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화
숭무고 학생들의 점심시간은 대학교의 시스템을 따왔기에 시간표를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언뜻 생각하면 밀도 높은 삶을 살아야 하는 만큼 최소한으로 줄인 학생이 많을 것 같지만 현실은 그 생각과 달리 말 그대로 다양한 편이었다.
다른 일을 보기 위해 점심시간을 최소화하는가 하면 반대로 점심시간을 최대한 늘리고서 그 시간을 다른 일에 쓰는 학생도 있었다.
그러니까 여러가지 이유로 점심시간은 제각각이었는데, 지금 친구들의 선두에서 보무도 당당하게 교내를 걷고 있는 학생은 순수하게 느긋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점심시간을 길게 잡은 쪽이었다.
각진 얼굴에 190에 달하는 키. 그리고 커다란 덩치가 절대로 학생으로 보이지 않는 그는 다름 아닌 조중림이었다.
분류를 하자면 불량 학생인 그는 그러나 그 불량함을 억누른 채 1년을 보냈으니 당연하게도 도진이 이유였다.
숭무회를 박멸하고 일진을 혐오한다고 알려진 김도진이 있는데 '처신 잘하는' 조중림이 대놓고 일진 행세를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그것은 조중림의 인생을 바꿔 놓은 도진에 의한 나비효과 중 하나였다.
도진이 알지 못하는 전생에서 조중림은 비록 그 활동이 위축되었다지만 분명히 존재하던 숭무회에 가입했고 한유아를 포함한 3학년들이 졸업 후 본격적으로 활개를 쳤다.
그 때문에 집과도 갈등을 일으키다 인생이 엇나갔으니 의도치 않게 도진이 한 명과 그 한 명이 미치는 범위 내의 많은 것을 구한 꼴이다.
그렇게 도진에게 은혜를 입은(?) 조중림이 약간은 불안한 얼굴로 반신반의하는 친구들을 이끌고 보무도 당당하게 향하는 곳은 집행부였다.
조중림의 친구 겸 똘마니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야, 진짜 괜찮은 거지?"
친구의 말에 조중림이 높은 톤으로 '하!'하며 자신감을 담아 답했다.
"임마. 너도 알면서 왜 그래. 도진 선배랑 나랑 모르는 사이도 아니란 거."
"응,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에는 어찌되었든 분명한 긍정이 드러난다.
다만 그럼에도 조중림의 친구들이 불안한 얼굴인 건 지금 이 길이, 집행부에 방문하는 목적이 '그리 선량하지 않은 의도의 불편 개선'을 건의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숭무고 내에서야 그 티를 드러내지 않는다지만 그렇다고 본성이 바뀐 건 아니다.
그러니까 조중림을 포함한 무리는 어찌되었든 불량 학생이긴 하다는 말이다.
당연히 평소의 행실이 좋은 편은 아니었고 관련한 여러 물품들을 택배 등을 통해 수령하고 있었다.
일전 조중림으로 인한 소란의 이유도 바로 그 택배와 관련된 일이었고 말이다.
그리고 그 소란과 불편을 다름 아닌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인 김도진이 해결해 주었다.
조중림은 그 나이대의 학생이 으레 그렇듯 자랑스레 그 일을 이야기하고 다녔는데…….
그렇게 개선된 시스템이 독살 사건이 터지며 원상복구를 넘어 아예 퇴보하고 말았다.
처음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려 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숭무고 내에서, 무려 독살 사건이 터지지 않았는가.
조중림마저 이해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다.
조중림의 인내심 수위는 그리 높지 않았고 지속되는 불편에 조금씩 조금씩 수위가 낮아져 이내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자리를 박차고, 친구들을 데리고 용감하게 집행부실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 나섰다.
이 못난 친구들의 앞에서 당당하게 도진 선배에게 건의를 한다.
그런 용감한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집행부가 있는 중앙의 본청 옆 별관에 도착했을 때였다.
"……헉!"
"……?"
조중림 일행은 덜컥 몸이 굳고 말았다.
단순히 몸이 굳은 게 아니라 숨을 삼키고 이 겨울에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해졌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별관에서 새어 나오는 말도 안 되는 무시무시한 기세 때문이다.
'……도진 선배다.'
조중림은 그 인성과 별개로 숭무고에 입학하여 나름 상위권을 차지한 천재였다.
그에 걸맞는 실력과 지성으로, 그 기세의 주인이 도진이라는 걸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이게 사람인가?'
굳이 비유하자면 문 열린 사자 우리 너머의 사자를 보는 것만 같다.
그러니까 무림인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의 입장에서 말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문 열린 우리 너머의 사자가 기세를 줄기줄기 내뿜고 있다.
지켜보는 이를 굳이 움직여 해하려 들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반인의 입장은 편할 수가 없다.
어찌되었든 우리의 문이 열려 있고 그 너머에 무시무시한 사자가 있는데 겁이 안 나겠느냐는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당연히 우리 안에 들어가려는 일반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
"다음에 오는 게 좋지 않을까?"
"응, 그러자."
결론은 이미 나왔고 친구들은 자연스레 몸을 돌렸다.
조중림은 자신을 빼놓고 몸을 돌리는 친구들을 탓하는 대신 뒤따라 몸을 돌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사자는 너무 약한 비유고 차라리 괴물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정작 본인은 보이지도 않는데 퍼지는 기세만으로도 이런 상황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런 기세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도진'이 퍼뜨릴 만한 어떤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굳이 이런 때에 저런 기세를 뚫고 집행부실에 들어가는 건 침을 뚝뚝 흘리는, 입을 쩌억 벌린 악어의 입에 머리를 들이미는 짓이다.
그런 판단으로 몸을 돌렸던 조중림은.
"오, 1학년의 조중림이었지? 안녕?"
"아, 예. 안녕하세요."
자신을 알아봐주는 눈부신 혼혈의 금발벽안 미녀 선배를 마주하게 됐다.
이와중에도 그 미모가 눈에 박히고 마는 그녀는 다름 아닌 3학년의 한유아 선배다.
싱긋 웃는 얼굴의 한유아는 곧 그 예쁜 파란 눈동자로 조중림이 손에 든 서류를 보았다.
"오, 뭐야. 혹시 건의 사항?"
그리고 그 정체를 대번에 알아맞췄다.
'…이 선배가 그 예언을 한다는 소리도 있었지.'
예언을 한다고까지 할 정도로 한유아는 깊은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단순히 서류만 보고 판단한 게 아니라 조중림의 성향과 그동안의 행보 등도 완전히 꿰뚫고 있기에 대번에 나온 정답이었다.
그 정도로까지는 잘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정답에 조중림은 살짝 놀라며 아, 예하고 답했다.
"건의 사항이긴 한데…… 생각해 보니 좀 더 다듬어야 할 거 같아서요. 오늘은 돌아가겠습니다."
평소라면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것만으로도 헤롱거렸을 텐데 실시간으로 느껴지는 괴물의 기세가 조중림의 정신줄을 붙잡아 주었다.
정중하게 대답한 뒤 조중림은 한유아를 지나쳐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떠나려 했다.
그런 조중림을.
"에잇. 어딜 도망 가."
콰악!
한유아가 붙잡았다.
겉으로 보기에 가녀린 그녀의 하얗고 고운 손은 거대한 조중림을 결코 붙잡을 수 없을 것 같지만.
꾸우욱.
무림에서 보이는 것만 믿는 것만큼 위험하고도 어리석은 행동이 없다.
한유아는 한 손만으로 조중림이 옴짝달싹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붙잡았다.
본래 수공(手功)이 특기인 그녀였기에 더더욱 조중림은 독수리에 채인 병아리 꼴이 되어 이탈에 실패했다.
겨우 울상이 되려 하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조중림이 몸을 돌렸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라는 얼굴의 조중림을 보며 한유아가 상큼하게 웃었다.
"에이. 불편한 게 있으면 그냥 새내기답게 선배에게 이렇게 해 주세요, 하면 되는 거지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그냥 말해도 돼."
사실은 그러고 싶다.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왔다.
근데 지금 주변을 봐라.
그들만이 아니라 이 근처에 온 학생들이 모조리, 예외없이 화들짝 놀라지 않나.
심약한 학생은 아예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다.
조중림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꾸욱 참고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아닙니다. 그래도 자랑스런 숭무고생인데 작은 것부터 스스로 고민해 보는 태도도 좋은 경험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중림의 필사적으로 짜낸 말에 한유아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흐응, 그래. 그것도 일리가 있네! 응, 그럼 고민해 보고 다시 와. 꼭!"
"예, 예. 감사합니다."
그리하여 한유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조중림은 친구들과 함께 호다닥 도주하듯 떠나갔다.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한유아가 꺄하하 웃었다.
당연히 다 알고도 짓궂은 장난을 친 것이었다.
"……."
그런 한유아의 모습을, 그림자처럼 곁을 지키는 민지서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 * * *
-아니 시바, 집행부에 도대체 뭐냐고 이거;;
-와, 나 진짜 경기 일으킬 뻔 했자너..
점심시간.
돌연 집행부실에서 흘러 나오는 무시무시한 기세에 에타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런 아우성에 2학년, 이제는 3학년이 되는 학생들이 나섰다.
-아아, 새내기들은 아직 모르는 건가?
-그것은 김도진의 '기세'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랭킹전에서 이미 겪어본 적이 있지.
-;;;컨셉 시발;;
그들은 그것이 김도진의 기세이며 랭킹전에서 이미 한 번 겪어 보았음을 자랑했다.
-1학년 때도 대단했는데 이제는 뭐.. 말 그대로 언터쳐블이네(코쓱)
-않이 그걸 니가 왜 자랑스러워하는데 ㅋㅋㅋ
이것은 그 명성이 자자한, 심지어 날로 더해가고 있는 김도진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에타에 기록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일어난 이유는 더더욱 경악스러웠는데…….
"이제는 아예 자는 것만으로도 난리가 나네."
"그러게."
오대용과 주정아가 한곳을 응시하며 말을 주고받았다.
커플이 응시하는 건 한 켠에 놓인 간이침대였는데, 바로 그곳에 기세의 근원인 도진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오늘 아침.
도진이 강행군으로 인한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내놓은 답은 간단한 것이었다.
"낮잠이요?"
"응. 낮잠."
약리지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도진의 말은 과연 일리가 있었다.
무림인이라면 점심시간에 낮잠을 좀 자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피로 회복의 효과를 볼 수 있었으니까.
"응, 그렇네요. 푹 자면 도움이 되죠."
전문적인 지식까지 더하여 약리지는 도진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냥 자는 것도 아니고 좀 본격적으로 잘 거야."
"본격적으로 자면 어떻게 되는데요?"
"좀 더 피로가 풀리겠지?"
"아, 네에……."
처음엔 그냥 언제나와 같은, 아재 같은 말장난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도진의 '본격적으로 잔다'는 건 스케일이 다른 이야기였다.
"완전 괴물이여, 괴물."
오대용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집행부실에 모인 멤버들은 숭무고에서도 손꼽히는 최상위권의 학생들이다.
그러니까 지금 도진이 기세를 줄기줄기 흘리며 자는 게 어떤 것인지를 바로 알아 보았다.
저건 한 마디로 긴장을 풀고 자는 거다.
일반적으로 무림인은 정말로 믿고 쉴 수 있는 곳이 아니고서야 어느 정도 긴장을 하고 얕은 잠을 잔다.
그것만으로도 피로를 풀 수 있고 위험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다.
그것은 곧 깊이 잠들면 더 확실히 쉴 수 있다는 말이다.
정신만이 아닌 근육마저 이완시켜 몸과 정신을 푹 쉬게 하는 깊은 수면.
지금 도진은 그런 깊은 수면으로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억누르고 있던, 갈무리하고 있던 기세가 흘러나온 게 지금 상황이다.
"냐앙."
그 괴물의 위에서 태평하게 식빵을 굽고 있는 솜이의 모습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헤에, 후배는 진짜 기세를 잘 갈무리하고 있던 거였구나."
반짝이는 눈으로 잠든 도진을 응시하던 유지은이 감탄한다.
평소 '기척이 없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도진이 자신의 존재감과 기척을 감추는 데 능하다는 걸 유지은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새삼 '알고 있다고 짐작하는 것'과 진짜로 경험하는 게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또한 그녀의 '꽃'이 평생 목표로 해도 될 만큼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까지도.
자신이 전력을 다해도 뒤쳐지기는 커녕 오히려 계속해서 등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
깊은 감정이 담긴 미소를 띠며 유지은은 도진을 지켜 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이 눈을 떴다.
유지은으로선 처음 보는, 이 자리에 있는 집행부의 멤버들 모두도 처음 보는 자고 일어나 조금은 흐릿하던 도진의 얼굴이 곧 선명함을 되찾았다.
동시에 무시무시한 밀도로 공간을 채우고 있던 기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주변을 스윽 둘러보더니 말했다.
"어…….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