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393화 (393/741)

392화

"할머니에게 높이를 맞추면 좋을 것 같아요."

싱크대와 상부장의 설계에는 당연히 실사용자인 성민혁과 할머니의 의견이 크게 반영될 예정이었다.

"우리 민혁이가 한사코 저를 주방에 못 서게 하니, 민혁이에게 맞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민혁은 할머니에게 맞추길 바랐고 할머니는 성민혁에게 맞추길 바랐다.

그리고 우벽진과 김도진은 한쪽의 의견을 채택하는 대신 둘 다 반영하는 성격이었다.

"흠. 민혁 군이 앞으로 쑥쑥 자랄 예정이니 그것도 고려를 해야겠지."

"네. 높이가 조절되도록 해 보죠."

"좋은 생각이야. 재밌겠어."

-"난 둘 다."

-여윽시 남자라면 하나도 빼먹으면 안 되지 ㅋㅋ

그래서 싱크대는 물론이요 상부장에는 여러가지 기술과 고민이 적용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싱크대와 상부장의 제작 중에 또 하나 번외로 도진과 우벽진이 손을 댄 것이 있었으니.

"흠, 민혁 군.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엌ㅋㅋ

-'그 대사'

우벽진의 훈수와 함께 시작된 성민혁의 좌식 테이블 제작이다.

"거실에 의자를 두면 공간을 쓰기 힘들어지니까요."

그런 말과 함께 성민혁은 좌식 테이블을 만들려 했다.

평소 낡은 가재도구를 직접 수리하거나 그걸 넘어 아예 스스로 만들어 쓸 수 있도록 독학한 성민혁이었기에 이번에 새로 지어진 집에 맞는 좌식 테이블을, 그것도 접이식으로 직접 만들려 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게 우벽진과 도진의 눈에 결코 차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 음. 우 명장님도 그렇지만 저도 좀 그런 성격이거든요."

무언가 효율적이지 않거나 눈에 차지 않는 게 있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

-아 ㅋㅋ 그런 사람이네.

-?

-어디 인터넷에서 완성품 컴퓨터 보여주면서 이거 사면 되냐고 하면 눈 돌아가는 그런 타입 ㅋㅋ

-엌ㅋㅋㅋ

-한 방에 이해 되네 ㅋㅋㅋㅋ

그리하여 우벽진과 도진이 참지 못하고 '훈수'를 두었고.

"접이식 테이블이라……. 그러고 보면 이런 건 만들어 본 적이 없구먼."

"그렇네요."

아예 좌식 테이블까지도 같이 만들게 됐다.

-훈수 두는 게 우 명장이랑 김도진이면 절해야지 ㅋㅋ

-아 ㅋㅋ 랭킹 1위가 훈수두는 건 어쩔 수 읍제.

"감사합니다, 우 명장님. 형."

-아.. 부럽다! 다른 건 모르겠고 김도진을 형이라 부르는 게 너무 부럽다!

-공감..

* * * *

성민혁의 하루는 새벽 네 시부터 시작이었다.

네 시 정각에 딱 맞춰 일어나 할머니와 함께 아침 식사 후 버스를 타고 교외의 농장으로 간다.

"오늘치."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 농장에서 떼 온 나물 등을 담은 박스를 가지고 다시 돌아오면 성민혁은 수련 후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할머니는 박스 안 내용물을 손질하고 그것을 팔러 나간다.

본래는 할머니가 혼자 하던 일이었으나 일반인인 할머니가 버스를 이용해 물건을 받아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 성민혁이 함께 하게 됐다.

할머니는 손자가 거기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길 바랐지만 한 번 허리를 다친 뒤로는 손자의 동행을 막을 수 없었다.

"다녀올게요, 할머니."

"그래. 잘 다녀 와."

수련 후 샤워를 하고, 낡았지만 정갈한 교복 겸 무복을 입고 성민혁은 집을 나섰다.

1월. 방학이지만 성민혁은 등교를 했고 이것은 고등반 진학을 목표로 하는 무림중학교에선 생각보다 흔한 일이었다.

무림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건 일종의 성공이 보장된 진로였고 그것을 일대의 목표로 삼은 학부모와 학생이 적지 않았기에 방학 중에 오히려 특화 수업을 진행하는 무림중학교가 많았다.

성문재단이 운영하는 성문중학교는 그런 진학 특화중학교를 표방하고 있었고 성민혁은 그 성문재단의 3학년 진학반이었으니 당연히 방학 중에도 학교를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학교를 나서는 성민혁의 입가가 옅게 미소를 그린다.

짧다지만 그 짧은 삶의 대부분을 살아온 집이 완전히 달라진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대문을 나서는 게 어색하다.

물론 그 어색함은 마음을 들뜨게 하는 기분 좋은 어색함이다.

'고등학생이 되면…….'

그리고 곧 다가올 미래를 생각한다.

고등학생이 되면 중고차를 하나 살 거다.

무림학교 학생은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면허를 딸 수 있고 그 절차도 간소화되어 있다.

그렇게 면허증을 따면 차를 사서, 할머니를 조금 더 편하게 모실 수 있도록 할 거다.

본래는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평생의 은인으로 모셔야 할 도진 형 덕분에 저금에 조금 여유가 생겨서 바로 가능해졌다.

'헤헤…….'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나래는.

"성민혁."

"아, 예!"

"집중해라."

"죄, 죄송합니다……."

수업을 진행하던 교사의 싸늘한 말에 추락하듯 끊기고 말았다.

"가관이네."

"인생 편해서 좋겠다."

그리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비웃음, 경멸 등등등.

그것은 의외로 질투에 기반한 것이 많았다.

-성민혁이 오중혁 눈에 들어서 추천으로 성문고에 가게 됐다더라.

작은 사회인 학교에는 이미 그런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기에.

심지어 도진의 너튜브 이벤트에 당첨돼 집까지 새로 생겼으니 더더욱 강렬한 질투의 시선을 받게 됐다.

"씹새끼 진짜 인생 날로 먹네."

"그러게 시발. 나도 그냥 가난할 걸 그랬다."

수업 중의 잡담은 섭음술로 이루어졌기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손짓, 시선 등 모든 것이 악의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성민혁은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그런 타인이라는 지옥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던 학교에서의 시간이 겨우 끝났을 때.

'…알바 가야지.'

성민혁은 힘겹게 감정을 털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심히 벌어야 했다.

열심히 벌어서, 차도 사고 할머니 좋은 패딩도 사드리고…….

"야."

"아, 중혁아."

생각을 끊으며 앞에 선 것은 오중혁이었다.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눈을 내리까는 성민혁에게 오중혁이 말했다.

"너, 오늘 나랑 대련 좀 하자."

"대, 대련?"

"어. 대련."

"아, 그, 근데 나 알바 가야 하는데."

방학이었기에 조금 이른, 오후 3시가 되기 전에 모든 수업이 끝났다.

성민혁은 거기에 맞춰 아르바이트 시간을 맞춰 두었었다.

오중혁은 그런 성민혁의 말에 인상을 구기더니 곧 두툼한 명품 지갑을 꺼냈다.

"자."

툭.

그리고 지폐를 여럿 꺼내 성민혁에게 뿌렸다.

사라락, 바닥에 떨어지는 돈은 모두 오만 원권이었다.

얼추 보아도 50만 원이 넘었다.

…할머니의 패딩을 좋은 걸로 사드릴 수 있는 돈이다.

"그거면 오늘 알바 안 가도 되겠지? 따라 와."

"와, 멋있다."

"쩔어……."

주변에서 그런 오중혁의 행동을 동경하는 시선이 모여들었다.

성민혁은 차오르는 어떤 것을 느끼며 갈등했다.

'안 되는데.'

단순히 더 많은 돈을 받았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아르바이트라 해도 그것은 사회에서의 약속.

돌연 갈 수 없게 되었다고 직전에 연락해서야 스스로의 가치와 신뢰를 낮추는, 돈 이상의 손해를 보는 일이었으니까.

'…….'

그러나 갈등은 길지 않았다.

주섬주섬, 성민혁은 바닥에 떨어진 돈을 주워 모으고선 오중혁의 뒤를 따랐다.

이미 속도가 붙어 버린 관성처럼.

* * * *

-야이 새끼야, 장난 하냐? 미쳤어?

…욕을 먹으며 고스란히 자신의 잘못으로 아르바이트를 취소하고 오중혁의 '대련'에 어울리게 됐다.

뻑!

퍼억!

오중혁의 공세를 성민혁은 묵묵히 몸으로 받아냈다.

마치 고정된 샌드백처럼.

그 모습을 오중혁의 똘마니들이 웃으며 지켜 보았다.

"캬, 진짜 대단해."

"그러게. 저건 진짜 샌드백하려고 태어난 거 아니냐?"

"낄낄."

오중혁의 묵직한 공격을 성민혁이 무너지지 않고 받아내는 것이 그들에게는 꽤나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한 번의 대련이 끝나고 숨을 돌릴 때였다.

"야."

"응?"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오중혁이 말했다.

"너, 우 명장님이랑 김도진 선배랑 같이 만드는 가구가 있다면서."

"……아, 응."

오중혁이 아무렇지 않게 한 말에 성민혁은 쿵, 가슴이 떨어지는 것처럼 놀라며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무언가 본능적인 불길함을 느꼈기에.

그리고 그 불길함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거, 내 것도 하나 같이 만들어 봐."

"네, 네 것도?"

"그래. 어차피 김도진 선배가 도와주는 거잖아."

"……."

그것은, 오늘 두 번째로 찾아온 갈등이었다.

오중혁은 또래들이 으레 그렇듯 김도진의 팬이었다.

동시에 무언가 과시하기 좋아하는 성격으로 김도진의 손에 더해 우벽진 명장의 손까지 거친 무언가를 갖고 싶어했던 것이다.

오중혁 또한 구독자였지만 김도진의 성격상 이유없이 선물을 해주는 건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일이고 구독자 이벤트에 당첨될 확률 또한 낮다.

이런 상황에서 성민혁을 통해 김도진과 우 명장의 손을 거친 가구 하나를 확정적으로 받자는 생각에 나온 말이었다.

그의 소유욕을 채울 수 있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두고두고 자랑할 수 있는 컬렉션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오중혁의 말에, 성민혁은 대번에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미 평생을 갚아도 다 못 갚을 은혜를 입었다.

거기에 또 '자신의 사정',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부탁을 한다니.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것은 자신의 과오로 그치는 게 아니라, 평생의 은인인 형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었으니까.

그 생각이, 도저히 멈출 수 없을 거 같던 관성마저 거스르게 해 주었다.

"…안 돼."

그리하여 나온 말에 오중혁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뭐라고?"

"안 돼. 형이 특별히 도와주신 거였는데, 거기에 또 다른 부탁을 하는 건 안 되는 거잖아……."

"하? 이게."

"그리고."

"……."

"네가 해 준 성문고 추천, 안 가기로 했어."

"……뭐라고?"

"성문고, 안 가기로 했어."

"하, 하하. 야. 얘 지금 뭐라는 거냐?"

도저히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상상도 못했던 '애완동물'의 반항에 오중혁의 표정에 금이 갔다.

그의 친구라는 허울을 쓴 똘마니들 또한 성민혁이 미쳐 버린 건가 하는 얼굴들이다.

"야, 민혁아. 너 미쳤냐?"

"분에 넘치는 그 뭔가가 생기니까 훼까닥 한 거야?"

쿵쿵쿵!

심장이 거세게 뛴다.

그것을 분명하게 느끼며, 성민혁은 내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떠밀리듯이라 해도 생각하고 있던 것을 토해내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살지 않기로 했어. 이건 옳은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달라져 보기로 했어."

"하, 하하."

오중혁이 이마를 짚었다.

드러난 입꼬리가 일그러지듯 올라갔다.

그리고 말했다.

"이래서 아버지가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지 말라고 하신 거구나. 하, 하하."

"…나는 짐승이 아냐."

오중혁이 성민혁을 노려 보았다.

"그래. 짐승이 아냐? 그럼 사람 대 사람으로 대련 한 번, 제대로 해 볼까?"

까드득.

오중혁이 으스러져라 주먹을 쥐었다.

뻐억!

* * * *

늦은 밤.

도진은 평소보다 훨씬 늦게 귀가한 성민혁을 마주했다.

도진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늦었네?"

"네. 오늘 그, 약속 시간에 알바에 못 갔거든요. 그래서 늦게라도 찾아가서 죄송하다 하고 야간 근무 했어요."

"그래, 그랬구나."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물었다.

"마음을…… 정했나 보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묻는 도진의 눈은 평소보다 훨씬 깊어져 있었다.

그 깊어진 눈동자 안에, 마치 몰아치기 일보 직전의 폭풍 같은 어떤 것이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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