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화
의천검가는 왕실의 무예를 이은 것이지 '왕위'를 이은 것이 아니다.
하물며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니 설령 왕위를 이었다 해도 그것은 명예의 영역에 있는 이야기이지 실질적인 신분의 구분이 될 수 없다.
허나 의천검가는 자신들이 '왕위를 이은 가문'으로 보이길 바랐다.
그 마음이 반영된 것 중 하나가 의천검가의 체계였다.
가문의 중심이 되는 가주를 가장 위에 두고 그 아래 장로회를 두었으니 왕과 관료 체계를 연상케 한다.
언뜻, 겉으로는 가주의 독단을 막고 민주주의를 반영한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그리 기능할 수도 있었겠으나 전대부터는 오히려 가주의 권한을 강화하는 쪽으로 기능하고 있었으니 바로 지금 가주의 집무실에서 가주에게 강력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수석 장로 때문이었다.
고수임에도 제법 세월의 흔적이 진한 그는 실제로 70이 넘은 나이의 노고수(老高手)였다.
무림 르네상스 시절 이미 의천검가의 중역이었던 그는 의천검가 장로회의 수장으로서 아직 현역에 있었으며 그만큼의 연륜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 깐깐한 얼굴에 드러나는 그대로의 성격에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나 의천검가가 '왕가(王家)'이길 바라는 마음이 강한 게 단점이었다.
수석 장로, 동근출을 마주하는 가주는 그런 수석 장로의 성격에서 나온 이번 의견을 듣기가 힘들었다.
'이미 다 끝난 일을…….'
허나 그런 마음을 고스란히 표출할 수는 없었으니 바로 그가 가주인 자신을 지지함으로써 절대적인 권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서로 견제를 해야 할 장로회는 지금 수석 장로인 동근출에 의해 가주를 오히려 밀어주고 있었다.
본래 선이 부드럽고 둥글었던 인상의 가주는 그러나 세월의 풍파에 제법 모나고 거칠어진 얼굴이 되었다.
그런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예. 이대로 웃으면서 넘어갈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이번 일은 더 이상 끌고 갈 수 없지 않겠습니까."
미숙한 무사들만이 있던 자리여서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다.
그 뒤의 진행 또한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만 했고.
"그나마 둘째가 현명하게 처신해 이 정도로 봉합한 게 다행이었지요."
이문호가 들었다면 자신의 귀를 의심했을 발언이었다.
첫째의 반도 하지 못하는 못나고 어리석은 놈.
이문호는 아버지, 가주가 자신을 그리 여기고 있다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수석 장로 동근출은 가주의 말에 탐탁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차악은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명분은 이미 그쪽이 쥐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만약 일이 심각해졌다면, 그래서 정말로 충돌이 일어날 상황이 되었다면 오히려 의천검가는 더욱 큰 손해를 보았을 것이다.
'방구석 댓글러'들도 다 아는 이야기다.
정말로 싸움이 일어나면 의천검가와 잠룡문만의 싸움이 아니라 한국이 난리가 날 것이니 그렇게 둘 수는 없다.
그러니까 나라 전체가 나서서 싸우기 전에 '화해'를 종용할 텐데, 명분이 잠룡문에 있고 의천검가가 잘못한 일로 이미 매듭이 지어졌으니 의천검가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건 절대로 안 될 말이었다.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이문호는 입학식 전까지 '폐관'을 명 받았다.
가문의 잘못이 아닌 어디까지나 미숙한 둘째의 잘못으로 선을 긋기 위해서.
언제나 해오던 방식대로, 폐관하여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야깃거리가 더 나오지 않도록 차단했다.
의천검가의 가주 이청범은 그것으로 끝낼 생각이었던 일을 수석 장로 동근출이 다시 꺼낸 것이다.
"좋은 생각이 있으십니까?"
그래도 의천검가라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문의 수석 장로였던 동근출은 그저 감정만을 앞세우는 이가 아니었기에 가주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곧 문강이의 폐관이 끝나지 않습니까."
"…예. 그렇지요."
의천검가의 역사에 있어서도 손꼽히는 크나큰 사건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가주도 수석 장로도 그것을 의도적으로 모른 채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문강이가 복학을 하게 되면 2학년 2학기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예, 그렇지요."
"그리고 문강이는, 집행부의 부장이었습니다."
"……으음."
이야기는 다 끝나지 않았으나 다 들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주의 머릿속으로도 단번에 많은 생각이 스쳐간다.
"잠룡문주는 3학년이 되었음에도 집행부 부장의 자리에 계속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꾸준히 수업을 들을 생각인 듯하더군요."
"예, 그랬지요."
"그렇다면, 분명히 마찰이 발생할 겁니다."
그 마찰에서 이번처럼 당하지 않고 제대로 갚아 주자.
수석 장로 동근출의 의견은 그것이었고.
"예. 좋은 생각 같습니다. 우리가 첫째를 밀어줘야지요."
문주 이청범이 아버지의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들이 모종의 계획을 세우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들은 그리 달갑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올해 숭무고 입학식 특별 연설의 주인공은 잠룡문주 김도진!
* * * *
입학 시험 비무로 신입생들의 순위가 정해지고 입학식이 다가왔다.
그 사이 성지인의 이야기는 막바지에 이르러 책상을 만들기 위한 이야기가 업로드 되었다.
-이걸 이제서야 만드네 ㅋㅋㅋ
-ㄹㅇㅋㅋ 책상을 만들기 위해서 그 전에 사람부터 만든다 ㅋㅋㅋ
-오, 그러고 보니 성지인이 이번 입학 시험 비무 1등이잖아.
-그래서?
-신입생 선서 성지인이 하겠네 ㅋㅋㅋ
-오 ㅋㅋㅋ 그러네? ㅋㅋ
채팅창과 댓글로는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보 하나가 떴으니.
-야. 올해 숭무고 입학식 특별 연설 김도진이라는데?
-헐ㅋㅋㅋ ㅁㅊㅋㅋㅋ
-열아홉에 특별 연설? 이거..
숭무고의 입학식은 그야말로 '별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면면들이 손님으로 참석하곤 했다.
학생들부터가 대한민국에서 최고였으니 그들과 관련 있는 이들과 손님 또한 최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히 그 무대 위에 올라 마이크를 잡는 이들 또한 특별할 수밖에 없었는데, 거기에 무려 재학생으로 도진이 서는 건 더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특별 연설은 졸업생이 맡는다.
그러니까 보통 '졸업생의 특별 연설'이 되고 숭무고의 졸업생 중 그럴 의사가 있으면서 특별한 자리에 있는 이들이 마이크를 잡게 된다.
하지만 거기에도 예외가 있어 유일하게 재학생임에도 마이크를 잡은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금군 한유성이었다.
그래.
열아홉의 나이로 A-1 자격증을 따고 서른이 되기 전 무림에서 금군(金君)이라 불리며 정점에 오른 한유성.
그만이 유일하게 열아홉에 재학생으로 특별 연설을 했었다.
두 번의 특별 연설과 함께 그만이 가지고 있는 기록 중 하나였는데, 이제 그 기록을 보유한 이가 둘이 된 것이다.
뚜벅. 뚜벅.
입학식.
자신의 차례가 되어 무대 위에 오르는 도진은 그런 배경으로 자신에게 집중된 관심에도 전혀 존재감이 흐려지지 않았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관심과 그로 인한 분위기는 결코 가볍지 않았고 옅지 않았다.
웬만큼 뛰어난 이라도 호흡하는 공기가 무겁게 느껴질 만큼의 압박감이 실체가 되어 어깨를 짓누를 것인데.
오히려 도진은 그 모든 것이 자신을 빛나게 만드는 장치로써 존재하게 만들었다.
신입생 대표로 이 길을 걸었던 그때처럼.
아니, 오히려 그 이상으로 선명한 존재감으로 모두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무대 위 마이크 앞에 섰다.
그리고 신입생들을 마주했다.
성민혁, 성지인, 이문호.
그 뒤로 삼백여 명에 이르는 신입생들의 시선을 하나하나 마주하고서야 도진의 입이 열렸다.
"반갑습니다. 3학년의, 집행부 부장을 맡고 있는 김도진입니다."
"여러분과 같은 학생의 입장에서 무언가 거창하게 인생의 목표는 어떻게, 무림은 어떻다, 같은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바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앞으로 이 학교를 졸업해서 한국을, 한국 무림을, 더 나아가 세계의 무대에서 리더가 되어 이 시대를 살아갈 겁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세대를 살아가겠죠."
"저는 여러분들이 저와 함께 '황금 세대'를 만들어낸 시대의 주역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미래의 후손들이 역사를 배울 때, 단순히 '그들'이 아니라 누구누구가, 또 누구가, 지금의 좋은 세상을 만들었다고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저와 함께 그런 사람으로서 살아갈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담담히, 그러나 모두의 귀를 넘어 영혼에 파고드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도진은 학생이라 하기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새내기들의 눈을 계속해서 마주했다.
* * * *
아직은 어린 학생이지만 그 지식과 살아온 환경이 어린 학생으로 있는 걸 허락지 않는다.
그런 숭무고의 새내기들이기에 도진은 그들이 자신의 연설대로 '착하게' 사는 건 힘든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힘든 일이라고 해서 외면한다면 결국은 쉬운 일로 달성할 수 있는 쉬운 업적, 혹은 나쁜 업적만이 남을 뿐이다.
도진은 그들이 힘들더라도 더 나은 길을 걸어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다행히, 이번 년도 집행부에는 벌써 그럴 수 있는 새내기가 '셋'이나 있었다.
"자, 모두 새내기들에게 박수!"
"어서 와!"
"앞으로 잘해 보자."
도진을 시작으로 박수를 치며 맞이해주는 기존 집행부의 멤버는 제법 수가 줄었다.
3학년이 모두 졸업했고 이제 3학년이 된 도진의 동기들 또한 반수 이상이 무림으로 나아갔으니까.
오대용과 주정아, 그리고 나지윤은 이제 학교보다는 무림과 사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게 되었다.
그러니까 3학년에 남은 건 이제 도진과 소담 둘뿐이다.
여기에 2학년이 된 우서진과 윤상미, 그리고 약리지와 벽태웅, 남사현까지 일곱 명이 기존의 멤버들이다.
그리고 올해 세 명이 새로 집행부에 들어왔으니 새내기인 성민혁과 성지인.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외국에서 편입한 덴젤 공방의 프린세스, 2학년 클로에 덴젤이다.
클로에 덴젤은 이제 일상 생활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제법 치료의 진도를 뺐다.
여전히 한 달에 한 번은 필히 도진의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성취가 있어 이제 평상시엔 스스로 불사마공을 수련하며 체질을 개선할 정도가 된 것이다.
그런 고로 이번 겨울 방학 때는 한국보다 프랑스에서 더 오래 머물며 덴젤 공방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입학식에 맞추어 돌아와 정식으로 숭무고의 학생이 됐다.
"그러니까 2학년이지만 새내기야. 우리 제자 앞으로 잘 부탁해."
이래저래 안면도 있고 다들 모나지 않은 성격이었기에 '2학년 새내기'인 클로에 덴젤은 물론이요 성민혁과 성지인 역시 약간의 어색함이 남은 가운데서도 좋은 분위기에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 좋은 분위기였던 집행부에.
똑똑.
"실례하겠습니다."
열린 문을 통하여 이질적인 분위기가 섞여 들었으니 의천검가의 이문호를 필두로 한 신입생 세 명이었다.
"어서 와."
마치 적진에 단기필마로 출두한 장군 같은 기세의 세 사람을 도진은 웃는 얼굴로 맞이해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입부 신청서를 내러 왔습니다."
전혀 긴장을 풀지 않은 얼굴의 세 사람 중 이문호가 대표로 나서서 입부 신청서를 내밀었다.
예상대로, 이문호는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입부 신청서를 낸 것이다.
도진은 웃는 얼굴 그대로 그 입부 신청서 세 장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훑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환영할게. 앞으로 잘 부탁해, 새내기들."
"아, 그, 예?"
먼저 손을 내미는 도진을 마주한 이문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