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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432화 (432/741)
  • 431화

    아직은 거리감이 다 좁혀지지 않은 사이의 클로에는 존댓말을 했다.

    그리고 그 부드럽지만 명확한 어떤 것이 담긴 말에 벽태웅의 시선이 클로에에게로 향했다.

    클로에는 벽태웅의 시선을 받으며 소주를 입술 너머로 단번에 넘기고선 말을 이었다.

    "어릴 때의 제가 있던 곳은 '문(entrée)'이라 불리는 거리였습니다."

    클로에는 부모를 모른 채 버려졌던 고아 소녀였다.

    그런 소녀가 기적적으로 살아남고 자라며 전전했던 뒷골목 거리의 이름이 문, 영어로 하면 게이트(Gate)였고 한자로 하면 문(門)이었다.

    "그곳이 바로 뒷골목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 같은 곳이기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었지요."

    뒷골목이라고 해서 다 같지 않다.

    마치 인터넷에서의 딥웹처럼, '진짜'로 가기 위해선 통과해야 할 길이 있었고 클로에가 자랐던 곳이 바로 그 통과해야 할 길의 역할을 하는 장소였다.

    "저는, 그곳에서 자랐기에 여기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무공이라곤 일초반식도 모르고 제대로 된 지식과 보호자조차 없었던 거지 소녀.

    그랬기에 상식인의 시선에서는 말도 안 되는, 덴젤 공방을 대표하는 장인이면서 무공의 고수였던 안토니오 덴젤의 지갑을 턴다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다.

    허나 그런 처지에 있었던 그녀는 역설적이게도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기적이라고까지 해야 할 일이지만 어쨌든 그녀는 구걸패에 속해서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고 조금 자라서는 할당된 구걸과 도둑질을 하고, 그나마도 구타당하고 빼앗겼으나 굶어 죽지는 않을 수 있었다.

    "제가 있던 바로 그곳이, 그나마 양지와 이어지는 곳이면서 동시에 인간성이 남아 있던 곳이었으니까요."

    문의 너머.

    빛이 들지 않는 진짜 뒷골목은 상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곳이었다.

    어린 그녀에게마저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고 몸이 떨리는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이들이 활보하는 그런 곳.

    평범한 이들은 평생을 볼 일이 없는 곳.

    "그런 곳에 들어가고 마는 사람들을, 저는 몇이고 보았습니다."

    문의 역할을 하는 거리에서 지냈기에, 클로에는 그 문을 열고 이윽고 가서는 안 될 곳에 가 버리는 이들을 보았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붙잡아 줄 이가, 자의든 타의든 그곳으로 향하는 다리를, 손을 잡아 줄 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

    그녀의 삶이 녹아 있었기에 벽태웅의 피부에 그것은 확연한 진실로 와닿는다.

    "큰 벌을 받게 될 학생들은 그렇게 잡아 줄 이가 없는 아이들이었습니다."

    다수가 아닌 소수.

    나쁜 길은 너무나 쉽게 들어설 수 있는 길이요 걸음을 빠르게 만드는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허나 일정 이상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걸, 일정 이상의 속도를 초과하는 걸 본능이 브레이크를 건다.

    그런 때에 누군가가 붙잡아 준다면 아직 돌아갈 수 있다.

    허나 소수에 속했던 큰 벌을 받게 될 아이들은 그렇게 잡아 줄 이가 없었기에 결국 브레이크가 고장나 버린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동기님의 동생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출하지 않았다.

    외박을 하는 등 탈선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돌아왔다.

    그것은 그 아이들을 붙잡아 주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의 원장님들, 그리고 동기님이 그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고개를 떨구고 미안하다 했습니다. 면목이 없다, 는 말처럼요. 그것은 자신의 잘못을 알고 사과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장 부부님과 동기님이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 습니까."

    "네. 저에게는 아버님이 그랬고 스승님이 그랬듯 그 아이들에겐 동기님과 원장 부부님이 그런 사람이 되어 주었다는 것이니, 동기님은 자책만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 군요. 감사합니다."

    벽태웅은 한결 풀린 얼굴이 되었다.

    도진은 그 모습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갈피가 잡히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클로에가 나서서 잘 말을 해 주었다.

    "그렇게 돌아갈 곳이 되어 주고 손을 잡아 준다면, 아이들은 분명히 되돌아 올 것입니다."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클로에는 그렇게 말했다.

    * * * *

    '그래. 꾸준히 이야기를 하는 거야.'

    술자리를 마치고 벽태웅은 그렇게 생각하며 보육원으로 향했다.

    클로에 덕분에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고 다짐을 할 수 있었다.

    분명히 그 말대로다.

    자신에게 있어 고모와 고모부가 방황하지 않고 노력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듯, '황룡 벽태웅'이 기댈 곳 없는 동생들의 장남으로서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한다.

    나쁜 꾐에 흔들릴지언정 거기에 끌려가지 않도록 단단히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그러니까 대화를 하자.

    조금 더 시간을 만들어서, 그 시간을 아이들과의 대화에 쓰자.

    그렇게 다짐하며 술냄새를 날리고 보육원 안에 들어섰던 벽태웅은.

    "…너희, 어딜 가려는 거야?"

    굳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보호 감찰 처분을 받은 동생 둘이, 불안한 얼굴로 몰래 보육원을 나가려 했으니까.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 새벽에.

    벽태웅의 등장에 아이들이 흠칫 놀란 얼굴이 되더니 이내 입을 꾸욱 다물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심지어 조사관이 겁까지 주면서 물어도 이렇다 할 진술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

    벽태웅의 안에서 무겁고 답답한 숨이 차올랐다.

    그리고 비슷한 시간에, 도진은 예상치 못했던 사람을 마주하고 있었다.

    * * * *

    "오, 후배!"

    "안녕하세요, 선배."

    술자리가 끝나고 도진은 느긋하게 길을 걷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명상을 겸하여 새벽이 내려앉은 조용한 거리를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걷다가 예상치 못했던 사람을 만났으니 다름 아닌 한유아였다.

    어두운 거리에서도 그 화려한 미모와 금발이 마치 태양처럼 눈부신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곁에는 민지서와 두 명의 무인이 함께 있었는데.

    "순찰하시는 거예요?"

    "응, 맞아."

    치안 유지를 위한 순찰 중이었다.

    "잠시 같이 걸을래?"

    "네."

    민지서와 두 명의 무인이 두어 걸음 뒤에서 걷고 도진은 한유아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걸었다.

    "순찰이라면, 정부 의뢰겠네요."

    "응. 거창하게 말하면 그렇지."

    한국이 외국에 비해 치안이 좋다지만 당연히 그것이 범죄율 제로라는 말은 아니다.

    한국에도 엄연히 '흑도(黑道)'가 있고 어둠이 내린 때에 양지를 기웃거리곤 한다.

    그런 흑도의 범죄자들이 활보하지 못하도록 이렇게 나라에서 민간 무력 기업, 그러니까 문파의 무인들을 고용하여 순찰 의뢰를 하는 것이다.

    "이 새벽에 순찰이라니, 고생이 많으시네요."

    도진의 말에 한유아는 싱긋 웃었다.

    "이렇게 고생을 해야 우리 같은 영세 문파는 점수를 딸 수 있으니까."

    그것은 농담처럼 말하는 진담이다.

    한유아의 민간 무력 기업은 '민간 무력 기업'의 영역이기에 따지면 중소 문파의 영역에 있다.

    그리고 이런 중소 문파는 국가와의 고정 계약 유무가 무인의 A-1 자격증만큼이나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의외로, 한유아가 운영하는 민간 무력 기업은 그런 '큰 계약'을 한 건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알고 있는 그 내용을 도진은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았다.

    한유아 또한 마찬가지로 웃는 얼굴 그대로 화제를 옮겼다.

    "오늘 패싸움이 있었잖아."

    "네, 그랬죠."

    "사실 이쪽 담당 무림맹이나 관련 부서에서는 어느 정도 주목을 하고 있긴 했거든."

    심상치 않은 흑도의 움직임이 있었으니 해야 할 일, 해당 기류에 대한 주시를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뭐 몸통은 놓쳤지만 그래도 액션은 보여줘야 하니까. 이렇게 우리도 일거리를 하나 따냈다는 거지."

    "하하. 그랬군요."

    그러니까 '치안 서비스 강화 기간'이라는 거다.

    사건이 제법 크게 기사화됐으니 얼마간 평소 이상으로 빈틈없이, 타이트하게 치안 유지 활동을 하는 것으로 결정됐고 그를 위한 인력을 고용하게 됐으니 거기에 한유아의 민간 무력 기업도 응모하여 계약을 체결했다는 이야기였다.

    "순찰은 언제까지 하시는 건가요?"

    "응, 지금까지! 막 끝났어."

    씨익 웃으며 한유아는 말한다.

    새벽 두 시.

    우연이라면 기막힌 우연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부터 야식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가지 않을래?"

    "선배가 쏘시는 건가요?"

    "헐! 나한테 쏘라는 거야?"

    "꼬시는 사람이 쏴야죠."

    "와. 뻔뻔해. 근데 그게 또 매력적이야. 좋아. 내가 쏜다."

    "잘 먹겠습니다."

    그리하여 도진은 계획에 없던 야식을 먹게 됐다.

    다만 멤버는 다섯 사람이 아닌 세 사람이 됐으니 두 명의 무인은 법인 카드를 받고서 따로 떠났기 때문이다.

    "어떤 직원이 사장님이랑 같이 밥 먹는 걸 좋아하겠어. 그렇지?"

    "배려심이 깊으시네요."

    한유아의 말에 도진은 웃으며 동의해 주었다.

    제법 고급스런 음식점의 프라이빗룸에서 한유아와 민지서를 마주하고 도진은 앉았다.

    "술냄새 나던데, 누구랑 마신 거야?"

    "태웅이랑요. 클로에랑 상미도 있었구요."

    "흐응. 격려 좀 해줬나 보네."

    "제가 아니라 클로에가요. 좋은 얘기를 해 주더라구요."

    "그랬구나."

    음식이 나오고 젓가락을 들며 이것저것,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조금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즈음 도진이 먼저 말했다.

    "그래서, 저한테 무슨 이야길 하시려는 건가요, 선배."

    도진의 물음에 한유아의 입술이 매력적인 호선을 그렸다.

    "우리 후배는 눈치가 빨라서 좋아."

    우연이 반쯤 섞인 만남이긴 했으나 이 자리에 앉은 것까지 모두가 우연은 아니었다.

    한유아가 그렇듯 도진 또한 사람을 보고 읽을 줄 아니까.

    자연스럽게 마주 앉은 이 야식 자리는 그러니까 의도된 자리였다.

    먼저 내민 한유아의 손에 도진의 손이 겹쳐진.

    분위기가 조금 바뀌고 한유아가 말했다.

    "오늘 조사를 받은 아이들, 하나같이 입을 열질 않았지."

    "네. 그랬죠."

    흑도에는 그런 게 있다.

    의리.

    듣기에 좋고 번드르르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의리는 기실 썩어 악취가 풍기는 것을 어떻게든 포장한, 그럼에도 불쾌한 악취를 숨기지 못하는 것이다.

    잡혀도 불지마라.

    적나라하게 말해 그런 뜻이며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든 보복을 할 거라는 경고를 한다.

    그게 '의리'라는 단어로 포장된 것일 뿐이다.

    조사관은 학생들이 입을 다문 게 그런 협박에 의해 지켜지는 의리라 판단했고 굳이 진술을 강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는 것도 별로 없을 것이고 실제로 진술을 강요하여 아이들이 도주한 흑도 무리에게 보복을 받게 되면 불똥이 그에게도 튈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그 의리 때문이 아니었어."

    "의리 때문이 아니라고 하시면?"

    한유아의 호선을 그린 입술에 약간의 은밀함이 깃든다.

    그리고 섭음술을 통하여 도진의 귓가에만 그녀의 목소리가 스며든다.

    "양성 반응이 나왔어."

    "……."

    "그러니까, 마약 반응이 나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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