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화
서은혜는 스스로를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집안은 흔히 말하는 '졸부 집안'이었는데, 단순히 졸부라 할 수 없을 만큼 큰 돈을 번 벼락 부자였다.
그런 돈으로 졸부 집안은 당장 가질 수 없는 인맥과 명성을 얻기 위해 혈통은 타고났으나 돈이 부족했던 오거우, 오성의 회장인 오군성의 먼 친척이 되는 그에게 그녀가 시집을 간 것이었다.
너무나 정석적인 필요에 의한 정략결혼.
그러나 서은혜는 그 정략결혼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오거우도 그녀도 결혼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취해도 그에 따라오는 서로에 대한 속박은 원하지 않았으니까.
서류상의 부부가 되는 것으로 '졸부의 딸'이 아니라 '오성 계열사 간부의 사모님'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으니 최고의 결과였다.
그리고 아들이다.
좋은 혈통이 섞였기 때문일까 그녀의 아들은 예쁘기만 했다.
재능이 있어 사자군 오군성의 가르침 일부나마 배울 수 있었고 그 덕에 무림중학교의 왕으로까지 군림했다.
그녀의 아들이, 무림중학교의 왕으로 말이다.
학생은 물론이요 선생들마저 아들을 왕으로 떠받드니 학교에 방문할 때마다 이토록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 기분으로 지갑을 열어, 그러니까 기부라도 좀 하면 그녀 또한 왕의 어머니로서 추앙을 받았으니 학교에 가는 것이 즐겁지 않았던 때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법칙과도 같았던 학교 방문이.
-사모님, 빨리 와 보셔야겠습니다…….
오늘 깨어졌다.
버러지들이 바글바글 그녀의 '영토' 앞에 모여 있었다.
비집고 들어가 차를 대고 수행원들이 길을 뚫고서야 그녀는 차에서 내렸다.
십여 명의 수행원들을 대동한 그녀의 시선이 분노를 가득 담고, 오늘 일의 원인이 된 학생을 노려보았다.
김도진.
대한민국을 몇 번이고 떠들썩하게 했던 남자가 운동장 가운데 오연히 서 있다.
그리고 그 뒤로 잔뜩 주눅이 든 소중하디 소중한 아들이 보였기에, 서은혜는 빠른 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김도진을 지나쳐 아들의 곁에 선다.
"어, 엄마……."
아들을 보듬으며 서은혜가 말했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인가요!"
앙칼지게 목소리를 높이는 건 곁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서 있던 교장이다.
"그, 그것이……."
연락을 넣은 건 그가 아닌 교직원 중 한 명이었다.
교장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번들거리는 머리를 닦았고 그 사이 도진이 나섰다.
"제가 설명하죠."
평이한 어조에 작은 목소리인데 이 자리를 가득 채우는 힘이 담겨 있다.
그리하여 집중되는 모든 시선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내며 도진이 말했다.
"성민혁 군이 오중혁 군의 비싼 무복을, 이천만 원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무복을 버리게 되어 돈 대신 노동으로 대신하기로 구두로 약속했다고 하더군요. 알고 계셨나요?"
"……네."
대답의 사이 공백이 있었던 건 과연 그대로 대답해도 되겠는가 하는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길게 망설이면 더욱 좋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긍정을 확인하고 도진이 말을 이었다.
"그게 2년 정도 된 거 같은데, 아직 '잔액'이 남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민혁 군은 오늘부로 보충 수업을 그만두고 바할라로 유학을 가야 하거든요."
"……."
"그러니까 남은 금액을 앞으로 민혁 군을 후원하기로 한 바할라에서 일시불로 변제하기로 했습니다. 그 남은 금액을 확인하고 깔끔하게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아무래도 중혁 군은 아직 미성년자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호자와 이야기를 하고 해결하자는 결론을 내리고 연락을 드린 겁니다. 이해 안 되시는 부분이 있나요?"
"……."
최대한 덤덤함을 가장했지만 서은혜의 머리는 점점 더 복잡해졌다.
의도를 모르겠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김도진의 이미지는 그녀 또한 관심을 두지 않아도 온갖 곳에서 떠들어대는 탓에 잘 알고 있었다.
일진 같은 부류를 혐오하고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한데 지금 말을 들어 보면 문제가 된 사건의 금액을 변제하는 것만으로도 끝날 것 같지 않은가.
맘 같아선 아들을 겁 준 이 빌어먹을 놈을 성질 대로 해 버리고 싶은데 보는 눈이 너무 많다.
그러니까 지금은, 속이 뒤집어질 것 같지만 조용히 넘어가자.
서은혜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 변제 부분만 해결하면 깔끔히 끝날 일이란 말이네요?"
"네, 그렇죠."
"그럼 됐어요. 들어 보니 실수 때문에 일어난 일 같은데, 굳이 여기서 더 돈을 받을 필요가 있겠나요. 여기서 마무리하면 될 것 같네요."
여기서 그만 끝내겠다.
서은혜는 그렇게 말했고.
도진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게 끝내면 안 되죠."
"……네?"
"문제가 된 무복은 버려서 찾을 수 없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 정도 되는 오더메이드 제품이라면 전문적으로 해당 기록을 보관, 관리하고 있을 테니 영수증을 시간이 꽤 지난 지금도 다시 끊어줄 겁니다."
"그리고 중혁 군과 민혁 군의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일을 얼마나 했는지 문서화 할 수 있을 테고 그것을 객관적인 판단 하에 금액으로 환산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정리를 한 뒤에 깔끔하게, 일을 마무리 지어야죠."
"……."
그냥 넘어갈 생각하지 마라.
그런 의도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래,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어설펐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김도진은 어물쩡 넘어가지 않고 끝장을 본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끝장을 본 대상에는 무려 관현 그룹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에 대한 걱정과 공포, 그리고 쌓인 분노가 결국 그녀의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아니! 내가 됐다는데 뭘 그렇게 복잡하게!"
"목소리."
높아진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히, 그러나 일대를 찍어누를 만큼 무거운 도진의 목소리에 짓눌려 사라졌다.
도진의 눈이 서은혜를 마주한다.
"목소리 높이지 마세요. 뭘 잘했다고 목소리가 높아져요."
"……!!"
머리와 눈에서 불이 튀는 것 같았다.
압박감을 넘어선 분노와 치욕감이 그녀의 무거워진 입을 다시 떼게 만들었다.
"뭘 잘했다고?!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야!"
"애 교육을 그따위로 시켰잖아요."
쿠웅!
선명한 목소리가 일대에 퍼져 나가며 충격을 선사한다.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서은혜가 우뚝 굳어 버렸다.
그러나 그 충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당신이 그따위여서 아이가 엇나갔어요."
"당신이 그따위여서 아이가 엇나가서, 학교 안에 거기에 빌붙는 쓰레기들이 꼬이게 만들었죠."
오중혁의 친구를 자처하던 똘마니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엇나간 당신의 아이와 거기에 꼬인 쓰레기들 때문에 무고한 학생들이 공포에 떨면서 학교에 다녀야 했어요."
"그것을 바로잡아야 할 교장, 그리고 일부 교사들은 당신에게 꼬리를 흔들기 바빴죠."
눈깔을 굴리던 교장과 학생 주임 등이 똘마니들과 같은 모양으로 몸을 떨었다.
그리고 도진의 시선은 오중혁을 지나친다.
"나의 팬이라고 했던 아이였죠. 웃으면서 볼 수 있었을 겁니다. 다른 미래가 있었겠죠. 하지만 그것마저 당신이 망쳤습니다."
"그런데, 뭘 잘못했냐고? 그걸 모르니까 이따위인 거야. 알겠어?"
멈춘 시선은 이윽고 다시 서은혜를 마주한다.
"애 교육 똑바로 시키라고."
그 눈을 마주하며 서은혜는.
"죽여 버려어어어어어어!!"
분노가 폭발하여 발작하듯 소리쳤다.
본래 졸부 집안에 고용된 흑도 패거리였던, 지금은 깔끔한 정장 무복을 뒤집어 쓰고 신분 세탁을 했던 수행원들이 주인의 외침에 반사적으로 달려들었다.
덩치 크고 험상궂은 수행원들이 도진 한 명을 덮치려 든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꾸우우우웅-!
도진의 진각 한 번에 스위치라도 눌린 듯 멈춰 버렸다.
충격파가 일대를 묵직하게 휩쓴다.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치 온몸을 관통하는 듯한 감각만큼은 분명하게 남았고.
콰아아아아아아아-!!
그 감각을 느끼게 만든 힘은 운동장의 잔디를 모조리 뒤집어 버렸다.
쿠오오오오오오오-!
그것은 풀려나온 도진의 존재감과, 그 존재감에 깃든 분노를 상징하는 것처럼 힘의 여파에 미쳐 날뛰었다.
'위협'이 아니다.
그저 무흔잠영에 감춰져 있던 존재감이 드러난 것 뿐이었다.
허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존재감만으로, 일대를 지배하는 건 도진이 되었다.
진각을 밟은 도진은 옅게 웃었다.
그러나 미쳐 날뛰는 잔디 사이로 보이는 그 웃음은 마치 미증유의 공포를 억누르고 있던,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금이 가고 삐걱거리는 족쇄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벌벌 떠는 이들을 마주하며 도진은 위태로운 웃음을 유지한 채 말했다.
"말이 아닌 힘으로 하자는 건가요? 좋죠. 사실 저도 이런 상황에서 말로 하는 건 번거롭기만 하고 선호하지 않는 절차거든요. 무림인이라면 말이 아니라 무로써 해결해야죠."
드드드드.
수행원들은 손이 의지를 벗어나 떨리는 걸 자각했다.
자각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떨림과 함께 온몸으로 번졌다.
"선공을 양보할게요. 오세요. 오시면, 힘으로 해결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일게요."
도진은 백설조차 뽑지 않은 채 두 손을 늘어뜨리며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5분이 지나도록, 침묵에 의한 무게가 무릎을 꿇게 만들 정도로 무거워 질 때까지도.
단 한 명도 선공을 취하는 이가 없었다.
* * * *
성문중학교에서 일어났던 일은 들불처럼 번지고 폭풍처럼 온갖 커뮤니티와 언론을 휩쓸었다.
-"애 교육 똑바로 시키라고."
-씨바 지려 버렸다.
-분명히 예측을 하고 기저귀를 차고 있었는데 정신 차리니까 의자가 다 젖어 있었읍니다...
-아니 씨바 요즘 시대에 저런 말을 듣는 경험을 다 해 보는구나..
-아.. 내가 로얄 팰리스 사는데 저기 아파트 사는 애들이 부러운 날이 오네 시바 ㅋㅋㅋ
-이걸실(이걸 실시간으로 봤다는 뜻 ㅎ)
-베란다에서 실시간으로 관람했다 ㅋㅋㅋㅋㅋㅋ
-만약 오늘 이런 일 있을 줄 알았으면 집 바꾸자고 해도 바로 도장 찍었을 거다 ㅅㅂ
-뭔 개소리여 절대 안 바꾸지 ㅋㅋㅋ
-미국 대통령이 찾아와서 미국이랑 바꾸자고 해도 베란다 밖으로 걷어참ㅋㅋ
-미국은ㅁ ㅣ친놈아 ㅋㅋㅋㅋ
-아 ㅋㅋ 베란다 1열을 어떻게 포기하냐고 ㅋㅋ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일진 놀음하던 상류층 자제의 부모를 불러 면전에서 애 교육을 똑바로 시키라고 훈계를 하다니.
심지어 그 통렬한 훈계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도진이 항상 그랬던 대로, 잘못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만 했으니까.
오중혁과 그 똘마니들은 물론이요 교장과 일부 교사들, 더 나아가 성문재단 전체가 그 대상이었다.
도진이 말했던 '희대의 천재를 못 알아본 학교'의 불명예를 안게 된 성문중학교는 학교가 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숙청의 피바람이 불 것이고 그러고도 당장 입학 시즌인데 새로운 학생이 입학할 것인가를 피를 말리는 수준으로 걱정해야만 했다.
이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성문재단까지 올라갈 것이었고 그것은 즉.
-그런데, 좀 걱정되는데.
-? 뭐가?
-성문재단이면 오성이랑 관계있는 곳임.
-어?..
-김도진이랑 오성이랑, 꽤 깊은 관계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