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꾸웅-!
거대한 벽이 세워진 너머는 웬만해서는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그렇기에 거대한 벽마저 제치고 솟은 산은 그 일부를 통하여 얼마나 높고 거대한지를 연상하게 만든다.
도진과 마주한 슈미트라의 존재감이 그러했다.
굳이 티를 내지 않아도 인간의 본능이 겉으로 드러난 아주 미미한 단서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큰 것을 감추고 있는지를 추측하게 한다.
제아무리 둔한 이라도 그것을 짐작케 할 정도로 그것이 강렬하기에, 심지어 무림인이라 해도 존재감만으로 위압감을 주게 할 정도인 것이다.
꾸우우웅-!
숨이 막힐 듯 거대한 경력을 연신 쏟아내는 슈미트라는 태산 같았다.
그것은 태어나 지금껏 한 시도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고 한계를 넘기 위해 매진했기에 보일 수 있는 모습이다.
신마공.
육체를 극한까지 몰아붙여 '부수고' 그 후 회복을 통하여 한계를 늘리는 연신공.
그리고 그 묘리에 따르는 내공의 존재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초과회복'의 개념을 넘어 그 이상의 진화를 가능케 한다.
허나 그에 관한 이론이 아직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주먹구구식으로 내공에 의한 회복을 기대할 수는 없고 그 단련법 또한 '스스로 단련하여 몸을 망가뜨리는' 수준의 혹사를 요구하기에 결코 보편적인 단련법이 될 수 없었다.
눈앞의 슈미트라는 바로 그 단련법을 극성에 이를 정도로 추구하여 이윽고 한계를 돌파한 무인이었다.
꾸우웅-!
그러니까 강하다.
불사마공이 저주스런 천형(天刑)과도 같은 체질을 타고난 이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낸 무공이라면 신마공은 평범한 이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존재하는 무공.
주어진 한계를 거듭 극복하여 경지에 도달한 슈미트라의 주먹은 최소한 그와 동등한 '무게'를 쌓지 않고서야 정면에서 받아낼 수가 없다.
그러니까 도진이 그 주먹을 정면에서 받아내지 못하고 그 타점이 최고점에 달하기 전에 마중을 나가고, 최대한 흘려 내고, 경로의 옆을 쳐 뒤흔드는 등 유능제강의 묘리를 최대한 활용하여 맞서는 건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그런 도진이, 갑자기 주먹을 쥐었다.
꾸우웅-!
그리고 슈미트라의 주먹을 정면에서 받기 시작했다.
"……!"
이채를 발하는 슈미트라의 눈을 마주한 도진의 입꼬리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그래.
도진이 쌓아온 것들의 무게는 아직 슈미트라가 쌓아온 무게에 미치지 못했다.
그것은 입문 시기가 늦은 도진의 물리적인 한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도진이 쌓아온 것이 정면에서 마주하지 못할 만큼 초라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짓눌리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불행에 시궁창에 처박혔던 세월을 되돌리고 다시 일어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에 감사하며 찾아온 기적을 도진은 결코, 단 한 시도 허투루 하지 않았으니까.
꿈을 꾸기 위해 부족한 그릇을, 육체를 확장하기 위해 도진은 노력했다.
아주 많이.
연신극기공은 그런 도진을 위해 준비된 천마의 연신공이었다.
허나 연신극기공을 통하여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스스로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내는 단련'을 계속해야만 했다.
분자 단위로 육체를 재조립하고 필요하다면 새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맨정신으로 감당하기엔 너무나 두렵고 힘든 그것을 도진은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고 꺼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깎아낸 육체다.
그런 육체이기에 정신에 깃든 깨달음을 투영할 수 있는 신안(神眼)을 뜰 수 있었다.
그 신안으로 본 것들이 이제야 조금, 익숙해졌다.
후웅-!
슈미트라가 내뻗는 주먹이 온전히 비친다.
발끝에서부터 시작하여 주먹까지 이어지는 흐름.
그 흐름과 완벽하게 연계하는 육체의 모든 것까지도.
그리하여 육체를 통하여 구현된 무공마저 꿰뚫어 보았다.
그것이 열세를 메꾸고 정면에서 그 주먹을 마주할 방법을 도출해낼 수 있게 해 주었다.
꾸우우웅-!!
정권과 정권의 격돌.
정면에서의 격돌이되 먼저 타점의 최고치에 도달하였고 송곳처럼 힘을 한 점에 집중하여 이득을 취했다.
쿵-!
그러나 그 이득을 더하여도 손해를 본 건 도진이었다.
이득을 보았음에도, 그럼에도 아직 도진은 부족했던 것이다.
격돌한 주먹에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도진을 밀어낸 슈미트라가 작용한 힘의 반작용마저 이용하여 온몸을 퉁기듯 허리를 비틀고 다시 한 걸음, 진각을 밟고서 왼 주먹을 뻗었다.
그 어떤 동작과 발생한 힘도 버리지 않는 그림 같은 한 수.
꽈앙-!
그 한 수에 도진은 겨우 반응할 수 있었다.
흐트러진 자세마저 이용하여 점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위치를 진각으로 밟고 응수, 그러나 또 한 번 손해를 보고 한 걸음 밀려났다.
꽝-! 꽝-! 꽝-! 꽝-!
슈미트라는 그렇게 손해를 보는 도진을 자비없이 몰아쳤다.
옅게 미소띤 그 얼굴에는 열기가 깃들어 있었으니 지켜보던 바할라의 무인들은 아주 살짝, 불안한 기색을 띠었다.
그것이 왕세자가 크게 흥이 올랐기에 다 억누르지 못하고 새어 나온 흥분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잘 알고 있음에도 혹여 실수를 하지 않을까 걱정을 할 만큼, 지금의 왕세자는 흥이 올라 있었다.
허나 도진은 불안해하지 않았다.
당사자인 도진은, 오히려 왕세자에게 전염이라도 된 듯 마찬가지로 그 얼굴에 열기를 띠고 있었다.
쿵-!
손해를 본다.
꽈아앙-!
그리고 또 손해를 본다.
그러나 그 손해는 신비롭게도 더 커지지 않으니 도진의 발전이 그 손해를 메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생각하기 힘들지만, 기실 도진은 열세(劣勢)에 처한 상황에서의 싸움에 지극히 익숙했다.
심상세계에서의 수련이 매번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진이 또 하나 익숙한 것이 있으니 그 열세에서의 싸움에서 발전하고 또 발전하여 이윽고 한계에서 한 발 더 나아가는 것이다.
우세에 있는 상대에게서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한다.
그럼으로써 빠르게, 더 빠르게 나아갈 수 있다.
'하하.'
굳이 자신의 유리한 부분을 버리고 두 주먹만으로 난타전을 벌인다.
그로 인해 열세에 처했지만 도진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
주먹을 통하여 온몸을 관통하고 허공으로 퍼져 나가는 경력에 의한 고통에도 웃었다.
그럴 수 있는 건 그런 경험을 통하여 온몸으로 깨닫고 그 깨달음을 발판으로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니까.
발전이란 도진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즐거운 것이었다.
그러니까 시야를 가득 채우는 슈미트라의 높아져만 가는 거친 기세와 존재감에도 두려움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기꺼울 뿐이고 그 기꺼움이 이윽고 미쳐 날뛰는 천마기와 '합의'를 이끌어 냈다.
오오오오오오-!!
폭발하듯 천마기의 기세가 도진을 휘감고 몰아친다.
연신극기공으로 깎아낸 육체이기에 담아둘 수 있는 거대해진 천마기다.
콰악!
그 기세는 평소와 달리 제멋대로 날뛰지 않고 오롯이 거세게 말아쥔 도진의 주먹에 깃들었다.
…제법 생소한 기분이었다.
전생의 도진에게 있어 '비무'란, '싸움'이란 두려운 것이었으며 그렇기에 꺼려지는 것이었고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현생에서는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근본적으로 전생에서부터 형성된 도진의 성격상 손을 섞는다는 것에 대한 고민은 어쩔 수 없이 뒤따르곤 했다.
이를테면 우정한이나 유지은, 서소담과의 비무가 그러했다.
무언가를 고려하고 생각해야만 했다.
그런 고려가 필요없는 양아치 등의 인간 쓰레기를 징치하는 건 애초에 '비무'라는 단어를 쓸 수조차 없었다.
그러니까 처음이다.
처음이니까 생소하고.
그래, 이것은…….
'재밌다.'
'재밌는 싸움'이었다.
아무 고민없이, 악의가 섞이지 않은 전력을 다한 주먹을 부딪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버렸다.
그리고 지금, 항상 통제를 벗어나 날뛰고 싶어하던 천마기와 의견이 일치했다.
씨익-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슈미트라와 도진의 입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큰 것이 온다.
이 자리의 모두가 본능으로 느꼈고 대비했다.
그리고 도진은 결정적인 순간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즐거움에 생각했다.
이 주먹에 담을 것은 '효아(哮牙)'다.
위지혁이 보여준, '하늘을 부수는 이치'를 최대한 수습하여 도진이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펼쳐내는 절초(絶招).
지금 도진이 펼쳐내는 몇 안 되는 깨달음의 구체화된 형태.
그러나 그 근본이 이치를 자아내는 것이기에 효아는 무기에 구애되지 않으니 주먹으로도 문제없이 펼쳐낼 수 있다.
그러니까 굳이 다르게 부를 필요는 없다만…….
천마기와 의견이 일치하여 쏟아내는 아주 특별한 일권(一拳)이기에, 도진은 자신의 심상을 주먹에 담아 속으로 읊조렸다.
'조금 오글거리긴 한데…….'
가끔은 큰 즐거움에 그러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효아(哮牙).
폭렬권(爆裂拳).
꽈아아아아아아아앙-!!
* * * *
쩌저저저적.
왕세자만을 위해 존재하는 연무장의 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그것은 점점 더 커지더니 이윽고 바닥 전체에 새겨졌다.
후두둑…….
충격은 바닥에 그치지 않고 퍼져 나간 여파에 벽마저 검은 줄이 새겨지고 부스러기가 흩날렸다.
그 가운데서 주먹을 수습하고 흔들림없이, 당당히 선 도진의 앞에 태산 같았던 슈미트라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말했다.
"탁탑마왕(托塔魔王) 구지천의 후예, 투마전(鬪魔殿)의 전주 슈미트라가 소지존을 뵙습니다."
"소지존을 뵙습니다!"
우렁찬 외침이 연무장을 떨쳐 울렸다.
* * * *
꽈아아아아아아아앙-!!
"으허헉?!"
"뭐, 뭐야?!"
아닌 밤중에 터져 나온 폭음에 숙소에 머물던 합동 수사대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놀라 일어섰다.
안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뜬눈으로 걱정하고 있었기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혹시 공습에 의한 테러라도 일어났나하는 생각까지 들었던 그들은, 곧 숙소로 찾아온 도진의 모습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 잠룡문주?"
"그, 그건?"
방금의 폭음마저 잊고 도진을 커다래진 눈으로 쳐다보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슈미트라를 따라갔던 도진의 옷이 넝마가, 적나라하게 말해 걸레짝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일단 드러난 몸에 상처는 없지만 꼴이 그러니 혼란이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도진이 드물게도 하하하, 즐거운 얼굴로 웃고선 돌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멋대로 나서 여러분들에게 걱정을 끼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 그건……."
"왕세자님과는 좋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거기와 관련된 그 어떤 불합리나 손해는 없을 것이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믿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으, 으음……."
걱정하고 있던 부분에 관해 이렇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해결을 보았다 이야기하니 어떻게 할 말이 궁색해진다.
여기에 도진이 흥을 다 숨기지 못하는 얼굴이라 더욱 혼란스럽다.
유지은이 그런 도진에게로 다가갔다.
"후배……."
"네, 선배."
"지금 무지하게 야한 거, 알아?"
"그게 무슨 변태 같은 시선입니까, 선배."
"아니이……. 후배 몸이 이렇게까지 좋은 줄 몰랐거든, 나."
엉뚱하게도 그 말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동의했다.
옷이 넝마가 됐는데 오히려 도진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으니 연신극기공으로 깎아낸 도진의 육체가 그 슈미트라 못지 않게 예술의 영역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엔 호리호리했던 옷 안의 육체는 극한까지 압축한 듯한 근육이 완벽한 밸런스를 만들어내며 자리잡고 있다.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예술처럼 연계하여 움직이는 근육은 남녀를 떠나 무인으로서 홀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도진은 유지은의 자연스런 꼬시기, 도끼질에 피식 웃고선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도진이 말끔한 모습으로 나와 아직 잠들지 않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는 아직 왕세자님과 못다 한 이야기가 있어서요. 내일 아침 회의에는 꼭 참석할 테니 걱정 말고 주무세요.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한진 모르겠지만 도진은 그렇게 말하고서 휑하니 떠나 버렸다.
사람들이 멍하니 있는 가운데 유화성이 말했다.
"비밀이 많은 아이구나."
"네. 그래서 더 매력적이지 않아요?"
"글쎄다……."
"날 이렇게까지 두근거리게 하는 건 후배가 처음이에요."
"…요즘 네가 이상한 책을 너무 많이 보는 거 같아 할아버지는 조금 걱정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