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화
소거인 강거혁과는 평범함이 켜켜이 쌓여가는, 그래서 더욱 굳건한 인연을 쌓아가고 있었다.
본래는 유룡 우정한과 군홍무가의 곽필섭을 포함한 S4가 얽혔던 '도봉구 재개발 사건'.
그 사건이 전생과는 조금 다른 흐름으로 진행되며 벽태웅의 보육원이 얽혔고 솜이와 만나기까지 했다.
그 과정에서 벽태웅과 보육원을 도왔고 벽태웅의 스승인 강거혁이 감사를 표하며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말을 건네달라 하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도진은 아직 강거혁이 약속했던 도움을 받지 않았다.
그럴 만한 일이, 시대의 거인의 주먹이 필요할 만한 일이 아직은 없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강거혁과 대면조차 하지 않으며 시간을 보내진 않았다.
강거혁은 제자가 입학한 숭무고의 초청 강사로 시작하여 이제는 고정적으로 한둘의 강의를 맡는 입장이 되었고 당연히 도진과도 이래저래 교내에서 얼굴을 마주하곤 했다.
그렇게 마주할 때마다 겉으로는 무뚝뚝하지만 시선에 감사와 부드러움을 담았으니 눈인사를 할 때마다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 단단한 인연이 켜켜이 쌓인 것이다.
그러면서 강거혁이란 사람에 대해서도 제법 알게 된 것들이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이 작은 거인은 남에게 부탁이란 걸 잘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태웅이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는 거 같아서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어렵사리 말을 꺼낸 건 그만큼 제자에 대한 사랑이 대단하면서 동시에 자신으로선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곁에는 클로에, 어깨 위엔 솜이를 앉힌 도진은 그렇게 강거혁이 꺼낸 말에 눈을 맞추고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태웅이에게 문제가요?"
"그래. 자네라면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강거혁의 말에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거 같긴 했습니다."
신안(神眼)을 뜨고 장호에게 '사람 보는 법'을 배운 도진이다.
벽태웅이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무언가 걱정거리가 있다는 것 정도는 꿰뚫어 보았다.
다만 먼저 말하지 않는 걸 억지로 들춰내는, 도움을 넘어 '오지랖'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여 아직 지켜만 보고 있었을 뿐이다.
"아무래도 보육원이랑 관련된 문제인 모양이야. 얼마 전 한 번 찾아갔었는데 분위기가 조금 뒤숭숭하더군."
"음."
벽태웅에게 있어 보육원은 집과 같았으니 버려진 갓난아이였던 벽태웅을 길러준 곳이 바로 그 보육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보육원의 문제는 벽태웅에게 있어 우환과 같았다.
"아이들 중 몇이 나쁜 무리와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것 때문에 태웅이가 걱정이 많은 듯한데 나로선 어떻게 참견하기가 어렵더군."
"그러셨군요."
"그러니까 미안하네만 자네가 좀 이야기를 들어주면 어떻겠나 싶어서 이야기를 꺼냈어."
강거혁은 조금 면목없다는 얼굴이었다.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런 일이라면 아무래도 제가 말을 걸어 보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오늘 바로 이야기를 꺼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예."
강거혁은 무언가 어려운 부탁을 했다는 얼굴이었지만 도진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벽태웅은 오히려 무어라도 도와주고 싶어지게 만드는 후배였으니까.
성민혁네의 공사 때도 그랬고.
"선배님, 도우러 가겠습니다."
"아, 고마워."
성지인의 이사 때도 그랬다.
"이런 건 제가 조금 할 줄 압니다."
"그래?"
솔선수범 할 줄 알면서 싹싹하고 부지런하다.
웃으며 먼저 도와주러 달려오는 그런 고마운 후배.
그런 후배에게 어떤 일이 생겼다면 당연히 도와주고 싶어지지 않겠는가 말이다.
"집행부 일 끝나고 한 번 이야기해 봐야겠어."
그래서 도진은 저녁에 벽태웅과 한 번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곁의 클로에가 조금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왜 그래?"
"나쁜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지만, 보육원 출신의 아이라 걱정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음, 그렇지."
그것은 선입견으로 나온 말이 아니었다.
클로에가 뒷골목을 전전하던 '고아 거지 소녀'였었기 때문에 나온 순수한 걱정이었다.
"가정이 없는 아이들은 쉽게 나쁜 길로 빠지고 맙니다. 그리고 그렇게 빠진 아이들은, 대부분 데리러 와 줄 사람이 없습니다."
"응, 그렇네."
그 아이들은 '돌아갈 곳'이 없다.
중심을 잡고 이끌어줄 이도 없다.
그러니까 '나쁜 힘'에 너무나 쉽게, 돌아가지 못하고 끌려가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일이 생각보다 어려울지도 모른다.
벽태웅 또한 그래서 더 걱정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도진은 그것까지 감안하여 좀 더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는데, 벽태웅에 앞서 그와 관련한 이야기를 꺼내는 소녀를 마주하게 되었으니.
"오빠. 이야기 드릴 것이 좀 있어서요."
"응, 상미야."
다름 아닌 윤상미였다.
저녁. 벽태웅에 앞서 도진은 상미와 마주하여 그녀가 꺼내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제가 있던 보호소에 조금 문제가 있는 거 같아요."
"몇 명이 보호소를 무단으로 나갔는데, 그렇게 나간 애들이 불량 서클에 들어간 모양이에요."
상미가 꺼내는 이야기가 바로 벽태웅의 고민과 이어져 있었다.
* * * *
본래 상미가 있던 보호소는 집에 문제가 있거나 그 외의 이유로 모인 청소년들을 돕는 시설이다.
집의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머무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독립을 하기 위해 기술을 배우거나 직업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도 있다.
그런 시설의 성격상 여러가지 규칙들이 있는데 그 규칙을 어기고 아예 보호소를 나가 불량 서클, 아니 '흑도 조직'이라 해야 할 곳에 들어간 아이들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흑도 조직이라니, 조금 심각한 문제네."
"네."
무림이 존재하는 현대 사회에서 흑도 조직이란 빛이 있는 이상 사라질 수 없는 그림자와 같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방치할 수 없는 건 그것이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라 점점 넓고 진해지며 악취를 풍기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방치하면 점점 더 덩치가 커지고 대담하게 활동 영역을 넓혀 행패를 부리니 주기적으로 그 세력을 억누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상미가 머물렀던 보육원 근처의 흑도가 그렇게 한 번 세력을 억눌러줘야만 할 시기가 온 듯했다.
'덩치를 키우려는 건가.'
흑도 조직의 조직원 확충 루트 중 하나는 싹수가 노란 무림학교 중고등반 학생들의 스카웃이다.
뒷골목 은어인 '새끼'가 그러니까 회사의 인턴 개념이다.
한데 그 흑도 조직은 그걸 넘어 보호소와 보육원의 아이들까지 끌어들이는 모양이었으니.
"…예. 동생 몇 녀석이 꾐에 넘어갔습니다."
상미, 그리고 클로에와 함께 만난 벽태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이쯤 되면 평범한 흑도 조직의 세력 확장을 넘어선 '사건'이라 할 만한 일이었으니 무림인도 아닌 일반인들마저 끌어들이고 있었다.
"위험하니까 당장 그놈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해도 말을 듣질 않더군요."
그렇게 말하는 벽태웅의 얼굴은 제법 복잡했으니 어떻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흐음. 그 흑도 조직에 관해서 알아본 건 있어?"
"근처 일진 학생들을 모조리 끌어들인 것 같았습니다. 학생들이라 그렇지 규모가 보통이 아닌 듯 했습니다."
"그래."
만약 그것이 흑도 무인들의 집결이었다면 대번에 무림맹이나 정부의 관련 부서에서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직 학생들의 영역이고 가시화된 사건이 없다 보니 아직 이슈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안하지만 지윤이한테 부탁을 해야겠네.'
나지윤은 하고 있는 일이 많다.
거기에 당장 얼마 전에 동물원에서 얻은 시료와 관련한 일까지 부탁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안하지만 일을 하나 더 부탁해야 할 듯싶다.
상미가 머물렀던 보호소의 밥과 잠자리는 따듯했고 직원들 또한 자신의 일에 충실했으니 거기 머무는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평범하지만 그렇기에 역할을 다하는 보호소에 상미는 관심과 후원을 끊지 않고 있었는데 그 보호소와 벽태웅의 집이나 다름없는 보육원이 얽힌 일이었으니 말이다.
도진은 바로 나지윤에게 연락해 관련 정보를 부탁했다.
-그래. 곧 취합해서 보내줄게.
"고맙다."
나지윤은 이야기를 꺼내자 바로 알고 있던 일이라는 뉘앙스로 말했다.
아마 이틀 내로 정보를 보내주지 않을까 생각한 도진은 통화를 끝내고 말했다.
"우선 한 번, 태웅이네 보육원에 가 볼까 하는데 괜찮을까?"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것이야 정보를 받은 뒤가 되겠지만 그때까지 가만히 있기보단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좋다.
도진의 말에 벽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선배님께서 말씀해 주시면 그 녀석들도 귀담아 들을 겁니다."
그리하여 도진은 다음날 방과후, 벽태웅의 고모와 고모부가 있는 보육원에 들르게 되었다.
* * * *
상미가 머물렀던 보호소의 학생들은 이미 무단으로 보호소를 나갔으니 당장 만날 수가 없다.
때문에 도진은 흑도 조직과 연관된 불량 학생들과 어울리지만 그래도 돌아오기는 하는 아이들이 있는 벽태웅이 자랐던 보육원으로 향한 것이었다.
"아, 어서 오세요."
"예, 안녕하세요."
도진이 벽태웅과 클로에, 그리고 상미와 함께 오자 보육원의 원장 부부가 맞이해 주었다.
아이들의 고모이자 고모부가 되어주는 그들에게는 언제나처럼 자연스레 사람들의 존중을 이끌어 내는 분위기가 어려 있었지만 동시에 어두운 부분이 묻어나고 있었으니 예의 불량 학생들과 어울리는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다.
"어제도 안 들어왔나 보네요."
"그래. 전화도 안 받고 걱정이네."
벽태웅의 말에 여원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현실적으로 아이들이 모두 천사일 수는 없다. 설령 천사였더라도, 그들 부부가 최대한 노력하더라도 하얀 날개가 검게 물들기 쉬운 외부 환경이었으니 그런 식으로 엇나간 아이들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더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그녀 또한 느끼고 있었으니 요즘 주변에서 들리는 이야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이들이 제발 정신을 차리고, 최소한 사고를 치지 않기를 그녀는 바랐지만…….
"예, 예?!"
하늘은 인간의 바람에 무심하니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남원장의 놀란 목소리가 울려 퍼진 이유를 도진은 통화 내용을 들어 이미 알고 있었다.
-집단 패싸움에 아이들이 연루되었습니다. 보호자 분께서 출석을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 * * *
이제 겨우 해가 지고 어둑해질 즈음 패싸움이 벌어졌다.
수십여 명이 얽혔던 패싸움은 주민의 신고로 인해 중간에 강제로 중단되었고 싸우던 이들은 모조리 연행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연행된 이들 대부분이, 학생들이었다.
자연스럽게 연락을 받은 그들의 보호자들로 지구대는 북적일 수밖에 없었고 고성이 오갔다.
"아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우리 애가 가해자라니!"
"저 못 배운 폭력배 새끼들이랑 우리 애를 똑같이 취급하는 게 말이나 됩니까!!"
버럭버럭 소리치는 건 오히려 상대적으로 상처를 덜 입은 아이들의 보호자들이다.
제법 말쑥하게 차려입은 어른들.
그리고 그들이 소리치며 삿대질하는 쪽에 있는 건 더 엉망이 된, 곁에 보호자가 거의 없는 아이들이 모인 쪽이다.
더 심하게 다쳤음에도 입을 열지 못하는.
그래서 더 눈에 독기가 어린 아이들의 모습에 누군가가 열이 올라 버럭 소리쳤다.
"이래서 애미애비 없이 못 배워 처먹은 새끼들은!"
"뭐 이 씨발 새꺄!"
선을 넘은 발언에 결국 아이들 중 몇이 폭발한다.
"말이 좀 심하시네요."
그리고 터져 나온 울분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현장에 내려 앉고, 그 목소리보다 분명한 존재감을 지닌 이가 지구대 안에 들어섰다.
"어, 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