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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434화 (434/741)

433화

도진을 마주하는 순간 벽태웅은 모든 고민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렇게 쉽게 호언장담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보이는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데.

그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선배의 씨익 웃는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모든 장벽이 주먹 한 방에 부술 수 있는 가벽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선배의 말대로 동생들을 마주하며 자신있게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다, 처리해 줄 거니까."

그렇게 선언하며 마주한 동생들의 두 눈에서 요 근래에 볼 수 없었던, 어릴 적의 반짝이는 감정을 볼 수 있었다.

"응!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

동생들의 이야기는 듣지 않은 채 선배를 따라 나왔다.

선배가 다 알고 있을 테니까.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보육원 앞 놀이터의 벤치에 앉았다.

"아이들이 마약을 했다고 하더라."

"…마약이라면, 그 마약……입니까?"

"응. 맞아."

고요한 새벽이었지만 섭음술을 사용했기에 이야기가 새어 나갈 일은 없었다.

때문에 격동하는 벽태웅의 기세가 더욱 도드라졌다.

그리고 그 기세는 도진의 담담한 말에 곧 잦아들었다.

"무림맹이나 경찰 쪽에서는 설탕파라고 부른대. 놈들이 새끼로 끌어들였던 아이들을 마약으로 길들인 거지."

학생들이 보여주었던 '의리'의 이유를 도진은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벽태웅의 동생들이 보호 감찰 처분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은 새벽에 나가려 했던 이유까지도.

"중독성이 대단한 약인 모양이야. 선배 말로는 이미 몇 명이나 새벽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다네."

보호 감찰 처분을 받았던 아이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이유는 명백하다.

마약이 필요했다.

"지금 요 주변을 담당하는 건 선배의 화온이야. 잠수한 조직의 연락을 받고 몰래 숨겨두었던 마약을 가져가는 걸, 성질 급한 애들은 벌써 먹은 걸 모르는 척 돌려 보냈다고 해."

몸통을 잡기 위해서 당장은 그렇게 모르는 척을 했다.

"내일 놈들을 잡을 거야. 거기에, 너도 한 주먹 보태라는 이야기를 하러 왔어."

도진의 말에 벽태웅은 기꺼이 참여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일 이야기가 끝난 뒤.

벽태웅은 생각이 많은 얼굴로 도진을 응시했다.

수많은 고민을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없애 준 그 당당한 얼굴.

뒤따르는 이에게 보여 주는 한 치의 흔들림조차 없는 명확한 등.

그것은 벽태웅이 원하고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장남'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하면, 선배처럼 될 수 있겠습니까?"

충동적으로 나온 질문이었다.

앞뒤 다 자르고 나온 질문이었으나 도진은 바로 이해하고 옅게 웃었다.

"나이를 먹으면 될 거야."

"나이를……."

"응. 너는 이미 니가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모든 걸 가지고 있으니까. 남은 건 시간 문제인 거지."

추상적인 이야기다.

도진은 이것만으론 벽태웅에게 만족스런 답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했다.

"강 노사님의 무공을 완성할 테니까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문파를 세워도 좋을 거야. 황룡이란 별호도 얻었겠다 숭무고 졸업장도 있겠다 제법 잘 나갈 거야."

"그렇게 문파를 만들고 동생들에게 무공을 전수해서 돈을 버는 거지."

"돈을 많이 벌면 문파의 규모도 커지겠지? 그러면 보육원의 아이들을 더 고용할 수도 있을 거야."

"황룡의 문파 황룡문! 같은 느낌으로 그렇게 규모가 커지면 앞으로 더 생길 동생들이 무시당하는 일도 없을 테고 함부로 괴롭히는 놈들도 없어지겠지. 어때?"

"…잘 모르겠습니다."

선배가 무언가 좋은 이야기를 해 주고 있다는 건 알겠지만 그 의도를 제대로 모르겠다.

솔직하게 말하는 벽태웅의 모습에 도진이 하하 웃고선 답을 알려 주었다.

"그러니까, 너는 고민이 많은 거잖아. 너무 똑똑해서. 사실 그렇지. 같은 답을 적어도 더 고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고 적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예 찍는 사람도 있지."

그리고 다 같이 정답이라면 고민을 많이 한 사람이 손해처럼 보인다.

허나 그건 근시안적인 생각이다.

더 많은 생각을 하는 이는 어떻게든 그것이 드러나는 법이며 결국은 몇 번이고 살면서 마주할 복잡한 문제에서 그 진가가 나타난다.

"당장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그것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것만 같아서 너는 힘들어 하고 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할 거잖아?"

"중요한 건 포기하지 않는 건데 너는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 결국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내가 말한 건 그렇게 미래의 니가 되어 있을 법한 그런 사람이자 미래인 거지."

걱정을 대출해서 하는 건 스스로를 더 힘들게 만드는 일이지만, 그것을 견디는 걸 넘어 모두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다면 담금질이 될 수도 있다.

"……."

조금은, 알 것 같다.

포기하지 말고 나아가라.

그러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테니까.

문제를 원하는 수준으로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당장은 아득해 보이지만 그래도 기어코 해낼 것이다.

너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다.

격려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선배는 조언을 해 준 것이었다.

'이 녀석은 겉보기랑 다르게 소심한 편이니까.'

생각이 많아도 불도저 같은 성격이라면 또 모르는데 벽태웅은 의외로 소심한 면이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움직이긴 하는데 정작 마음 속으로는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고…… 고민이 있으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어른에게 상담하는 것도 좋을 거야."

벽태웅은 고민을 혼자 끌어안고 혼자 해결하기 위해 끙끙대는 타입이다.

'장남'으로서 일을 척척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형성된 성격.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하는 건 중요하잖아? 니가 동생들이 그러길 바라듯, 너의 고모와 고모부도 그러길 바라실 거야. 그리고 좋은 어른이라는 건, 니 생각보다 더 속이 깊고 지혜를 가지고 있거든."

이를테면, 아버지.

어릴적 올려다보던 하늘 같았던, 슈퍼맨 같았던 아버지와 눈높이가 같아지고서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

아버지에게 슈퍼맨 같은 힘보다 귀중한 세월이 가져다 준 지혜가 있다는 것.

벽태웅은 고모와 고모부를 찾아가 많은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그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래, 그걸로 좋아. 넌 노력을 잘 하는 사람이니까."

* * * *

다음날 저녁.

"자, 그럼 신입생들을 환영하며 건배."

집행부의 멤버들이 회식 자리를 가졌다.

일전 도진이 말했던 신입생 환영을 겸한 자리였는데, 분위기는 빈말로도 그리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성민혁과 성지인, 그리고 이문호와 그 측근인 둘 사이의 분위기가 내내 불편했으니까.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던 성민혁과 성지인.

그 반대편에 있던 가해자였고 지금도 가해자인 이문호와 나머지 둘의 사이가 결코 좋을 수가 없다.

그것은 이제 2학년이 된 윤상미와 벽태웅도 마찬가지였고 우서진과 약리지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다만 남사현이 중간에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움직였고 중심이 되는 도진이 있었기에 노골적으로 분위기가 망가지지 않았을 뿐.

'흐음.'

이문호는 그걸 다 알면서도 웃는 낯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측근인 태종훈 또한 얼굴은 딱딱하지만 본래 인상이 그런 것이고 기저에 흐르는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삼인방 중 마지막으로 가장 분위기와 동떨어진 태도를 보이는 감우상이다.

의천검가와 깊은 관계에 있는 현화 건설의 둘째로 나지윤을 통해 듣기를 픽업 아티스트.

그래, 미래에는 이미 그 실체가 낱낱이 드러난 성(性)적인 분야의 사기꾼이다.

그들 스스로는 연애에 관한 기술을 전수하니, 이성을 유혹하는 기술을 연구하니 지껄이지만 결국 사기꾼에 불과하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난 '직업'.

그 직업을 스스로 자처하는 녀석이었다. 이제 겨우 고등학생의 나이로.

알 없는 안경을 낀 감우상은 자신에게 적대적인 성지인에게 오히려 씨익 웃으며 눈빛을 보내는데 그것은 어마어마한 어그로이자 선전포고에 다름없었다.

성지인이 조금만 더 능동적인 성격이었다면 물잔을 던졌을 정도로.

그런 환영회를 도진은 옅게 웃으며 지켜 보았다.

* * * *

"새내기들 조심히 들어 가."

"예. 잘 먹었습니다."

환영회는 늦지 않은 시간에 끝을 맺었다.

새내기들은 배웅을 받으며 떠났고 2학년과 3학년은 남았다.

다른 이유가 아니다.

"자, 그럼 우리는 2차를 가 볼까?"

"네!"

바로 2차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환영회에 참석했던 2학년과 3학년이 모두 함께 하는 2차는 근처 고급 레스토랑에서 열렸는데.

"선배님들!"

"안녕."

그 레스토랑에 무려 졸업생인 한유아와 민지서, 유지은, 폭룡 류대현이 나타나 합류했다.

2차는 2학년과 3학년, 그리고 졸업생들의 모임이었던 것이다.

2학년에 우서진과 윤상미, 남사현과 약리지, 벽태웅, 클로에.

3학년에 도진과 소담.

마지막으로 졸업생에 한유아와 민지서, 유지은, 류대현까지.

화려한 면면으로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이 그 자체로도 커다란 뉴스가 될 정도였다.

허나 이 자리는 그렇게 뉴스가 되지 않았으니 오히려 반대로 '평범한 모임'이었기 때문이다.

숭무고 학적에 이름을 올린 학생과 학생의 가문은 대부분 평범하지 않다.

'그들만의 리그'라 불리는 세계에 속해 있고 그 세계에서는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이 활발히 일어난다.

그리고 혈연, 지연, 학연으로 대표되는 세 가지 인맥 중 하나인 학연(學緣)으로 연결된 재학생, 혹은 졸업생들이 만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냥 만나는 것보다 '동문'이라는 학연을 통하여 시작하는 것이 당연히 더 좋다.

집행부 출신의 졸업생과 재학생들의 '개강 시즌 모임'은 그렇기에 특별하면서도 평범했다.

"집행부가 이렇게 세 학년이 모이는 건 오랜만이네."

"네, 그러네요. 몇 명이 빠지긴 했지만."

"사실 졸업생 포함해서 이 정도라도 모이는 건 대단한 거지."

"숭무회 시절 집행부 일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숭무고 출신 2학년에 3학년, 거기다 졸업생까지 이 정도나 모인 건 최초이지 않을까?"

그러니까 열두 명, 그것도 김도진에 한유아 등 대단한 이들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이 자리 또한 평범한 모임이 될 수 있었다.

프라이빗 룸에 모인 집행부로 묶인 열두 명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듣기로 도진이 네가 집행부만이 아니라 숭무고도 다 해 먹는다던데 사실이야?"

류대현이 즐거운 분위기에 타듯 씨익 웃으며 도진에게 물었다.

도진은 으음, 하고선 답했다.

"대현 선배. 어디서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사실입니다."

류대현은 으잉 하는 얼굴이 된다.

"오해가 아니야?"

"네, 사실입니다. 껄껄."

"내가 부장 자리 넘겨줄 때 이미 집행부는 도진이가 점령해 버렸었어."

여기에 한유아가 너스레를 더했다.

2차는 그런 느낌으로 즐거운 분위기가 유지되며 자정을 넘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자정을 넘어 새벽 1시가 되었을 때.

"자, 그럼 슬슬 일어날까?"

분위기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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