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화
도진이 남쪽 나라 바할라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사이 한국의 숭무고에서는 연말의 굵직한 이벤트인 랭킹전이 끝나 있었다.
"내가 우승했어."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소담의 모습이 마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귀여워서 도진은 미소지었다.
"축하해."
"응!"
"끄응. 재능충들 같으니라고."
너스레를 떠는 건 주정아와 함께 있는 오대용이다.
오대용은 도진이나 유지은과 달리 한국에 있었지만 랭킹전의 준비를 도왔을 뿐 랭킹전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이번 바할라 사건에 관련이 있었던 만큼 그에 관한 일들로 역시 바빴기 때문이다.
다만 오대용의 그녀인 주정아는 랭킹전에 참가했는데, 아쉽게 4강에서 유룡 우정한을 만나 탈락했다.
"이번에는 꽤 자신 있었는데 역시 정한이는 못 이겼어."
유룡 우정한.
소림의 속가제자이면서 무림인으로 살기보다는 스님으로서 살기를 원했던 그는 도리어 그렇기에 숭무고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로서의 깨달음을 삶에서 얻고 있었다.
여러가지 깨달음의 형태 중 비움으로써 얻는다는 '공(空)'의 이치가 바로 그것이다.
"이화접목 쓰는 황소랑 싸우는 거 같았어."
"큽. 그래?"
재밌는 비유에 도진이 웃었다.
이화접목을 쓰는 황소라니. 무서울 거 같긴 하다.
여자친구의 말에 오대용이 보탰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사실 알고 보면 초식 동물이 육식동물보다 더 세잖아. 어쩌면 풀 먹는 사람이 더 센 것도 당연한 일일지 몰라."
그런 소릴 하며 시선을 벽태웅에게로 향한다.
"그러고 보니 태웅이 너도 초식 자주 하지 않았어?"
"예. 그렇긴 합니다만……."
피지컬계의 최종병기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벽태웅은 그러나 초식을 주로 했다.
"선배. 사람이랑 초식 동물은 달라요……."
벽태웅의 근처에 있던 약리지가 약간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리고 도진이 덩달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근데 말야, 풀 먹는 동물의 고기를 우리가 먹으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 전부 다 풀을 먹긴 하는 거잖아?"
"이게 뭔 멍소리지……?"
"꺄하하하!"
오대용의 어이없다는 얼굴에 뜬금없이 약리지가 터져서는 웃고 그 옆에서 남사현도 은근히 고개를 돌리고선 웃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던 집행부를 나와 소담과 함께 걸으며 도진이 말했다.
"유진이랑 호진이, 잘 돌봐 줘서 고마워."
"으으응. 내가 해야 할 일인 걸!"
사명감을 입술에 담고 말하는 소담의 모습에 도진이 미소지었다.
바할라에서의 일 때문에 도진은 꽤 오래 자리를 비워야 했으니 자연스레 랭킹전 축제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바로 그 시기에 유진이와 호진이를 데리고 함께 축제에 참여해 준 것이 소담과 상미, 그리고 서태주였다.
서태주와는 따로 만나 축하와 함께 인사를 전했다.
서태주는 랭킹전에서 숭무영재고 소속으로 무려 4강에 오르는 기록을 달성했는데 우정한을 만나지 않았다면 4강에 갔을 거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대단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들었다.
상미는 1학년 우승자가 되었다.
우서진과 결승전에서 맞붙었는데 접전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고 한다.
도진의 칭찬에 활짝 웃는 얼굴이 도진의 뇌리에 깊이 남을 정도로 그녀는 도진의 칭찬에 기뻐했다.
그렇게 성사된 1학년 우승자 윤상미와 2학년 우승자 서소담의 특별 비무에서는 소담이 이겼다.
상미는 승부욕을 불태우면서도 깨끗이 결과에 승복한 모습이었는데, 그런 면에서 보자면 도진으로선 이유 모를 소담과의 경쟁 의식을 불태우면서도 어떤 끈끈한 유대가 보였다.
소담 역시 마찬가지로 무공을 배운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경지에 오른 상미를 질투하기보단 인정해 주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주는 기색이다.
그리고 지금 함께 걷는, 랭킹전에서 우승을 한 소담의 얼굴은 모든 고민을 벗어던진 듯 홀가분해 보인다.
공의 이치를 따라 걷는 유룡 우정한을 이길 만큼의 성취를 얻은 건 그런 홀가분함이 가져다 준 깨달음 덕분일 것이었다.
족쇄였던 걱정거리들이 사라지면서 그녀 또한 억눌렸던 재능의 날개를 마음껏 펼치게 됐다.
그렇게 유난히 반짝이는 얼굴의 소담이 해 주는 랭킹전 축제에서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유진이가 이번 년도 가요제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년.
랭킹전 축제 중에는 일반인들이 참여하는 가요제가 있었는데 유진이가 바로 그 일반인 가요제에 관심을 보였고 내년, 그러니까 올해에는 참여하자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 약속을 잊지 않았던 도진이었고 그를 위한 준비도 하고 있었다.
사건이 터지기 전 랭킹전 축제 준비를 하며 유진이가 참가할 수 있도록 관련 이벤트를 체크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한데 자리를 비운 사이 유진이는 이번 년도 가요제가 아닌 다른 곳으로 관심을 옮겼으니 다름 아닌 바른 엔터 소속 아이돌들의 연습이었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전 이은지를 통하여 정식으로 아이돌을 목표로 노력하기 시작한 유진이는 바른 엔터의 연습생 아닌 연습생이 되어 있었다.
본래 바른 엔터는 아직 연습생을 둘 만큼의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안티체리가 이런저런 알바를 통해 그런 쪽의 레슨에도 약간의 소양이 있었는데, 그런 안티체리에게 유진이가 이것저것 가르침을 받다 자연스런 흐름으로 그리 된 것이었다.
평소 스케쥴을 소화하고 나면 어느 정도 시간이 남던 때의 일이었다.
-와 머임. 저게 그 공동전인인가 뭔가 하는 그거임?
-공ㅋㅋ동ㅋㅋ전ㅋㅋㅋ인ㅋㅋㅋㅋ
-아니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이 아닌데? ㅋㅋㅋ 안티체리 전체가 가르쳐 주는 거자넠ㅋㅋ
-와, DS마교를 무너뜨린 천하제일인 김도진 동생이 요즘 최고의 명성을 떨치는 안티체리의 공동전인이라고? 존나 기대된다. 어서 써줘
-ㅁㅊㅋㅋㅋㅋ
도진의 입장에서야 조금은 오묘한 웃음이 나올 그 대화가 보여주듯 바른 엔터 TV 구독자들 사이에서는 벌써 유명한 이야기로 제법 화제가 되었다.
그런 유진이가 바른 엔터 소속 아이돌들의 연습에 더욱 관심을 두는 건 다른 게 아니라 바른 엔터 소속 아이돌들, 이은지와 안티체리, 그리고 레드슈가 코앞으로 다가온 연말의 살인적인 스케쥴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번 바할라 사건의 여파 중 하나가 한국 연예계의 지각 변동이었으니 이 여파의 원인은 무석호다.
도진, 그리고 바른 엔터와 몇 번이고 악연으로 얽혔던 DS 엔터의 대표 무석호.
비밀 금고 안의 내용물을 든 채 붙잡힌 그는 길게 늘어놓을 것도 없이 그냥 인생이 망했다.
덩달아 그 내용물로 인해 무석호 일당 전체가 망했고 자연스레 DS의 기둥뿌리를 뒤흔들었다.
그뿐인가.
DS의 간부들은 물론이요 한통속이었던 유명 연예인, 다른 소속사의 인물들도 줄줄이 수갑을 찼고 연관되지 않은 연예인들은 다급히 소속사를 옮기거나 아예 독립을 해 나갔다.
절대 망할 것 같지 않던 '제국'이 그렇게 망해 버렸는데 놀랍게도 이 빈자리가 시청자들에겐 당장 크게 와닿지 않았으니 바른 엔터가 그것을 메꾼 것이었다.
이번 사건으로 도저히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던 모든 것을 돌이킨 안티체리는 그렇기에 그 어떤 그룹보다 찬란하게 빛났고 그 시기를 놓치지 않았다.
설현주가 어느 정도 회복되자 밀려드는 섭외 중 고르고 골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24시간이 모자랄 만큼의 스케쥴을 소화하기 위해 움직였다.
사건이 있고 오래 지나지 않았음에도 스케쥴을 소화하기 시작한 건 노 저을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억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안티체리가 항상 무대에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치료'다.
그날 사건에 의한 상처의 치료법으로 안티체리는 무대에서의 스포트라이트를 택한 것이다.
방 안에서 그날의 공포를 곱씹는 게 아니라 그토록 염원하던 무대 위에 올라 하고 싶은 것으로 시간을 채움으로써 상처를 치유한다.
다행히 이 시대는 그런 현대 무림에서 일반인이 얻을 수 있는 육체적인 상처는 물론이요 정신적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과학적인 치료법 또한 잘 정립되어 있었고 그 치료법의 일환으로 연예인에게 있어 무엇보다 큰 힘이 되는 무대와 팬들의 관심이 안티체리의 정신적 상처를 대번에 치유해 주었다.
이은지와 레드슈 또한 같은 이유로 살인적인,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이기에 오히려 더욱 빛나는 얼굴로 스케쥴을 소화해 나갔다.
그런 배경으로 바른 엔터가 무너진 DS의 빈자리를 메꾸자 반쯤 농담으로 사람들은 이제 3대 기획사에 DS 대신 BR, 그러니까 바른 엔터를 넣어야 한다는 소리를 했다.
이게 반만 농담인 건 지금의 기세가 그런 말이 나올 정도로 대단했으며 추후 어떻게 성장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진담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티체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이은지 또한 그날의 일을 극복하고 권이솔과 함께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
'폭발적인 어떤 것'이 없을 뿐 레드슈 또한 꾸준히 상승세다.
꼭 어떤 폭발적인 것이 있어야만 성공하는 게 아니다.
레드슈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고 그를 통하여 롱런할 기반을 갖추어 나가는 중이다.
마치 어느날 가을 단풍이 숲을 온통 물들인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전생과 달리 날개가 꺾이지 않은 레드슈는 그 이름을 널리 새길 것이었다.
뭐 그런 사정으로 바른 엔터 소속 아이돌들은 모두가 바빴다. 엄청.
토크쇼는 물론이요 연말 무대에 서기 위한 온갖 컨셉의 무대 준비도 해야 했으니 이 과정을 지켜보고 때로는 도우며 유진이는 많은 것을 배우는 듯 보였다.
일반인 가요제는 또 내년에도 찾아오니 다시 찾아오지 않을 바로 이 시기에 집중한 것이었다.
"수련은 빼으면 안 돼. 알겠지?"
"응, 오빠."
그렇게 유진이가 바른 엔터에서 바쁜 사이, 도진 또한 자리를 비웠던 공백을 메꾸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이제는 어느 정도 혼자서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주기적으로 체크하고 '대주천'을 도와주어야 하는 클로에의 불사마공 수련을 봐 주었고 오성아, 서소담, 그리고 위취련과 위연서까지 함께 잠룡문의 운영도 체크했다.
공식적으론 드러나지 않았지만 나지윤까지 포함된 바할라와의 협업 또한 있었으니 업무가 적지 않았다.
그런 무림인으로서의 업무 외에, 학생 신분으로서 거쳐야 할 크나큰 이벤트 또한 있었으니.
"음."
바로 기말고사였다.
* * * *
숭무고 학생이라면 랭킹전 축제를 즐긴 뒤 겨울 방학을 맞이하기 위해 넘어야만 하는 관문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기말고사다.
천재들만이 모인 학교에서 그것은 어떤 유명한 밈인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를 떠올리게 할 만큼 살벌하고도 힘든 이벤트였다.
다만 요 몇 년간은 그 이벤트의 우승자가 정해져 있었으니 유지은에 이어 '김도진 강점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모르지.
-ㄹㅇㅋㅋ 공백이 길었자너 ㅋㅋ
한데 이번에는 그 강점기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여론이 있었으니 강점기를 만들었던 장본인이 기말고사를 코앞에 두고 큰 사건 때문에 한 달이나 학교에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천재들의 세계에서 한 달이란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들기에 차고 넘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천재가 아니었으며 수업에 특히 집중하는 타입이었던 도진에게 있어 한 달은 크나큰 공백이었다.
"내가 수업 내용 정리해 뒀어! 같이 보자!"
"응. 고마워, 소담아."
"정리 노트.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 봐."
"고맙다."
다만 그 공백을 메꿔 줄 인연들이 있었기에 도진은 이번에도 1등을 목표로 공부할 수 있었다.
2학년 때 '실습'을 이유로 취업계나 결석계를 내고 수업을 빠지는 건 흔한 일이었고 선결석 후보고 또한 흔한 일이어서 도진은 결석으로 인한 불이익은 받지 않았다.
여기에 수업을 빠진 동안의 내용을 일일이 교수를 찾아가 묻고 들었으며 함께 수업을 듣는 소담과 나지윤, 친구들의 도움도 받았다.
특히 소담이 적극적으로, 수업을 듣지 못한 도진을 위해 정성스레 준비한 노트 자료 등을 보여주며 함께 공부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리하여 작은 스터디룸에서 둘이서 공부하던 중 밤이 되었을 때 도진이 말했다.
"나는 기말고사까지는 좀 공부 시간을 늘릴까 싶어."
"그래? 그럼…… 나도 같이 해도 돼? 도진이 너는 공부 잘하니까 같이 하면 좋을 거 같아."
"당연하지."
"응!"
조용한 밤.
단 둘뿐인 시간이 길어진다는 생각에 소담은 가슴이 콩닥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