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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414화 (414/741)
  • 413화

    분명히 처음 보는 소년이었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쭉하며 밸런스가 잘 잡혀 있는 자세에서 좋은 가문에서 좋은 무공을 배운 티가 난다.

    여기에 고급스런 무복과 분위기까지 갖추고 있는 그가 누구인지, 도진은 처음 보는 소년이지만 잘 알고 있었다.

    "문주님."

    "네, 눈나."

    "이제 문주님도 이런 걸 외울 때가 됐어."

    쿵!

    오성아가 그렇게 말하며 큰 소리가 나게 내려 놓은 것은 인명록(人名錄)이었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 알아두어야 할 유력자(有力者)들이 적혀 있는.

    "고마워요. 며칠 내로 외울게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어마어마한 두께에 기겁을 했겠으나 도진은 이제 평범하지 않았기에 웃으며 오히려 감사를 표하고서는 정말로 3일 만에 그것을 외워 버렸다.

    그것이 도진이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상대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는 건 정말로 크나큰 무기이다.

    FPS 게임으로 따지면 상대의 위치를 알고서 교전에 들어가는 수준의.

    이제 도진은 더 이상 평범한 학생이 아닌 한 사람의 '유력자'였고 그 위치에 있는 이라면 필히 다른 유력자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만큼은 꿰고 있어야 했다.

    때문에 오성아는 도진이 알아야 할 이들의 목록을 정리해 주었고 도진은 그에 감사를 표하며 목록을 외운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기에 도진은 초면임에도 소년의 신분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얼굴. 그리고 무복에 금실로 수놓인 검과 삼족오.

    소년은 대한민국 왕실의 무공을 계승했다는 의천검가의 둘째 아들 이문호였다.

    '흐음.'

    누구인지를 알고 있으며 그 성향 또한 숙지하고 있었기에 왜 초면에 적의를 보이는가에 관해서는 몇 가지 추측이 가능했다.

    "성민혁 학생! 바할라에서의 수련에 관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번 관문 시험에서 몇 등을 기록하실 것 같습니까?!"

    도진은 그렇게 떠오르는 생각을 몰려드는 기자들의 목소리에 잠시 미루어두고 성민혁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성민혁은 그 사이 제법 자신감이 붙었는지 어깨를 당당히 편 채 답했다.

    "큰 은혜에 보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성과를 오늘 보여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정석적이지만 괜찮은 대답이다.

    기자들의 입장에서야 두루뭉술해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었지만 그 이상은 기대할 수 없어 보였기에 바로 도진에게로 카메라와 마이크를 향했다.

    "잠룡문주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성민혁 군이 몇 등을 할 거라고 예상하십니까?!"

    제법 목소리가 큰 두 기자의 말이 유독 귀에 박힌다.

    도진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예상이 가긴 하는데, 이 자리에선 대답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제 말로 인해 시험에 영향이 가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요."

    작은 목소리지만 분명하게 귀에 박힌다.

    다만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면 그것이 가려질 것만 같아 기자들은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사위를 조용하게 만들고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만든 도진의 말이 끝나자 기자들 중 한 명이 빠르게 질문을 던졌다.

    "옆에 함께 하고 있는 여학생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누구인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성지인입니다."

    "……예?"

    "성지인입니다. 자세한 건 너튜브를 통해 공개할 예정이라 여기서 자세히 이야기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입학 시험 비무는 제법 볼 만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판단이 살짝 유예된 사이 도진은 빠르게 그런 말을 남기고선 스스슥 사라져 정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버버하는 사이 도진의 일행 전부가 그렇게 기자들 무리를 빠져 나가 버렸고 뒤늦게 소란이 일었다.

    "그, 그 여학생이 성지인이라고?!"

    "뭐, 뭐야! 아니! 사진! 야, 너 사진 찍었지?"

    "예! 예! 찍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특종을 건졌다는 생각에 기자들이 바빠졌고 개중 베테랑들은 감탄을 했다.

    "와, 장사 잘하네."

    "그러게요."

    그들로서는 도진의 너튜브를 자발적으로 홍보해 주게 생겼다.

    대신 광고를 해 줄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너튜브에 성지인에 관한 부분이 공개될 거라는 내용을 빼기에는,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그럴 거라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설령 모두가 그 내용을 뺀다 해도 상관없다.

    정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당연하게도 도진의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ㅁㅊㅋㅋㅋㅋㅋㅋㅋ 성지인 봤다 ㅋㅋㅋ

    -야 성지인 진짜 환골탈태 했는데? 김도진 사실 환골탈태한 족고수라서 다른 사람도 환골탈태 시킬 수 있는 거 아니냐?

    벌써부터 커뮤니티엔 그런 이야기가 퍼져 나가고 있었으며 심지어 사진마저 업로드되었다.

    초상권 등의 이유로 얼굴은 모자이크 되었지만 그 외의 부분은 그대로 업로드 되었으니 당연히 난리가 날 수밖에 없다.

    "부럽다. 대애충 올려도 100만 클릭은 그냥 찍겠네."

    "백만이 뭡니까. 시간만 지나면 천만도 찍을 걸요. 거 성민혁 학생 이야기는 벌써 300만이드만요."

    그렇게 기자들과 커뮤니티에 폭탄을 투척하고 학교 안으로 들어선 도진 일행에게, 한 무리의 무인들이 다가왔으니 다름 아닌 이문호를 필두로 한 의천검가의 무인들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선배님. 의천검가의 이문호입니다."

    대표로 나서서 우아하게 인사하는 이문호는 과연 명문가의 번듯한 귀공자 태가 난다.

    도진은 웃으며 그 인사를 받아 주었다.

    "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하하하. 선배님, 앞으로 후배가 될 텐데 편하게 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네요. 입학이 확정되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럼 합격하고 다시 한 번 인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예.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이문호는 가볍게 대화를 나누고, 모두에게 인사를 한 뒤 떠나갔다.

    그렇게 그들이 떠나가자 소담이 조금 더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왜 깐 거야?"

    "까다니. 고운 말 해야지."

    도진의 말에 소담이 귀엽게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 깐 거야?"

    "귀엽게 말한다고 해서 말이 고와지는 건 아니잖아."

    "헤헤. 어쨌든!"

    도진은 피식 웃고서 말했다.

    "좋은 녀석이 아니니까."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인사였지만 사실은 도진이 이문호를 밀어낸 것이었다.

    편하게 대해달라는 말에 '합격하면'이라고 조건을 단 도진의 행동이 바로 그것이다.

    그 말은 다른 사람도 아닌 '의천검가의 둘째'가 숭무고에 합격할 거라는 확신을 도진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그들이 사는 세계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도진이 그런 식으로 이문호를 밀어낸 건 그저 처음 시선이 마주한 순간 눈에 어렸던 적대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법 재밌는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

    이문호와 인사를 나누고, 그래도 집행부의 부장으로서 부실에 들러 서류를 체크한 뒤 남는 시간에 나지윤을 통해 이문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재밌는 일?"

    "응. 너도 알고 있을 거야. 의천검가의 평가가 그렇게 좋지 않은 걸."

    "그렇지."

    왕실의 무공을 이은 정통 계승자로서의 상징성과 그에 부족하지 않은 무공으로 이름 높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문 무가 중 하나인 의천검가.

    그러나 그 상징성과 명성에 비해 이미지는 상당히 좋지 않은 편이었다.

    한 마디로 그들이 선민사상에 찌들어 있었기 때문에.

    왕실의 무공을 이은 것이지 '왕권'을 이은 게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월감에 취해 있었고 그로 인한 여러 마찰과 물의를 빚었으니 무림만이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좋은 이미지를 남기지 못한 것이다.

    아니, 그걸 넘어 '비호감 스택'을 과할 정도로 쌓았다.

    "이문호도 그런 전형적인 의천검가의 비호감이란 말이지. 하지만 또 유유상종이라고, 같은 녀석들끼리는 또 끈끈하게 뭉쳐 있어."

    소위 말하는 이문호 패거리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 다수가 숭무고에 합격할 거라고 나지윤은 말했다.

    "하나같이 명문가야. '급'이 맞는 녀석들끼리 뭉쳤다는 거지. 그러니까 관문 시험은 당연하게 통과할 거고 본 시험도 통과할 거라 봐야 해."

    어떻게 비틀고 꼬든, 어쨌든 실력이 있는 진짜라면 통과하는 것이 본 시험이다.

    운을 논하는 건 '어중간한 라인'에 있는 이들 사이의 일이니까.

    나지윤은 인성과 별개로 '진짜'인 이문호 패거리들 다수가 합격할 거라 보았는데 나지윤이 그렇다고 한다면 진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합격하는 녀석들은…… 집행부를 먹으려고 하는 거 같아."

    "호오."

    도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집행부를 먹는다.

    그래, 그런 시도가 머지 않아 있을 거라고 이미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한유아의 시대부터 지금 도진의 시대까지.

    숭무고는 유례없는 '평화'를 누려왔다.

    폭룡 류대현으로부터 시작된 싸움이 일진들의 집단인 숭무회를 박살냈고 집행부를 한유아 체제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다음해 도진이 세가 약해진 숭무회를 완전히 '박멸'해 버림으로써 일진 무리가 자취를 감추게 만들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그리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도진에게는 있었다.

    그런 도진의 존재로 인해 적어도 겉으로 일진이요 하고 어깨에 힘주는 학생은 완전히 사라졌단 말이다.

    허나 올해로 '한유아 세대'는 3학년을 넘어 완전히 졸업을 해 버렸고 '김도진 세대'도 3학년이 되어 학교에서 다수가 멀어졌다.

    여기에 1년이, 그리고 2년이 지나면 김도진의 흔적은 빠르게 지워질 것이었고 그 자리를 다른 이들이 차지하는 게 당연한 흐름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할 이들은, 높은 확률로 지금과 같지는 않을 것이었다.

    도고일척 마고일장(道高一尺 魔高一丈) 같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듯, 힘을 가진 미숙한 학생이란 쉽사리 그것을 '나쁜 방향으로' 행사하고 싶어하니까.

    도진이 그것까지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다.

    허나 적어도 자신이 학교에 있는 한은 허락할 생각이 없었는데, 그 도진이 아직은 학생으로 있는 시기에 그런 의도를 가진 무리가 입학하려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됐다.

    "뭐, 적어도 이번 년도만큼은 대놓고 활동하려고 하진 않을 거야. 그 정도 머리는 있는 녀석이거든, 이문호가."

    멍청하면 무공도 제대로 익힐 수 없다.

    당연히 이문호는 제법 '객관화'를 할 수 있는 녀석이라고 나지윤은 말했다.

    "다만, 그래. 어디까지나 일진 행세를 대놓고 하지 않는다는 거지 아마도 준비 작업은 입학하자마자 시작할 거야. 이를테면……."

    집행부 입부 신청이라든가.

    나지윤의 말에 도진이 스윽 웃었다.

    "그렇네. 그럴 수 있겠네."

    "아마도 분명히 그럴 거야."

    도진의 신안은 정확하게 이문호의 수준을 꿰뚫어 보았다.

    그렇게 꿰뚫어 본 이문호의 수준은, 하늘이 사필귀정하지 않듯 인성과 별개로 상당히 높았다.

    그 정도라면 분명히 상위권으로 본 시험을 통과해 집행부의 입부 자격을 만족할 것이다.

    "굳이 싸울 필요도 없지. 자격을 갖춘 학생의 입부 신청을 기존 집행부 멤버가 임의로 거절할 근거는 없고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을 이문호는 절대로 만들지 않을 테니 입부는 확정이야."

    그리고 그렇게 입부할 수만 있다면, 도진과 지금 2학년들이 졸업한 뒤에는 이문호가 자연스레 실세가 된다.

    "제법 머리를 굴리고 있겠네."

    "그럴 거야. 그리고 하나 더."

    나지윤의 눈이 도진을 마주한다.

    그리고 입술이 열렸다.

    "빠르면 2학기에, 한 명의 문제아가 복학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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