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우연히 사람끼리 부딪치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고'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의 일반인 사이에서나 통용되는 말이다.
그러니까 일반인들이 사는 사회가 아닌, 무림인들이 사는 '무림(武林)'에서는 결코 상식이 될 수 없는 일이란 거다.
당연하지 않은가.
인간의 한계를 넘은 육체와 그 육체에 깃든 역시나 한계를 넘은 감각을 가진 무림인들이, 의도적으로 기척을 감추고 접근하는 게 아닌 이상에야 상대가 다가오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건 말이 되지 않으며 기습이 아니고서야 '자신의 범위 안'에 들어온 상대를 피하지 못하는 것 역시 말이 되지 않는 비상식적인 일인 것이다.
도진은 처음부터 알았다.
반찬통을 들고 가다 우연히 오중혁과 부딪쳤다는 부분부터가 오중혁의 '설계'였음을.
그것은 우연히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 오중혁이 성민혁을 함정에 빠뜨리고 부려먹기 위한 함정이었다.
만약 여기가 일반인과 무림인 사이에 걸치는 인식을 가진 무림중학교가 아니라 무림고등학교였다면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았을 함정.
오중혁과 부딪친 건 물론이요 넘어진 오중혁을 일으켜 주며 도진이 한 나직한, 그러나 일대에 있는 모두의 귀에 또렷하게 들린 말은 그 내막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무림학교 고등반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은 그런 도진의 의도를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일대에 싸늘한 적막이 내려앉는 중에 누군가가 허겁지겁, 학교 건물에서 달려나와 적막을 깼다.
도진의 시선이 천천히 향하는 그곳에 서는 건 다름 아닌 성문중학교의 교장이었다.
머리가 벗겨지고 배가 나온 교장이 숨을 훅훅 내쉬며 말했다.
"바, 반갑습니다. 잠룡문주님!"
잠룡문주.
김도진 학생이 아닌 잠룡문주라 칭하는 데에서 도진의 위상이 드러난다.
숭무고생이라 해도 본질적으로는 일개 학생이다.
그러나 도진은 숭무고생이면서 동시에 한 문파의 문주였으며 그 문파의 문주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의 명성을 이미 사회와 무림에서 쌓았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뭐가 반가운지는 모르겠지만 도진은 우선 미미하게 웃는 얼굴로 네, 하고 답했다.
"그, 저희 학교엔 어쩐 일이신지……."
교장이 헐레벌떡 뛰어온 의도는 바로 읽을 수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오중혁이 난처한 상황인 것 같자 충견마냥 달려온 것이다.
도진은 뻘뻘 흘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는 교장을 가만히 눈을 맞춰 마주하며 말했다.
"학생을 스카웃하러 왔습니다."
"예, 예? 스카웃이요?"
"네."
무림 문파가 무림학교의 학생을 스카웃하는 건 일상과 같은 일이다.
기업만이 아닌 문파 또한 인재에 목말라 있으니까.
떡잎이 남다른 학생을 조기에 후원하여 한 식구로 만드는 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상책(上策)이다.
"그, 그 말씀은……."
교장의 작은 눈이 마치 관성처럼 오중혁에게로 향한다.
도진은 피식 웃고선 시선을 그 반대인 뒤로 향했다.
도진의 시선의 끝에는 성민혁이 서 있었다.
"성민혁 군입니다."
"예, 예?"
작은 눈이 한계치까지 억지로 떠진다.
다시 한 번 도진이 피식 웃고선 말했다.
"뭘 놀라시는 거죠? 희대의 천재를 교장 선생님은 알아보지 못하셨던 것처럼?"
"희, 희대의 천재요?"
"네. 정말 모르셨나 보네?"
그 말에는 일체의 과장도 장난도 없었다.
성민혁은, 정말로 희대의 천재였다. 그러니까 숭무고에 입학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간단한 이야기다.
아직 여물지 않은 중학생의 몸으로, 어설프다 해도 '무림인'에게 무저항으로 매일같이 두들겨 맞았던 성민혁이었다.
그런 성민혁이 옷은 어떻게 한다 해도 몸의 흔적마저 할머니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어째서였을까.
대련하다 그랬다는 거짓말로 얼버무려서?
아니다.
그 흔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절뚝이지도 않았고 벗은 몸에서도 멍 같은 게 없었다.
어째서?
본능적으로 그 충격을 흘려낼 수 있었으며 흘려내지 못했다 해도 그 충격으로 몸이 상하지 않을 만큼 몸 또한 강건했기 때문이다.
천부적인 육체와 그 육체를 다룰 수 있는 감각을 타고났다.
그래도 오중혁은 재능이 있어 그런 성민혁의 철벽 같은 '방어'를 무의식적으로나마 느끼고 있었기에 대련 때마다 표정을 구겼었다.
그뿐인가.
분명한 일반인의 범주였던 할머니의 몸이 육체의 자연스러운 노화 이외에 파탄이 없었던 이유.
그것은 매일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됨으로써 오히려 단련한 육체와 감각을 본능의 영역에 두는 데 그치지 않고 분명하게 이해하여서 타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어서, 매일 빼먹지 않았던 할머니에게 하는 안마가 추궁과혈의 영역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우연히?
아니. '의도적으로' 그것을 해냈다.
그럴 만큼의 재능을 타고 난 게 성민혁이었다.
그런 성민혁을, 이 학교의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었다.
도진이 말했다.
"그러니까 말씀드렸던 대로 성민혁 군을 잠룡문에서 데려갈 생각으로 왔고 진학과 관련한 부분도 저희 쪽에서 해결할 거라는 걸 통보해 드리러 왔습니다."
교장이 도진의 말에 흘끔, 오중혁을 보고선 말했다.
"아, 그, 성민혁 군은 저희 쪽 추천으로 성문고에 진학할 예정인데……."
"아, 괜찮습니다. 민혁 군은 숭무고에 지원할 거니까요."
"허, 헉! 예?"
"그 자리는 다른 재능있는 학생을 찾아 추천을 넣어 주시면 될 것 같네요."
쿠쿵!
마치 그런 소리가 들린 것처럼 일대가 술렁였다.
숭무고라는 이름에는 그만큼이나 큰 무게가 있었다.
그런 가운데 교장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 말씀드리기 송구하긴 한데 숭무고는 그…… 민혁 군의 사정이……."
"어? 저거 뭐야?"
중얼거리듯 주워담는 교장의 말을 끊듯 학교 정문에 조용히, 그러나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는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하는 초고급 리무진이 한 대 정차했다.
"또, 또 뭐야."
조용한 가운데 웅얼거리는 소리가 울리자 소스라치게 놀라 입을 가리는 학생의 시선에 리무진에서 내리는 남녀가 들어왔다.
최소한의 급소만을 가린, 그 외 드러난 맨살이 오히려 몸을 지키는 갑주보다 단단해 보이는 이국적인 복장과 외모의 남녀는.
"바, 바할라 사람들이다."
다름 아닌 슈미트라 직속 왕실타격대 '엑소시아'의 무인들이었다.
동시에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그들의 신분은 투마전 소속 천마신교 교도이다.
일전의 사건으로 세계에 그 이름이 새겨진 바할라는 특히나 한국에서 너튜브를 통해 바할라 출신 용병들의 용맹함이 알려지며 더욱 유명해졌다.
남성은 2미터 가까운 키에 남들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덩치를 자랑함에도 결코 둔해 보이지 않는, 오히려 날렵하고 유연해 보인다는 모순된 인상을 받게 한다.
여성은 그에 비해 170의,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나 오히려 표범을 연상케 하는 극한에 이른 단련을 압축한 듯한 위압감을 자랑했다.
한국에 알려진 바할라 무인들의 용맹함을 증명하기에 차고 넘칠 만큼의 인상과 기세였다.
그런 두 사람이 도진에게 다가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강녕하셨습니까, 문주님."
"예. 어서오세요."
외부의 시선이 있기에, 아직 공식적으로 드러내지 않았기에 문주님이라 칭하지만 그 자세는 소지존을 대함에 있어 공손하기 그지없다.
때문에 더욱 시선을 모으는 가운데 도진이 말했다.
"직접 보니까 어때요?"
성민혁에 대한 이야기다.
선임이 되는 여성, 리쉬라가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답했다.
"문주님의 말씀대로 저희 바할라가 원하는 재능을 넘치도록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겉치레가 아니었다.
천마신교의 교도는 아닌 것은 아니라 말한다.
그러니까 라쉬라의 만족은 도진이 소지존으로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안목으로 완벽한 추천을 해 주었다는 것이다.
도진이 고개를 끄덕이고선 방치되듯 서 있던 교장에게로 다시 시선을 향한 뒤 말했다.
"민혁 군은 바할라의 후원을 받을 겁니다. 정확히는 엑소시아 후보로서 지원을 받는 개념이겠네요."
"와!"
"엑소시아면 바할라 최고의 거기잖아?"
웅성거림이 나오는 건 그만큼 엑소시아가 어떤 곳인지와 그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한국인들이 잘 알기 때문이다.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바할라 용병들이 경의를 표하는 최고의 무력 집단.
실제로 엑소시아는 바할라의 정수, 투마전의 무인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도진은 성민혁이 그런 투마전에 어울리는 재능을 가졌음을 파악하고 '유학을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었던 것이다.
동시에 슈미트라에게도 연락하여 재능 있는 아이가 있는데 투마전의 교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성민혁이 도진의 제안을 수락하자 소지존의 안목을 믿는 슈미트라는 바로 투마전의 신뢰하는 두 무인을 보냈고 지금에 이르렀다.
"성문재단을 폄하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바할라라면 문제없이 민혁 군의 재능을 만개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후원을 해 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문제 없죠?"
"……."
교장은 무어라 더 할 말이 없었다.
성문재단의 '충견'으로 최선을 다하려 했지만 그런 저급한 인물이 어찌 막아설 수 있을 만큼 도진의 행사가 가볍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교장을 닥치게 한 도진의 시선이 다시 오중혁에게로 향했다.
"그런 사정으로 오중혁 군. 오중혁 군과의 일을 마무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 저랑요?"
겁을 먹은 듯 움츠러든 오중혁을 마주한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성민혁 군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민혁 군이 중혁 군의 비싼 무복을 망쳤다구요."
"……."
크나큰 잘못을 들킨 것처럼 오중혁의 얼굴에 겁이 어린다.
도진은 그에 신경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민혁 군이 그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서, 무복의 값을 갚기 위해서 심부름 같은 걸 한다고 하더군요."
"……."
"하지만 민혁 군은 곧 유학을 가야 하거든요. 학기중에는 숭무고에서 진도를 따라가느라 바쁠 테고 방학 때는 바할라에 가야 합니다. 더 이상 그 빚을 갚기 위해 쓸 시간이 없어질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오중혁의 눈을 마주하며 도진이 말했다.
"바할라에서 남은 빚을 일시불로 갚아 줄 겁니다."
"……."
오중혁은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손을 파르르 떨었다.
도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혁 군이 판단하기엔 버거운 일인가 보군요. 그러면 부모님에게 연락하세요."
"예, 예?"
"중혁 군은 아직 중학생이잖아요? 어린 중혁 군이 처리하기엔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일 수 있죠."
그러니까.
"부모님을 모셔 오세요."
* * * *
오전.
성문중학교 부근은 때 아닌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 위치한 학교였기에 고층 아파트에서 목을 주욱 빼고 구경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튜버로 보이는 이들이 인파에 뒤섞여 휴대폰을 들고 있었으며 기자들 또한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이고 있지만 도떼기시장이라 하기엔 무언지 모를 긴장감 또한 감돌고 있다.
그렇게 모인 인파가, 어느 순간 갈라졌다.
고급 승용차 여러 대가 학교 앞에 섰고 문이 열리며 '사모님'이 정장 무복을 입은 수행인들을 대동하고 안에 들어섰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초리에 분노가 어린 그녀는 오중혁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도진이 조용히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