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다른 사람이 들으면 농담하지 말라고 하겠지만, 사실 그녀는 평생을 열심히 살지 않았다.
다만 그렇다고 삶을 낭비한 것은 또 아니었다.
열을 할 수 있지만 일곱만 했다.
외부에서 보기에 여섯을 할 수 있는데 일곱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그녀가 '배부른 돼지'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벌가에서 태어나 그러려고 했다면 배부른 돼지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성인이었고 성취욕이 있었으며 외부에 인정도 받고 싶어하는 '배고픈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리 하고 싶지 않았고 취향도 아니었던 오성 재단에서의 엘리트 생활을 해 왔던 것이다.
당장 주변에 손에 잡히는 것이 그 일이었으니까.
그러면서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기에 나름의 '게으름'을 부려왔던 것이 도진을 만나기 전까지의 삶이었다.
중요한 건 그러면서도 사내에서 나름 인정받는 삶을 살아왔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었음을, 오늘 처음으로 오성아는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수한 적의(敵意).
그녀 주위 세상의 절반이 그녀에게 명확한 적대적인 감정을 쏟아내고 있었고 그것이 평생 단련해 왔던 표정 관리마저 실패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랬었구나.'
스스로의 힘으로 인정받았다 생각했다.
신분은 오히려 패널티였고 그 패널티마저 이겨낼 정도로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패널티라 생각했던 것 자체가 자만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녀는 분명한 '오군성 회장의 손녀'였고 적대하지 않아야 하는 사람이기에 지금껏 은밀한 배려를 받아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적대하지 않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게 된 지금, 그녀는 분명한 적의를 비로소 인식할 수 있었다.
'…어리광부리길 잘했네.'
부끄럽게도 연하의 동생에게 어리광을 부렸던 스스로를 칭찬한다.
이곳에 혼자 왔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여기서 한 번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적의의 파도에 휩쓸려 어딘지도 모를 곳에 내팽개쳐진 채 멋대로 이용당했겠지.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때려줄까요?"
상위 10%의 무림학교 고등반 학생들만이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섭음술.
그 섭음술을 넘어서 진짜 무림인들이 사용하는 전음을 사용하여 그녀의 오너는 미소짓는 얼굴로 말했다.
그냥 전음도 아니고 움직이는 입술을 읽는 독순술(讀脣術)조차 차단하는 특별한 전음으로.
오성아는 제 능력도 아닌데 그것이 자랑스러워서 아하하 웃고 말았다.
"야, 그러면 안 되지."
오성아의 섭음술을 통한 대답에 도진의 미소가 짙어졌다.
"눈나가 그러니까 관대한 제가 참을게요. 안주인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지."
도진의 너스레에 오성아가 미소지으며 조금 더 도진과의 거리를 좁혔다.
적대적인 시선은 여전하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장난치는 모습에 오히려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게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만큼이나 명확한데 겁을 먹을 만큼 그녀가 약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하고 싶은 것을 전력을 다해 할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결심했던.
그 결의의 상징인 핸드백 안의 사표를 의식하며 그녀는 당당하게 걸음을 옮겨.
이윽고 프레스티지 라운지에 입성했다.
* * * *
"……."
프레스티지 라운지는 그야말로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분위기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것이 인위적인 여유였기에 본능적으로 진입한 이의 호흡을 무겁게 만든다.
거대한 제국 오성의 중심이 되는 이들.
제국의 심장부를 구성하는 핵심 인물들이 연회장을 채우고 있다.
그들의 시선이 무형의 압박이 되어 막 프레스티지 라운지를 밟은 도진과 오성아를 옭아매려 든다.
저벅.
허나 그 시도는 도진이 아무렇지 않게 내딛은 한걸음으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으니 '새파란 애송이'여야 할 젊은 문주의 기세가 대번에 공기의 질을 바꿔 버릴 만큼 강렬했기 때문이다.
"……."
-껄껄. 제법 복마전의 흉내를 내는구나.
위지혁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래. 자신의 제자가 어디까지나 아직, 그것도 지금 잠시지만 애송이긴 하다만 그것도 천마 위지혁의 기준에서지 어디 다른 곳에서 그런 취급을 받을 만큼 허투루 가르치진 않았단 말이다.
그런 천마(天魔)의 후계자 앞에서 복마전 흉내라니. 오히려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저벅, 저벅.
그렇게 스승을 흡족하게 만든 도진에게 한 무리가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도진의 시선이 그 무리의 중심이 되는 인물에게로 향한다.
범상치 않은 기세의 중년인이다.
무림인으로서도 경지에 달해 있지만 타고난 본성 그 자체가 평균을 아득히 넘어서는 기세를 풍긴다.
건장한 체격에 세상을 오시하듯 선명하면서도 날카로운 눈이 특징적인 그는 대한민국에서 호부(虎父) 밑에 견자(犬子)없다는 말을 인생으로 증명한 사람.
무림에서는 태사자(太獅子)라 불리며 오성에서는 오군성 회장의 장남이자 오성 그룹 부회장으로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오주형이다.
"반갑습니다, 잠룡문주."
그가 손을 내밀며 인사하자 도진이 그 손을 마주잡아 악수하며 인사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오주형 부회장님."
"……."
오주형의 뒤에 도열해 있던 이들에게서 얼핏 불편한 감정과 표정이 스쳐간다.
'감히' 오성의 2인자 앞에서 너무 뻣뻣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위연서를 포함한 도진의 뒤에 도열해 있던 독마전의 교도들이 그런 기색을 놓치지 않고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소지존의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할 것들이.'
위연서는 특히 그렇게 생각했지만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잘 참았다.
"대용이와 친하게 지내신다 들었습니다."
"네. 한 번 찾아뵀어야 했는데, 그런 시간을 만들지 못했었네요."
오성의 2인자.
그러나 도진에게는 그것보다 오대용의, 그리고 지금 곁에 선 오성아의 아버지라는 게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예상했던 대로……네.'
오군성의 장남으로 대를 이어 흔들리지 않는 지배 구조를 이어나갈 것이란 평가를 받는 거인.
아버지를 뛰어넘진 못했으나 그것은 오군성이 희대의 인물이기 때문이지 그가 부족하기 때문은 아니라는 평을 받고 있다.
다만 그런 평가를 받기 위해 가정에 지극히 소홀했음을, 도진은 오성아와 오대용을 통해 알고 있었다.
간단한 이야기다.
오대용의 친구임에도 도진은 '오대용의 아버지 오주형'을 지금껏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다.
그렇게 둘을 양립하지 못했던 그는 가정의 비중을 줄였고 그것이 특히 오대용을 엇나가게 만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는 철저하게 사무적으로 시선을 교환할 뿐 도진의 곁에 있는 눈부시게 예쁜 딸과 이렇다 할 대화조차 나누지 않는다.
그 분위기는 심지어 그를 따르는 무리 안에 포함돼 있는 오대용과도 다르지 않았다.
도진의 시선이 향하자, 그제서야 이야기를 꺼냈다.
"대용이와 인사라도 나누시겠습니까?"
"네, 그러도록 하죠."
도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오대용을 두고 그를 따르는 무리와 함께 이동했고 도진은 오성아, 그리고 남겨진 오대용과 함께 중앙의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도진을 지키듯 독마전의 무인들이 주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고, 또 더 넓은 범위에서 오주형 사장측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앞으로 힘들겠다, 너."
자연스럽게 섭음술을 사용하여 말하는 도진에게 오대용 역시 피식 웃으며 섭음술로 말했다.
"내가 선택한 자리잖아.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지."
도진은 그 대답에 고개를 저었다.
"버티는 건 삼류가 할 일이고. 일류라면 바꿔야지."
"하. 가차없는 놈. 그래, 내가 더러워서 일류한다."
그 말은 쉽게 나온 게 아니었다.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산적한 이 아득한 문제들을 해결할 거라는 굳은 다짐이 있고서야 나온 말이었기에 도진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변을 스윽 둘러본 뒤 다시 말했다.
"살벌하네."
"그러게 말이야. 나도 참석하는 건 처음인데 상상 이상이네."
살벌하다 살벌하다 말은 많이 들었다.
사내 정치라는 건 어디가 되었든, 심지어 오성이라 해도 결코 사라질 수 없고 오히려 더 심한 부분도 있다더니 총과 칼만 없을 뿐이지 정말로 전쟁터 한복판에 던져진 것만 같다.
그리고 오늘은 유독 더 심했으니 오늘의 신년회에는 그럴 만한 사건이, 터질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 또한 오성은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신년회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군성이 나서서 축사를 한다.
누구보다 위에서, 누구보다 강하게 선언할 것 같은 이미지의 그는 그러나 연설에 부드러움이 섞여 있었으니 세상의 변화에 발을 맞춘 것이었다.
사자군 오군성은 무림을 대표하는 무인이지만 그 전에 사업가였기에.
패도적이면서 동시에 대상(大商)으로서의 면모 또한 보여준다.
그래서 그는 더욱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주도 하에, 축사 후 상벌위원회가 진행되었다.
"오도후 전무를 홍콩 지부 부사장으로 임명한다."
"강지훈 베트남 지부 사장과의 계약을 종료한다."
냉혹하게, 마치 선고하듯 오군성은 상벌위원회를 진행했다.
밟아야 하는 절차를 이후 밟아야겠지만 그 과정에서 오군성의 결정이 뒤집힌 일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오군성의 판단이 그걸 허용하지 않을 만큼 정확하고도 공정했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 별다른 실적이 없었음에도 3년을 기다려 주었다.
현지에서의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그곳에 녹아들어 성공하기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음을 오군성이 파악하고 기다려 주었다.
후자의 경우 1년 만에 제법 대단한 계약을 따냈음에도 오히려 그를 해임한 것은 그가 실적에만 눈이 멀어 장기적으로 볼 때엔 역으로 손해가 되는 방향으로 운영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오군성이란 초인이었다.
만약 그의 몸이 여러 개였다면, 가용할 수 있는 시간이 남들의 몇 배나 되었다면 차라리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을 만큼.
그러나 그 또한 사람이었기에 그럴 수 없어 인재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으니 그가 원하는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곳 오성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이름이 불렸다.
"성문 재단 오거우 이사. 해고.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직권을 남용하여 경찰 조사 또한 받고 있는 오거우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고 무어라 더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오거우의 해고는 찰나에 결정이 되어 버렸다.
이어서, 오대용의 이름이 나왔다.
"바른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사 오대용. 오성 하이테크로 발령한다."
두근!
심장이 뛰는 것조차 기다려주지 않고 오성의 군주는 그렇게 선언했다.
오성 하이테크.
오성 재단과 함께 오성의 양대 기둥으로 여겨지는 계열사다.
오성 재단이 오성 인재들의 무형적인 중심이라면 오성 하이테크는 기업의 본질인 '이익'의 측면에서 중심에 있다.
오주형 부회장이 오성 하이테크의 대표 이사를 겸하고 있다는 데에서 그 중요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사자천권의 이치에 닿고 바른 엔터를 통하여 실적을 낸 오대용을, 오군성은 한 번 제대로 밀어준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 편애는 없었다.
오성 하이테크로 간다고 해도 임원은 어림도 없는 일이고 실무 단계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완전히 밑바닥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적을 근거로 했을 뿐 오성의 직계 중 직계로서의 특혜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앞서와 다르지 않게 공정해 보이는 그 판단에.
스윽-
손을 들며 나선 이가 있었다.
오군성의 시선이 손을 든 이에게로 향한다.
50대를 넘어 60대를 향해 감에도 강렬한 눈동자를 지닌, 그러나 마른 몸이 신경질적인 인상을 동시에 선사하는 그는 오성 재단의 대표 이사였다.
그, 차진표가 말했다.
"해당 안건에 관하여 이견이 있어 손을 들었습니다."
이견(異見).
오군성의 판단 뒤에 나오기엔 참으로 이질적인 단어에 긴장감이 번진다.
"호오, 그래. 어떤 이견이지?"
그 긴장감과 사자군의 시선을 감당하며 움직인 차진표의 시선이.
스윽-
"……."
오대용의 곁에 있던 도진을 마주하며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