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화
저녁.
도진은 성민혁의 집에 들렀다.
싱크대와 상부장의 마무리 단계 조율과 관련하여 체크할 것이 있었기에 성민혁의 할머니와 약속을 잡고 온 것이었다.
"어서오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할머니."
성민혁의 할머니는 도진을 선생님이라 칭했다.
나이는 어리지만 은인.
그래서 할머니가 꺼낸 많은 존칭들 중 거르고 걸러 합의 하에 정착된 호칭이다.
옛날 사람들이 으레 존중하여 남을 높여 부르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문제없이 작업을 마친 도진은 돌아가는 대신 할머니와 마주 앉았다.
통화를 할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할머니가 내어온 보리차를 앞에 두고 도진은 가만히 기다렸고 이내 할머니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네. 그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마냥 거절하는 게 아니라 더 말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감사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대화의 시작을 끊고, 다시 한 번 어렵게 마음을 정한 할머니가 말했다.
"염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
"민혁이를, 민혁이를 좀 도와주세요, 선생님."
"……."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도진은 꿰뚫어 보았다.
성민혁이 괴롭힘을, 일진 행세를 하는 놈들에게 구타를 포함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상하차와 공사판의 알바로 제아무리 가려도 이치에 닿은 도진의 신안(神眼)은 그것을 꿰뚫어 볼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도진이 단번에 꿰뚫어 본 것을, 과연 할머니는 모르고 있었을까.
옛날 사람인 할머니는 기초 중의 기초만을, 호신용도 되지 못하고 건강을 위한 수준의 동작만을 겨우 익힌 일반인이다.
허나 동시에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어린 손자를 품고 지금껏 키워 온 '할머니'이기도 했다.
그런 할머니의 눈은, 적어도 성민혁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만큼 이치에 닿은 도진의 신안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성민혁의 학교 생활에 관해 모를 수가 없었다.
"…시장에서 이야기를 좀 들었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한데 거기에 시장의 노상에서 이래저래 듣게 되는 이야기도 있었다.
"답답해 가슴을 쳤지만, 아는 게 병이라고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분노하여 당장 찾아가 호통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시대의 손꼽히는 '지식인'이었다.
아는 게 많았다.
아는 게 많은 만큼, 그것들이 모조리 족쇄가 되어 발걸음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미 도진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저 가서 잘못을 논하고 호통을 치는 것만으로 해결될 일이었다면.
애초에 이것이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사회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수없이 가슴을 쳐 멍이 들고 거기서 피가 배어나도 할머니는.
할머니는 애써 흔적을 감추는 손자의 노력을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다.
고칠 수 없는 상처를 괜히 헤집어 그것을 심각하게 만드는 행위가 되는 최악을 피하기 위한 차악을, 계속해 왔다.
그 차악의 연쇄를 끊고 싶어서 할머니는 염치를 외면하고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시면 어떻게든 은혜를 갚겠습니다, 선생님. 도와주세요, 선생님."
"……."
도진은 생각했다.
전생에서 부모님이 과연 도진의 학교 생활에 관해 모르셨을까, 하고.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셨을까.
혹여 알고 계셨다면, 도대체 어떤 마음이셨을까.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다면,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옥죄고 이어나가기가 몸을 부수고 다시 조립하는 연신극기공의 수련보다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어 버려서.
"그만."
도진은 할머니의 말을 끊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조금은 인위적인 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할머니, 부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냐하면, 부탁은 오히려 제가 드려야 하거든요."
"……예?"
"민혁이가 말예요, 재능이 좀 있거든요. 그래서, 제안을 하나 했었습니다. 저한테 오히려 이득이 되는 일이니까요."
"그 제안을 좀 받아달라고, 오히려 제가 좀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할머니께서는 부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인위적인 부분을 지우며 도진은 좀 더 진한 웃음을 지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두, 해결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도진은 바깥으로 나왔다.
나와서 하하, 웃었다.
'하. 씨팔…….'
좀, 기분이 더러워졌다.
할머니 때문이 아니라 괜히 든 생각들 때문에.
그런 도진의 감각에 늦게 귀가한 성민혁의 기척이 잡혔다.
그리고 곧 성민혁의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 이상으로 선명한 흔적과 변화한 분위기가.
그래서 옅은 웃음이 나왔다.
옅게 웃는 도진을 마주하며 결심을 굳힌 성민혁이 말했다.
"갈게요, 유학."
* * * *
다음날 아침.
오중혁과 성민혁의 반은 싸늘한 분위기로 굳어 있었다.
"……."
평소 호가호위하며 이죽이던 오중혁의 똘마니들마저 눈치를 볼 만큼 반의 분위기가 얼어붙은 건, 아침마다 오중혁의 책상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청소하고 정리하던 성민혁이 아직도 등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소 한 시간은 일찍 등교하여 오중혁의 '노예'로 일하던 성민혁이.
어제 반항을 선포하고 뒤지게 쳐맞고서는, 아직도 등교하지 않았다.
설마 했던 오중혁의 얼굴은 한기의 근원인 듯 무섭게 얼어붙었고 똘마니들마저 숨쉬는 걸 조심할 정도로 반의 분위기가 싸해진 것이다.
"……."
"야, 야. 일어나."
"좀 치워라 씨바. 눈치가 없어 이 새끼들은."
어렵사리 똘마니들이 움직이며 자리에 있던 다른 아이들을 시켜 오중혁의 자리를 치우게 만들었다.
그렇게 치워진 자리에 오중혁이 말없이, 그러나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앉았다.
똘마니들은 오중혁을 흘끗 보며 생각했다.
'하 씨바. 이 새끼 오늘은 진짜 뒤지는 거 아닌가.'
'미친 새끼가 진짜 맛이 가 버렸나. 김도진 너튜브 나오더니 겁대가릴 상실해 버렸네.'
그들에게 있어 오중혁은 말 그대로 왕이다.
법이고 나발이고를 떠나 그 자체로 절대적인 왕.
차라리 선생에게 반항을 하면 했지 오중혁에게 반항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돌아 버린 건지 가장 그럴 것 같지 않았던 성민혁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터뜨려 버렸다.
학생들이 그렇게 앞으로 일어날 무시무시한 일을 예상하며 떨고 있을 때.
"이 새끼가!"
교실 창문 바깥에서, 학생 주임의 고함소리가 터졌다.
* * * *
학생 주임은 건장한 체격에 성격이 나빠 보이는 중년 남성이었다.
얼굴값을 하듯 실제로 그는 성격이 더러운 것으로 유명했다.
제 기분이 나쁘면 학생을 상대로 화풀이를 해 버린다.
최소한의 명분이나마 갖추지 않았다면 대번에 잘렸을 정도였는데, 동시에 그러면서 오중혁 등의 힘있는 집안의 학생들을 상대로는 설설 기는 모습을 보이는 최악 중 최악이었다.
그런 학생 주임의 눈에, 평소보다 늦게 등교한 성민혁이 포착됐다.
그리고 '건수'를 발견하고선 인상을 한껏 구겼다.
"거기 성민혁!"
성민혁.
아마도 성문중학교에서 가장 유명할 놈.
그리고 어제 오중혁에게 반항하여 심하게 쳐맞는 걸 '관람했던' 학생 주임이었다.
오중혁의 기분을 상하게 한 그놈이, 정말로 미쳤는지 아예 교복도 안 입고 등교하고 있었다.
이놈을 윽박질러 오중혁에게 점수라도 딸 요량으로 그는 성민혁을 소리높여 부른 것이었다.
평소라면 그런 그의 고함에 주눅이 들어 한껏 움츠렸을 성민혁은 그러나.
"네, 선생님."
'……뭐야.'
너무나 당당하게 그의 앞에 서서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답했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움찔했던 그는 그러나 곧 성민혁이 손을 파르르 떠는 걸 발견하고선 더욱 화가 치밀었다.
스스로의 추태를 남에게 전가하듯 더 큰 화를 내는 것이다.
"네, 선생님? 뭘 잘했다고 고개를 빳빳이 들어!"
윽박지른다.
그러나 성민혁은 턱을 당기고 손에 힘을 꾸욱 주며 당당하게 선 채 물었다.
"제가 뭘 잘못했죠?"
"이 새끼가!"
당당하게 마주보며 묻는 성민혁의 모습에 학생 주임이 결국 손을 번쩍 쳐들었다.
쥐뿔도 없는 놈을 후려치는 건 아무런 뒷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망설임없이 그는 커다란 손을 휘둘렀고.
턱!
성민혁의 손에 팔뚝이 잡혔다.
"이, 이놈이?!"
상상도 못한 상황에 학생 주임의 눈이 부릅떠졌다.
성민혁 따위가, 쥐방울만 한 놈 따위가 내 손찌검을 막아?!
부르르 떨리는 손이 성민혁의 상상 이상으로 강한 아귀힘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분노가 완전히 폭발하려 한 그때.
콰앙!
돌연 폭음이 터지며 모두의 시선이 폭음의 진원지로 향했다.
거기에는, 3층의 교실에서 망설임없이 뛰어내린 오중혁이 있었다.
마치 스스로의 능력을 과시하듯 3층에서 뛰어내린 오중혁은 시선을 빨아들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곳이 제 구역인양, 주인이 자신이라는 걸 과시하듯 거침없이 운동장을 걸어 정문에 가까워진다.
그런 오중혁의 모습에 학생 주임이 일그러진 웃음을 띠었다.
가학심이 섞인 그 얼굴에는, 자신 대신 오중혁이 성민혁을 가차없이 손봐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른 아침.
수많은 시선이 집중된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믿을 수 없게도 기대하는 시선이 일부, 그리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시선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 수많은 시선의 주인들 중 누구도 나서려 하는 이가 없다.
성민혁이, 할머니가 포기하고 감내하는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그런 절대적인 이유가 되는 풍경을 오중혁이 걷는다.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을 것처럼 그렇게 성민혁과의 거리를 좁히던 오중혁은.
퍽!
"……?!"
돌연 무언가에 부딪쳐 운동장을 나뒹굴고 말았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오중혁은 상황 판단조차 하지 못하고 잠시간 잔디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채 있었다.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리고 잠시 뒤에 어렵사리 깨달았다.
"……."
주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완전히 변해 있음을.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시야에 들어온 누군가의 모습에, 오중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 미안합니다."
거기에는 결코 지금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후기지수가 서 있었다.
잠룡.
김도진.
그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 그! 괜찮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오중혁은 허우적거리며 내민 손을 잡고,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김도진.
그의 우상이었다.
당연하게도 팬이었고 우상을 갑자기 마주한 상황이 그가 몸은 물론이요 정신마저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허우적거리는 오중혁에게, 우상이 말했다.
"너무 당당히 정면에서 걸어오시길래, 당연히 피할 줄 알았습니다."
뚝.
정신없이 흔들리던 정신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얼음물을 준비 없이 뒤집어쓴 것만 같다.
"더 경지가 높은 쪽이 피했어야 하는데……. 그렇죠?"
그런 오중혁을 마주하는 도진의 미소가, 싸늘함 이상으로 섬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