓴 자였으나 몇 가지는 진실을 말했으니 그중 하나가 한유아가 곧 죽을 거란 것이었다.
한유아는 명백하게 치명적인 혼합독에 중독되어 있었으며 그대로 두었으면 목숨을 잃을 만큼 심각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도진은 한 가지, 알고는 있지만 시도해 본 적이 없었던 수법을 시도했으니 '합일(合一)'된 상태에서의 내공 운용이었다.
한유아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특훈으로 천마기를 이용하여 독을 몰아내는 운용법을 터득했으니까.
그동안의 성장으로 조금 더 세밀하고 정밀하게 천마기를 운용할 수 있게 되었고 타인에게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타인의 몸 안에서 내공을 운용해야 하는 그런 섬세한 치료를 가면을 쓴 자가 가만히 기다려 줄 리 없다는 것이었으니 그 문제까지 해결할 방법이 필요했고 그것이 '합일의 이치'였던 것이다.
신체적으로 밀착한 상태에서 상대가 육체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허락'을 함으로써 상대의 혈도까지 이용하여 내공을 운용하는 수법.
잊기 쉽지만 도진은 제대로 된 무공에 입문하여 수련한지 이제 겨우 2년이었다.
이로 인한 '육체적 한계'가 아직까지도 도진의 문제로 남아 있으니 그 눈부신 성장 속도가 여기에 한해서는 역으로 작용하여 그나마 연신극기공이 아니었다면 이미 심기체의 균형이 무너졌을 것이다.
이 문제를, 그리고 한유아의 중독을 합일의 이치로 두 사람의 혈도를 동시에 운용함으로써 해결한다.
한유아가 온전히 몸을 맡기며 도진에게 기대었고 도진은 천마기의 한계를 조금 더 풀어냈다.
상상 이상의 속도로 덩치를 키워가는 천마기가 도진의 단전에서 풀려나와 미친듯이 내달리고 그것은 이윽고 한유아의 혈도에까지 내뻗었다.
자칫 운용에 실패하면 도진은 물론이요 한유아의 전신 혈도가 터져 나갈 상황.
그러나 극한의, 죽음에 이를 만큼의 상황에 그 누구보다 익숙한 도진이었기에 한 치의 흔들림없이 천마기를 다루었고 이내 천마군림의 묘리에까지 닿았다.
혼자였다면 감당하지 못했을 규모의 내공, 그리고 이치.
그것을 한유아까지 더하여 '둘'이 감당함으로써 찰나의 순간이나마 실현한다.
두웅-
한유아를 좀먹던 독기를 단숨에 사른 천마기가 대자연과 이어지고 그것이 아직은 구현하지 못하는 이치를 구현할 수 있게 해 주었으니.
파아아앗-!
그것이 검기였던 것이다.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신공(神功)의 힘을 빌려 구현한 검기.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가면을 쓴 자의 절초를 베기엔 충분했다.
당시의 상황을 한유아는 다 지켜보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지만, 그 순간의 감각만큼은 분명하게 남아 있을 터.
"……."
그러니까 도진과 마주한 순간 이렇게 정돈되지 않은, 그럼에도 아름다운 금발에 가려진 평소보다 새하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다.
당시의 '하나가 되었던 경험'이 스킨십조차 특별한 일인 그녀에게 있어서는 자극이 제법 강했을 테니까.
-음란하구나, 제자야.
-제자는 그렇게 곡해하시는 스승님이 만악의 근원이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꼬르륵.
"아."
안 그래도 붉었던 한유아의 얼굴이 완전히 사과처럼 되었다.
배꼽시계가 눈치도 없이 울어 버렸던 것이다.
도진은 피식 웃으며 무언가를 꺼내 들었으니 딸기맛 요플레다.
"드실래요?"
"……응."
한유아는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겨우 눈을 뜨셨으니까 힘드실 텐데, 떠먹여 드릴까요?"
여기서 도진이 평소처럼 장난을 걸었고.
"응. 그럴래?"
"어."
한유아가 물러나지 않고 받아쳤다.
본래 도진의 역할이어야 할 '선 넘는' 그 발언에 도진이 평소의 한유아처럼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
"……."
도진과 민지서의 시선이 찰나간 스쳐간다.
그리고 도진은 잠시간의 고민 후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제가 서비스 좀 하죠, 뭐."
"고마워."
* * * *
"아아."
"어이쿠, 우리 선배 잘 먹는다."
곁에 앉은 도진이 한유아의 침대를 조작하여 앉게 만들고 요플레를 떠먹여 준다.
수상할 정도로 도진은 그 행동이 익숙했고 한유아는 약간 어색한 모습으로 그것을 받아 먹었다.
그리고 도진은 생각했다.
'약해져 있구나, 선배.'
검기를 구현할 수 있게 해 주었던 '합일'은 어찌 되었든 도진에게는 물론이요 한유아에게 있어서도 나름 기연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도진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막혀 있던 벽 너머를 심상세계도 아닌 현실에서 미리 체험할 수 있었고 한유아의 경우 독기만이 아닌 평소 몸에 쌓여 있던 좋지 않은 여러가지를 천마기가 모조리 일소해 주었으니까.
그러니까 사실 지금 한유아는 침상이 아닌 수련장을 붕붕 날아다닐 수도 있어야 했다.
육체의 상처가 있다 해도 무림인이란, 그것도 절정에 이른 무림인이란 그럴 수 있는 초인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렇게 한유아가 약한 모습인 건 결국 무인에게 있어 일반인보다도 중요하게 육체에 작용하는 '마음'의 문제가 있다는 거다.
외부인인 도진과 누구보다 곁에 가까이 두고 있는 민지서가 함께 있음에도 스스로의 약한 모습을 보이고 말 정도의 심각한 문제가.
무릇 수장이라면 결코 약한 모습을 보여줘선 안 되는 두 사람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만큼의 문제가 무엇일지, 도진은 아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 토벌 작전에 있어 누구에도 밀리지 않을 만큼의 공을 세우고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한유아였다.
하지만 그런 한유아에 대한 이야기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축소되어 있고 회자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 공의 색을 바래게 만드는 이야기가 더 많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인위적인 개입이 있음을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짚게 된다.
'금화의 영애'이자 '금봉' 한유아가 운영하는 민간 무력 기업이 기껏해야 '영세 업체'인 지금의 상황까지도 무언가가 작용하고 의도한 일이라는 것을.
신경을 쓰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한 번 그것을 인식하고 나면 그 부자연스러움을 인지할 수밖에 없는 일.
그것이 한유아를 약하게 만들었다.
요플레 하나를 다 먹고 한유아가 웃으며 말했다.
"축하해."
"뭐를요?"
"이번에 치안 유지 계약 따게 됐잖아."
"아, 그렇죠."
치안 유지 계약은 정부의 위탁으로 하자가 없는 무림인들의 집단이 일정 구역의 치안 유지를 위해 활동하는 것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5년 가량은 지속되며 이 시기 문파는 고정 수입을 포함한 어디서든 내놓을 수 있는 '이력'을 가지게 됨으로써 성장의 기회가 된다.
근래 상승세였으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잠룡문에게는 더더욱 큰 기회가 될 것이었다.
한유아는, 그것을 축하해 주었다.
본래는 화온이 땄어야 할 계약.
실제 아무 문제없이 토벌이 완료되었다면 화온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계약.
그것이 잠룡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내가 다쳤으니까.
내가 잘못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본래는 불합리하고 억울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나에게는 이게 당연한 세상이었으니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움직이고 있는 세상에서 결국은 내가 잘못한 것이고 나로 인해 놓친 계약이다.
그것이 그녀를 지탱하고 있던 중요한 기둥 하나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그런 그녀에게, 도진이 답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선배."
"응?"
"이 계약, 저랑 공동으로 하지 않으실래요?"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요. 우리 잠룡문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선배의 화온이랑 같이 들어가고 싶어서요."
"톡 까놓고 말해서 선배가 땄어야 할 계약이잖아요. 그걸 갑자기 우리한테 들이미는 건 좀 아니라고 봐요. 우리가 남도 아니고 사이 나쁜 경쟁자도 아닌데 말예요. 이 좁은 무림판에서 이건 상도덕이 아니죠."
후배에게서는 보기 힘든 '치기'라고 한유아는 보았다.
그 나이대의 학생들이 흔히 보여주는 그런 것.
도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그리고 실질적인 부분으로도 이게 더 좋다고 생각해요. 우리 잠룡문이 성아 눈나가 정말로 잘 해주고 있긴 한데 사실 이쪽에 관한 실전 경험이나 노하우는 부족한 게 사실이잖아요? 게다가 안 그래도 바쁜 상황에서 고정적인 치안 유지 업무를 더했다가는 아무리 각성까지 한 울트라 레어 도비 눈나라고 해도 무리가 있단 말이죠?"
'…도비?'
"문파의 인력도 그래요. 다들 이미 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 치안 유지에까지 투입하면 거의 2교대 수준으로 빡빡해지거든요. 그래서! 선배가 도와줬으면 해요."
"내가?"
"네. 화온은 이쪽으로 경험도 풍부하고 치안 유지 업무를 이미 해 오고 있기까지 하잖아요. 인력적으로 도움도 받으면서 노하우도 좀 훔쳐 배우겠다, 이거죠."
"…그런 걸 내 앞에서 다 말해도 되는 거야?"
"에이! 선배 좋은 게 뭐겠어요. 원래 이럴 때 후배를 위해 아낌없이 그런 걸 가르쳐 주는 게 좋은 선배 아니겠어요?"
"진짜 뻔뻔하네."
한유아는 풀썩 웃고 말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같이 하자."
"고마워요, 선배."
"고맙기는 무슨."
포기하고 있던 일이었다.
원하던 그림도 아니었으며 사실은 '의미없는 발버둥'이라는 생각마저도 약해진 마음이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하고 싶었기에 조금, 어리광을 부리고 말았다.
"그럼 이 건은 비서 선배랑 같이 서류 작성해서 제출하도록 할게요."
"네?"
"왜 그러세요, 지서 선배?"
"…아닙니다."
뭔가 껄끄러운 별명을 들은 거 같은데 초절정의 고수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으니 잡고 늘어질 수가 없었던 민지서는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쪽에서 우리 요구를 가능한 수용해 주기로 했고 원래 화온이 하던 업무였으니 특별한 태클은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금방 결과가 나올 테니 그러면 알려드릴게요."
"응."
원래는 안 될 일이었다.
될 것이라 해도 안 될 것으로 만들 일.
그러나, 그녀의 후배라면 안 될 것도 될 것으로 만들 것이니까.
긍정적인 답이 돌아올 거라고 한유아는 예상했다.
그렇게 위탁 계약과 관련된 이야기가 마무리 된 뒤.
"아, 그러고 보니 선배."
"응?"
"선배네 회사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후배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