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일정 경지 이상의 무림인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기세를 갈무리한다.
비유하자면 미숙한 무림인이 내뿜는 기세란 주먹을 꾹 쥐는 것과 같다.
지금부터 힘을 쓴다는 신호가 되기도 하고 투지를 고취시키기도 하며 싸울 준비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연히 힘이 드는 일이었고 그런 이유로 평상시엔 기세를 굳이 일으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만 경지가 더더욱 높아지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져서, 사람이지만 맹수와 같이 그 존재만으로도 타인을 압도하는 어떤 것이 어리게 된다.
이 경우 필요하지 않다면 일정 이상으로는 기세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금 더 의식하여 갈무리하게 되는데,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무림에서 쓸데없이 나 여깄소, 나 이 정도요 하고 상시 자랑하고 다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정 경지 이상의 무림인이 긴장을 풀고, 전문 용어(?)로 '떡실신'을 하게 되면 자연스레 갈무리되어 있던 기세가 풀려날 수 있다.
집행부의 멤버들은 도진도 그런 맥락으로 여겼는데 사실은 조금 달랐다.
도진이 평소 자연스럽게 기세를 갈무리하고 있는 건 맞지만 여기에 한 가지 더, 무흔잠영의 묘리까지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숨 쉬듯 자연스럽게 기세를 갈무리하는 걸 넘어 아예 의식적으로 자신의 기세와 존재감까지도 주변에 동화되도록 무흔잠영을 상시 운용하고 있었기에 이토록 스케일 큰 사건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도진으로선 흔치 않게도 '실수'였다.
'아이고…….'
-여보세요 시발 집행부에 괴물이 출몰한 거 같아요.
-아 ㅋㅋ 오늘 술 빨려고 결석계 내러 갔다가 실패했다 ㅋㅋㅋㅋ
-이건 출석률을 높이려는 집행부의 음모다
집행부의 위치는 학교 중앙의 본청 옆 별관이다.
말인즉슨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곳들이 근처에 있었는데 그 때문에 직원과 손님, 그리고 학생들 사이에 '김도진의 기세'가 회자될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갑자기 김도진 왜 그런 거임? 부모님 방문하시는 것도 아닐 텐데.
-뭐 개빡치는 일 있었던 거 아니냐?
-? 별다른 사건사고는 없었던 거 같은데. 혹시 김도진 빡치게 한 일진이 있다면 손을 드시오.
-(온기가 남은 시체가 손을 듭니다)
-? 얼마나 줘터졌으면 시체가 손을 드냐
-이미 뒤진 취급하네 이새끼들ㅋㅋㅋㅋ
-거 오늘 누가 목격하기로 일진 같은 애들이 당당하게 집행부로 쳐들어가려다 빤스런 쳤다던데 그거 관련 아님?
-와, 존나 용감하네. 집행부 본진을 쳐들어간다고?
-차라리 백악관에 테러를 가지 그랬냐
-엌ㅋㅋㅋㅋㅋㅋㅋ
…뭐 그런 와전된 소문도 도는 것 같았지만 도진은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이걸로 학교가 평화로워질 수 있다면 집행부의 부장으로서 좋은 일 한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
다만 취침 장소는 바꾸기로 했다.
어찌되었든 자신의 기세로 타인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안 될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택한 곳이 학교 외곽의 작은 숲이 조성된, 찾는 이가 거의 없는 쉼터였다.
중심에서 밀려난 일진들의 집합소가 되었던 탓에 여전히 사람이 거의 찾지 않는 곳인 데다 연신극기공으로 겨울이라 해도 추위를 거의 느끼지 않을 정도로 단련돼 있었기에 낮잠을 자기에 딱이다.
문제라면 혹시 모를 무형독 등의 습격이다.
제아무리 깊숙이 모습을 감추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안심을 하는 것만큼 무림인으로서 안이한 것도 없다.
다만 숭무고 내의 경계가 그 어느 때보다 높으며 도진 또한 최대한 기세의 그물을 펼치고 솜이까지 함께 한다.
몸과 정신은 쉬지만 '감각'이라 할 수 있는 기세가 경계망이 되어 주는 것이다.
할 수 있는 만큼의 경계는 하고 있으니 경계를 넘어 기인지우, 기우의 영역이 되지 않도록 행동하고 있다.
"그럼 나는 좀 잘게."
"냐앙."
도진이 몸과 정신을 깊은 잠에 빠뜨린다.
의식하여 운용하던 무공을 멈추고 몸에 휴식을 부여하며 심상세계로 가는 대신 정신도 수면을 취함으로써 완벽하게 잠에 빠진다.
이로써 도진은 점심시간 30분을 활용하여 강행군을 통한 피로를 최대한 푸는 것이었다.
구, 우웅…….
그리고 그렇게 잠에 빠지자 천마기가 신나서 날뜀으로써 주변에 무시무시한 기세가 퍼져 나갔다.
"냐앙."
그렇게 도진의 기세로 가득 채워진 중심에서, 솜이가 식빵을 구우며 귀엽게 울었다.
* * * *
그리고 시간이 흘러 기말고사가 치러졌다.
-와, 독하다 독해.
-이걸 기어이 1등을 하고 마네.
강행군을 거듭했던 도진은 결국 1등을 쟁취해냈다.
"무려! 3문제나 틀리고 1등을 한 집행부 부장님이십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오대용이 말했다.
"이론 1등은 이번에도 지윤이구나."
"이거라도 도진이 이겨야죠."
"오, 좀 멋지다?"
그야말로 꽃미남 미소를 지으면서 답하는 나지윤과 감탄하는 유지은이다.
도진은 이론에서 3문제를 틀리며 2등을 했지만 역시나 실기에서 그것을 메꾸며 종합 1등을 따냈다.
이번엔 안 될 수도 있겠다 싶었던 도진이었기에 만족스러운 티가 얼굴에 드러났다.
그렇게 흡족한 얼굴로 도진이 말했다.
"자, 그럼 오늘 저녁은 쫑파티 겸 신년회입니다."
"와!"
짝짝짝!
* * * *
기말고사도 끝나고 새로운 해가 찾아온 1월의 어느날.
집행부는 쫑파티 겸 신년회를 위해 모였다.
3학년에는 한유아와 민지서, 유지은.
"오, 이제 양복 좀 어울린다, 너?"
"하하. 그러냐."
그리고 오랜만에 모임에 얼굴을 비추는 폭룡 류대현이 있었다.
3학년들 중 유일하게, 그러나 사실은 이쪽이 지극히 보편적이었던 3학년이 되면서 학교보다 무림과 사회에 집중했던 류대현은 한유아의 말대로 양복이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약 1년.
정장 무복을 입은 그는 도진의 기준으로 여전히 앳된 얼굴이지만 학생의 티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너 이제 어른이니까 오늘 계산은 네가 해야겠네."
"뭐, 임마."
"꺄하하!"
언제나의 티키타카를 주고받은 류대현의 시선이 도진에게로 향했다.
"이야기는 들었어. 대단하더라."
"감사합니다, 선배."
류대현이 참가함으로서 집행부 3학년 전체가 모인 가운데 2학년 또한 부장을 맡고 있는 도진을 포함하여 전원이 참석했다.
자연스럽게 도진의 옆에 자리한 소담과 커플 오대용, 주정아.
그리고 바쁜 중에도 시간을 내어 참석해 준 나지윤까지.
여기에 1학년들 또한 한 명도 빠지지 않았으니 소담의 맞은편에 앉은 상미와 우서진, 남사현, 약리지, 벽태웅 다섯 명이다.
열네 명.
상당히 많은 인원이 모인 만큼 제법 떠들썩 했는데, 그럼에도 어쩐지 숨기지 못하는 아쉬움이 묻어났으니.
"선배들은 이제 진짜 졸업이네요."
주정아의 입에서 나온 대로, 이제 3학년들은 더 이상 학생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해가 지났다.
3학년은 그들만의 졸업식을 마쳤고 이제 졸업생이 되었다.
주정아의 말에 한유아가 싱긋 웃었다.
"뭘 그렇게 시무룩한 얼굴을 하는 거야. 어차피 계속 볼 수 있는 걸."
"그래도요."
제법 감수성이 풍부한 주정아는 슬쩍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는데, 어쩐지 그 마음을 도진은 이제 알 것 같았다.
한유아의 말처럼 사는 세계가 같은 만큼, 그리고 본래 아는 사이였던 만큼 제 3자의 메마른 감성으로 보면 주정아가 오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르다.
그들이, 집행부가 이렇게 모일 수 있고 또 '함께 한다'고 할 수 있는 건 근본적으로 그들이 집행부였기 때문이다.
똑같이 숭무고에 다니는 학생이며 집행부라는 한 울타리 안에 있었기에.
한데 그 집행부이면서 숭무고생이었던 울타리에서 3학년이 나가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같은 생각이었던지 1학년들 또한 제법 감정이 드러나는 얼굴들이다.
특히 가장 안 그럴 것 같은 외모의 벽태웅이 가장 감수성이 돋보이는 건, 비슷한 일을 보육원에서 많이 겪었기 때문일 거라고 도진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처음이구나.'
도진의 집행부 생활은 조금 특별했다.
애초에 3학년들과는 접점이 없었다.
심지어 본래는 3학년이 되며 학교와는 접점이 희미했어야 할 2학년 선배들이 류대현을 제외하고선 계속 집행부에 얼굴을 비추었다.
사실상 이번이 '첫 번째 이별'이 되는 것이다.
"선배들, 졸업한다고 해서 우리 잊으면 안 돼요?"
감수성 풍부한 1학년들이 그렇게 말하니 한유아가 어른스럽게 웃는다.
"설마 잊을 리가 있겠니. 그리고 이 바닥 좁잖아?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힝, 그렇겠죠."
슬쩍 눈가를 훔치는 약리지를 귀엽게 보며 유지은이 토닥여 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진도 제법 감성적이 된다.
전생의 삶과 기억이 있는 도진에게는 심지어 학생의 티를 벗은 류대현마저도 파릇파릇한 새싹으로 보인다.
그런 새싹들이, 어린애들이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평범한 이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을 준비하거나 유예하여 대학교를 간다.
평균을 내면 20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취업하여 사회 활동을 한다는데 무림인은 17세에 이미 성인 취급을 받으며 19세에 사회에 뛰어드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대견하고 또 어떻게 보면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기도 하다.
전생에서 성숙하지 못했던 부분 때문에 어른인 척하면서도 나 역시 아이가 아닌가 싶었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역시 내가 나이를 먹긴 먹었었나 보다, 하고.
도진은 생각했다.
그러면서 시선이 슬쩍 한유아에게 머무르자 아주 조금, 표정이 바뀐다.
한유아.
유일하게 이 자리에서 학생이 아닌 '어른'으로서의 깊이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동시에, 도진이 제대로 된 인연을 쌓지 못한 사람이기도 했다.
도진이 기억하는 전생의 그녀에 관한 일들을 상기하면 열아홉의 나이에 어른으로서의 깊이를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결코 긍정적인 방향의 당연함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아쉽다.
도진은 한유아가 탐이 났다.
아주아주 많이.
커다란 조직을 운영해야 하는 입장으로 한유아만큼이나 탐나는 인재가 얼마나 되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유의미하고 깊은 인연을 맺고 싶었는데, 그럴 만한 계기가 없었다.
유룡 우정한처럼 먼저 다가가 같이 밥을 먹거나 우서진과 약리지 때처럼 먼저 다가가 미안해, 하고 사과하는 것만으로는 안 됐다.
그것은 그 나이대의 학생들 사이에서는 충분한 계기였지만 그 단계가 지나 버린 한유아에게는 불충분한 계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도진은 긴 시간이 있었음에도 피상적인 관계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 게 아쉬웠고, 그 아쉬움을 담아 한유아에게 말했다.
"선배."
"응?"
"자주 놀러와요. 밥도 같이 먹으면 좋구요."
"응, 그럴게."
싱긋 웃으며 답하는 말은 마치 으레 하는 인사치레처럼, 매듭이 느슨하기만 했다.
도진은 그것을 굳이 지적하지 않고 마주 웃었다.
집착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현대의 무림은 좁다.
도진에게 그럴 생각이 있으니 인연이 있다면, 결국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말야."
분위기를 환기하듯 주정아가 말했다.
"응?"
"방학되면 다들 뭐 할 거야?"
시선이 자연스럽게 도진의 자리에서 멈췄기에 도진이 먼저 말했다.
"수련해야지."
"엑."
"와, 저저 범생이놈."
커플의 반응에 도진이 피식 웃었다.
"무림인의 본분은 수련이잖아."
"좀! 청춘을! 즐기자!"
오대용의 버럭에 약리지가 꺄하하, 웃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송년회이자 송별회가 무르익는 가운데 도진은 생각했다.
반쯤 농담처럼 답했지만 수련을 해야 한다는 말은 순도 100% 진심이었다.
항상 그랬지만 언제나 한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매진해야만 했다.
슬슬, 변화가 찾아오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