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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389화 (389/741)
  • 388화

    오성아가 무언가를 부탁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녀의 어른스럽고 프로페셔널한 이미지를 대변하듯 그녀는 남에게 무언가 도움을 구하는 일이 없었으니까.

    그 드문 일에 도진은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의 부탁이라면 백지 수표에라도 사인해 드려야죠."

    "어머, 뽀뽀해 줄까?"

    "아뇨, 그건 괜찮습니다."

    "쳇."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은 뒤 오성아가 말했다.

    "얼마 뒤에 말야, 오성의 신년회가 열릴 예정이야."

    "아, 대용이한테 들었어요."

    "그랬어?"

    "네."

    오성의 신년회.

    그러니까 오성의 전 그룹 차원에서의 신년회로 상당히 유명한 모임이다.

    오성 소유의 최고급 호텔 하나를 통째로 대절하여 열리는 대한민국 최대의 행사 중 하나인데, 일각에서는 '오성 상벌위원회'라고 불린다.

    상벌위원회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단순한 신년회가 아니라 상을 줄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벌을 줄 사람에게는 벌을 주는 자리이기도 했으니 오성 특유의 기풍을 엿볼 수 있다.

    집행부의 신년회 회식 자리에서 오대용은 자신도 그 신년회에 참석할 거라고 말했었다.

    거기서 정식으로 본사로 발령이 결정났음이 발표될 거라는 말과 함께.

    "누나도 거기 참석하시겠네요."

    "응, 그렇지."

    오성의 여신이라 불리는 그녀는 오군성의 손녀로 직계이자 3세다.

    여기에 그룹 내에서 제법 인정을 받고 있기까지 하니 참석이 당연한 사람이었다.

    한데 그런 '당연한 일'이었다면 지금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터.

    그러니까 무언가 특별한 일이 있다는 것이고, 바로 그 특별한 일을 오성아가 말했다.

    "거기서 나, 사표 내려고 해."

    폭탄 선언.

    거기에 도진이 물었다.

    "사표요?"

    "응. 이제 더 이상 못 참겠거든."

    씨익 웃으며 오성아가 말했다.

    "나 말야, 잠룡문이 커지는 게 정말 즐겁단 말야."

    마치 푹 빠져서 성장을 즐기는 게임 같았다.

    원하는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하나씩 퀘스트를 해 나가는 것이 즐겁다.

    어딘가에 터억 막히거나 무언가가 불만족스럽거나 지루하거나 그런 게 없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고 그것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처음엔 그저 느긋하게 해 나가던 것이 갑자기 급물살을 탔는데 그것이 너무너무 재밌고 거침이 없어서 도저히 손을 뗄 수가 없다.

    그토록 즐거웠기에 워커홀릭으로 보일 정도로 열심일 수 있었다.

    "그래서, 원래 억지로 하던 걸 더 이상 할 여유가 없어졌어."

    오성의 여신이라 불리며 그 성과주의의 오성 그룹 내에서도 인정받던 그녀였다.

    오성의 직계라는 건 오히려 그룹 내에서 그녀의 평가를 더욱 박하게 만드는 패널티였는데, 그 패널티를 안고도 인정받기 위해 그녀는 매일매일 힘겹게 달려야만 했다.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그녀의 외적인 부분 하나하나까지도 그 노력의 성과였을 만큼.

    문제는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자의가 아니었으며 쌓아온 것들 또한 대부분이 '그녀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는 거다.

    아무리 무언가 성과를 내도 '타인의 인색한 인정'이 돌아올 뿐 그녀의 것으로 돌아오질 않았으니까.

    그래서 어디까지나 오성의 구성원으로서 '해야 할 만큼'만 하고 그 외에는 대충대충이었다.

    가진 모든 것을 다하여 매진하지 않았다.

    "나는 오성 재단의 오성아 컨설턴트일 뿐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단 말이지."

    "하지만 잠룡문에서는 달라. 너는 나를 믿고 모든 걸 맡겨 줬고 사람들도 나를 '잠룡문의 안주인'이라 불러주잖아."

    단순히 인정받는 정도가 다른 게 아니다.

    잠룡문에서 그녀는 '주체'로서 하고 싶은 걸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결심했어. 나, 사표낼 거야."

    그녀는 마음을 정했다.

    "그러니까 너, 나 에스코트해 줘."

    갑자기 떼를 쓰는 것만 같은 결론이다.

    그러나 도진은 그걸 트집잡는 대신 넉넉하게 미소지어 주었다.

    오성아. 오대용의 누나.

    학생의 시선으로 보자면 이렇게 어른스러울 수 없겠지만 사실 그녀는 올해로 스물여섯이다.

    아직은, 그래 아직은 도진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어린 나이인 것이다.

    그런 나이로 오성의 신년회에서 사표를 낸다는 게 어찌 큰 결심이 아닐 수 있겠는가.

    두려움, 부담감, 압박감 등 온갖 감정으로 속으로는 크게 떨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도진은 미소지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가게 두지 않을 생각이다.

    "좋아요. 우리 문파의 안주인 마님이 소속을 딱 정하겠다는데 문주인 제가 빠질 수 없는 노릇이죠. 옆에 딱 붙어 있을게요."

    "정말이지? 약속이다?"

    "어허, 남아일언중천금입니다. 의심하지 마세요."

    도진의 장난스런 말에 오성아도 미소지었다.

    "응, 고마워."

    * * * *

    그렇게 하나의 약속을 한 뒤 도진이 말했다.

    "그럼 나가 볼까요?"

    "어디 갈 거야?"

    "옆집으로요."

    "아, 우 명장님 지금 집에 계시나 봐."

    "네. 비시즌이니까요."

    도진이 오성아와 함께 집을 나서 얼마 걷지 않아 도착한 옆집의 벨을 눌렀다.

    그러자 바로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와 함께 명장 우벽진이 나왔다.

    "오! 어서오게."

    라방을 끄고 바로 연락을 넣어 두었기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 장인 박람회를 전후로 하여 도진 못지 않게 바쁜 나날을 보내던 우벽진은 근래 들어 비시즌을 맞이, 소모했던 체력을 보충하며 느긋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본래 명성공방에서는 '온리 원 오더'라고 하여 명품 라인에서 공통적으로 제공하는, 장비의 오너에 맞춘 세상에서 하나뿐인 커스텀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그에 관한 업무까지 대부분 끝난 시기였다.

    그리하여 여유가 생긴 우벽진이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 특히 도진을 반기는 건 푹 빠져 있던 자신의 취미를 함께 하자는 제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 가구를 같이 만들자고?"

    직접 살 집의 건축에 참여하면서 우벽진은 수제 가구에도 관심을 보였고 그것이 본격적인 취미가 되었다.

    그렇게 만든 가구들을 지인들에게 선물로 준 것이 입소문을 타면서 그가 만드는 장비 못지 않게 가구 또한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관심을 끌고 있었다.

    그런 우벽진의 취미를 공유하던 것이 다름 아닌 도진이었다.

    바로 옆집에 사는 만큼, 그리고 도진도 제법 관심을 보였던 만큼 알게 모르게 도진은 우벽진과 함께 여러 가구를 만들곤 했었다.

    우벽진의 기대 어린 얼굴에 도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번에 했던 이야기가 있었잖아요. 증정 이벤트 같은 거."

    1학년 방학 때 언뜻 했던 말.

    추첨 이벤트로 수제 가구를 증정하면 어떻겠냐는 댓글이 있었고 제법 괜찮으니 검토해 보겠다는 이야기를 나눴었다.

    시간이 꽤 지난 이야기였지만 우벽진도 도진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그랬었지."

    "이번에 제가 구독자 100만 이벤트로 그걸 해 보려고 하는데 우 명장님이랑 같이 본격적으로 해 보면 어떨까 싶어서요."

    "나야 좋지! 재밌겠구먼."

    그냥 취미로 만드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냥을 넘어 취미를 공유하는, 그 누구보다 미래를 기대하고 있는 도진과 함께 기념이 되는 작품을 함께 만들고 또 이벤트를 여는 건 더더욱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이처럼 기대하는 우벽진의 합류와 함께 100만 구독자 이벤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 * * *

    며칠 뒤.

    도진의 SNS에 공지 하나가 올라왔다.

    [100만 구독자 기념 이벤트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헐?

    -ㅁㅊ

    -마참내!

    시선을 끌 수밖에 없는 공지였고 폭발적인 관심과 화제 속에서 드디어 방송이 켜졌다.

    -왔다!

    -크르르르르를르르!

    "안녕하세요, 여러분들. 반갑습니다."

    -크르를르르르르!!

    -프로젝트 떳냐!

    "아하하. 기대들을 많이 하셨나봐요."

    -네그러니까어서알려주세요현기증난단말이에요

    무시무시한 열기에 도진이 아하하 웃고선 시청자들의 요청대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 그럼 바로 게스트 소개부터 할게요."

    도진의 말과 함께 카메라가 우선 바로 옆의 우벽진에게로 향했다.

    "명장 우벽진님이십니다."

    "반갑습니다."

    -헐.

    -ㅁㅊ 우벽진 명장;;

    "그리고 여기 오성아 눈나."

    "안녕하세요. 오성아입니다."

    -눈나!!!!

    -나죽어!!!

    "마지막으로 약봉 약리지."

    "아, 안녕하세요."

    -헐ㅋㅋㅋㅋ

    -약리지까지?

    -허미, 게스트 클라스부터가 여윽시 차원이 다르넼ㅋㅋㅋㅋ

    -인맥왕 김도진;;

    아우성치던 시청자들이 게스트의 면면에 감탄했다.

    명장 우벽진이야 말할 필요도 없었고 오성아 또한 셀럽 중의 셀럽이다.

    여기에 의선약가의 금지옥엽이자 숭무고 재학생이면서 후기지수인 약봉 약리지까지.

    감탄을 금할 수 없는 그야말로 초호화 게스트진이었다.

    -그래서 이 멤버로 뭘 할 건가요?

    그리고 이 멤버로 뭘 할 것인지 관심이 집중됐다.

    도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 SNS에 이런 댓글이 달린 적이 있거든요."

    그러면서 직접 그 댓글을 화면에 띄웠다.

    [도진님 이거 팔로워 추첨 이벤트로 작은 거라도 좋으니 증정 이벤트 해주시면 안 돼요?]

    -헐, 저거 내 채팅인데! 엄마! 나 방송 탔어!

    -ㅁㅊ 존나 부럽네

    -설마?

    "네, 맞습니다. 저랑 우 명장님 취미 중 하나가 수제 가구 만드는 거거든요. 그 수제 가구를 만들어서, 추첨으로 구독자 분들에게 선물하는 이벤트를 할까 해요."

    -헐!

    -ㅁㅊ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채팅창이 대폭발했다.

    그만큼 반응이 대단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잠룡 김도진과 명장 우벽진이 직접 만든 가구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할 것인가 말이다.

    실제로 우벽진이 '취미로 만든 가구'는 지인들에게만 선물로 소수가 풀려있을 뿐 돈을 줘도 못 구하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근데 여기에 이제 무려 김도진과 콜라보를 해서 만든 것이 100만 구독자 기념으로 풀린다?

    이건 차라리 로또였다.

    "앞으로 약 2주 정도 댓글을 통해서 사연을 적어 주시면 저를 포함해서 이번 프로젝트에 출연하는 출연진들이 한 명씩 픽을 할 거고 그 외 댓글 전체에서 백 분을 추첨, 직접 찾아가 가구를 증정할 계획입니다."

    -%*(ㅋ^*%(*^*%)(

    -끼에에에에엑!! 끼에에에에에엑!!

    시청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도진은 흡족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방송은 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가 고마워하는 사람에게 우 명장님이랑 직접 만든 가구를 선물하는 콘텐츠를 준비했는데요, 오성아 눈나가 첫 타자로 나와 주셨습니다."

    "아, 어쩐지 쑥스럽네."

    오성아가 슬쩍 부끄러움을 담아 웃었다.

    "가장 갖고 싶은 걸 하나 말씀해 주시면 그걸로 만들어 볼까 해요. 부담없이 말씀해 주세요."

    "어…… 음……."

    원래 그런 말을 들으면 생각날 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오성아는 입술에 손가락을 댄 채 깊이 고민하다 겨우 답을 내놓았다.

    "그럼 의자 할래."

    "의자 좋죠."

    오성아는 앉아 있는 시간이 긴 편이다.

    당연히 의자는 중요한 것이었으니 괜찮은 선택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도진이었다.

    "오케이. 그러면 누나."

    "응."

    "키랑 몸무게가 어떻게 돼요?"

    "……?"

    오성아가 덜컥 굳었다.

    도진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섭음술로 저랑 우 명장님한테만 말씀해 주시면 돼요. 의자란 건 사실 개인에게 딱 맞춰주는 게 제일 좋거든요. 세상에서 단 하나! 누나만을 위한 의자를 만들기 위해서 꼭 필요한 개인정보니까 믿고 말씀해 주세요."

    -미친ㅋㅋㅋㅋ

    -뭐냐 이거 혹시 보이스피싱임?ㅋㅋㅋ

    도진의 말에 오성아가 머뭇거리며 섭음술로 말했다.

    "…167이야. 키."

    그리고 도진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1센치 늘린 거 같은데요?"

    "야!"

    오성아가 빽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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