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화
도진이 본 바할라의 무인들은 육체의 스펙이 유독 뛰어난 부류였다.
무협지에서는 흔히 내공과 외공을 나누고 외공을 내공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보았다.
무조건 틀렸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모든 면에서 내공은 외공에 비해 우위에 있었으니까.
허나 더 심도 있게 들어가면 애초에 내공과 외공을 나누는 것부터가 지적할 부분이 있었으니 무공이란 심기체가 고루 조화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론적인 연구에 특화된 현대에서는 그렇기에 내공과 외공을 분류는 하되 '분리'는 하지 않는다.
내공의 수련과 외공의 수련을 병행하는 것이다.
일부 내공에 소질이 없어 외공에만 투자하는 이들만큼은 아니어도 내가기공 위주로 수련하는 이들 또한 피나는 외공 수련을 해야만 했다.
그런 배경으로 보더라도 바할라의 무인들은 유독 육체의 스펙이 대단했으니 그에 특화된 무공을 익히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동시에 도진은 어느 정도 '기시감'을 느꼈으니 그들의 육체에 왠지 모를 익숙함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교의 연신공과 비슷한 느낌이로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군요.
위지혁의 말대로 그들의 육체에는 천마신교에서 보급하는 연신공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 있었다.
소랑대.
마교의 신병훈련소 개념인 그곳에 보급하는 연신공을 신마공(身磨功)이라 했다.
서태주에게 주었던 바로 그 연신공인데, 신마공은 육체를 더 단단하고 빠르게 만들어 주며 더 나아가 재능의 한계치를 높여주는 공능을 가지고 있었다.
바할라의 무인들은 그런 신마공과 비슷하게 저 정도나 되는 육체를 그저 타고난 게 아니라 단련을 거쳐 '깎아낸' 것이었다.
그런 기시감의 정체가, 무인들을 통솔하는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중년의 무인을 보는 순간 드러났다.
도진의 신안은 단순히 겉을 보는 게 아니라 거기에 담긴 '이치'를 꿰뚫어 볼 수 있게 한다.
그 덕분에, 도진은 중년의 무인의 육체에 깃든 무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허허…….
위지혁이 웃었고 도진 또한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을 보게 돼 놀랐다.
그리고 그 감정이 담긴 눈이 중년의 무인과 마주한 순간, 그의 눈 또한 크나큰 놀람과 경악으로 일렁였다.
"…왜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합동 수사대의 관계자들이 의아해하자 그는 바로 표정을 수습하고 사과, 몸을 돌려 왕성으로의 경호 업무에 들어갔다.
당사자가 아니라고 하는데 추궁할 수는 없어 합동 수사대는 곧 그 뒤를 따라갔다.
"……."
도진에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던 유지은과, 높은 무공 실력과 풍부한 경험이 있는 유화성만이 도진과 그의 찰나의 교류를 눈치챘다.
도진과 눈이 마주치자 유지은은 싱긋 웃으며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는 선배로서의 매력을 보여 주었다.
도진이 그런 유지은의 배려에 감사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합동 수사대는 바할라의 왕궁으로 향했다.
군대를 연상케 하는 엄정한 규율을 자랑하는 왕궁 직속 무인들의 경호를 받으며 이동하는 합동 수사대는 상당한 시선을 끌었으나 소란이 일지는 않았다.
공항에서와 마찬가지로 바할라 사람에게 있어 이런 류의 '이벤트'는 호들갑을 떨 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과연 한국과는 다른, 한때 '용병 국가'라고까지 불렸던 바할라의 분위기를 느끼며 합동 수사대는 왕궁에 입성했다.
미리 협의가 되어 있었기에 여행으로 인한 흐트러짐을 잠시간 정리하고 바로 1왕자, 왕세자와의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반갑습니다. 나비 슈미트라 아울 바할라입니다."
'나비'는 바할라어로 '이끄는 자'라는 뜻으로 왕족의 이름 앞에 붙는다.
그러니 1왕자의 이름은 슈미트라다.
슈미트라는 과연 직접 보니 더욱 강렬한 존재감으로 스스로에 대한 자신이 없는 이라면 평범하게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힘들 정도다.
"예, 반갑습니다."
합동 수사대에서는 정부 쪽의 대표가 나서서 인사를 받았는데 그 또한 제법 인물임에도 슈미트라를 마주하는 걸 버거워했다.
그런 슈미트라의 시선이, 찰나지만 아주 강렬하게 도진과 스쳐가듯 마주했다.
의미심장한 그 찰나의 눈맞춤 이후 슈미트라는 이 만남의 본래 목적에 충실했다.
"왕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사건의 해결에 바할라 왕가는 총력을 다할 것입니다."
기자 회견을 열어 그렇게 선언했으며 선언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수사를 위한 회의 자리에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1왕자의 의지가 보통이 아니네요."
"예. 확실히 인물은 인물입니다."
합동 수사대 내의 일부 인물들은 사실 바할라를 얕보고 있었다.
용병 국가니 산유국이니 하지만 '메이저한 나라'라는 이미지는 없었기 때문에.
하물며 인구가 적은 탓에 넓은 국토를 다 커버하지 못하고 이번 습격이 있었던 정글 또한 범죄 집단의 소굴이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하지만 직접 바할라를 방문해 1왕자를 보고 나니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앞으로는 말이다.
그렇게 첫날의 일정이 끝나고 왕성 내에 마련된 숙소에 합동 수사대가 자리를 잡았다.
도진과 위취련을 포함한 열 명의 독마전 무인들, 그러니까 12인의 잠룡문은 열두 명이 쓰기에는 과분할 정도로 넓은 숙소 한 동을 배정받았다.
그 숙소의 거실에서 도진이 위취련과 마주 앉았다.
"위 전주도 알아봤지?"
"예, 소지존."
도진이 보고 느낀 것을 위취련 또한 보고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빠른 시일 내에 자리가 만들어지리라……"
쿠웅-!
위취련의 말은 중간에 사그라들었다.
바깥에서 돌연 거친 기파가 터졌기 때문이다.
하나가 아닌 둘. 서로 부딪치는 그것은 명백하게 험악한 분위기에서의 기싸움이었다.
한쪽은 합동 수사대의 것. 그리고 다른 한쪽은 바할라의 것이었으니 무시할 수 없어 도진은 위취련과 함께 바깥으로 나가 보았다.
상당히 떨어진 곳.
도진의 기감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정원에서 느꼈던 대로 합동 수사대와 바할라의 무인들이 기세를 내뿜으며 대치하고 있었다.
그들을 훑은 도진은 들을 것도 없이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합동 수사대의 무인들은 정부와 무림맹에 소속된 무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반대편 바할라의 무인들은 2왕자 쪽에 소속된 무인들이었다.
그리고 그 바할라 무인들의 가운데 2왕자가 서 있었으니 원인은 뻔한 것이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왕성에 발을 들였으면 자중하여야 하는 법. 감히 이렇게 기세를 드높이는가."
2왕자가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린다.
"……."
합동 수사대의 무인들은 그에 대꾸하진 않았으나 기세가 거칠다.
도진은 그들이 정부와 무림맹 소속이 아니었다면 대번에 싸움이 났을 거라 생각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저쪽에서 시비를 걸었어."
근처에 있던 유지은이 자초지종을 섭음술로 설명해 주었는데 듣자하니 숙소 내에서 합동 수사대의 무인들이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데 갑자기 2왕자가 무인들을 대동하고 나타나 소란을 일으키지 말라며 트집을 잡았다는 거다.
"2왕자 입장에서는 우리가 마음에 안 들고 불안하기도 할 테니 저렇게 시비를 거는 거겠지."
그 시비가 참 사람 심기를 건드리는 형태다.
무인이 배정받은 숙소의 정원에서 가볍게 몸을 푸는데 그걸 시끄럽다고 일부러 트집을 잡으러 오다니 말이다.
그나마 시비가 걸린 게 정부와 무림맹 소속이어서 뒤를 생각해 참고 있는 것이지 일반적인 무림 문파의 무인들이었다면 들이박았을 일이었다.
"외인에게는 외인의 법도가 있는 법. 그조차 알지 못하고 이렇게 계속 무례를……"
"야, 너."
"……!!"
대치하던 기세가 크게 일렁이며 놀람과 경악이 퍼져 나간다.
그것은 돌연 잘난 듯 중얼거리던 2왕자의 말을 끊으며 나선 도진의 발언 때문이었다.
"지, 지금 무어라"
"너라고. 너."
바할라에서는 두 가지 언어를 쓰는데 하나가 바할라어고 다른 하나가 영어다.
본래는 바할라어만 썼었는데 용병 국가로서 외국에서 활동하는 인구가 늘면서 영어가 유입, 공용어처럼 자리를 잡은 것이 배경이다.
이 자리에서는 자연스럽게 영어가 쓰였다.
그리고 요즘엔 꽤 알려진 것인데, 영어에도 '존댓말'이 있다.
정확히는 격식을 갖춘 말이 있는데 특히 이곳이 왕국이기에 더더욱 그런 말의 사용이 중요했다.
이를테면 평민은 왕족을 'Your Majesty'라고 극존칭으로 부르는 등이다.
이곳에 온 합동 수사대는 당연히 그런 격식을 갖춘 영어를 사용해 왔다.
한데 지금.
도진이 2왕자를 You, '너'라고 칭해 버린 것이다.
2왕자는 상상도 못한 말을 들은 탓에 순간 혼란이 왔다.
그리고 뒤이어 혼란을 대번에 불태워 버릴 듯한 분노가 찾아왔다.
"감히!"
"뭐가 감히야. 너 모르냐?"
기세 좋게 분노를 터뜨리려던 2왕자의 말을 도진이 끊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정확히 2왕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니 권위가 인정되는 건 너의 백성들에게만이야."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현대에는 아직도 왕이 통치하는 군주제의 나라가 여럿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나라들과 무림인들 사이의 마찰이 무림 르네상스 시절 유독 극심했었고 큰 문제가 되었다.
무공이 등장하면서 특히나 중시되고 또 커다란 담론을 형성한 것이 '자유'였다.
마치 서로가 총을 들면 서로가 조심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유란 '방종'과 달라 책임이 요구되는데 그 책임 중 하나가 상호 존중이었다.
한데 군주제에선 그 '상호 존중'의 의미가 달라지고 만다.
그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가 군주제 나라로 여행을 갔던 무림인이 왕을 모독했다며 억울하게 체포를 당한 사건이었다.
그 나라의 규율을 잘 몰라 저도 모르게 왕을 모독하는 죄를 저지른 건 어찌되었든 '죄'라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체포된 무림인에게 팔을 자르는 중형이 내려진 건 보편적인 관점에서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 무림인은 무력을 사용하여 구치소를 탈출, 자신의 나라에 구조를 요청했으니 사건은 커지고 커져 이내 전쟁마저 일어나고 말았다.
이런 초대형 사건에 여타의 사건들까지 합쳐져 관련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국제적인 토론을 거쳐 합의를 이끌어 내게 됐으니 그들 나라 군주의 권위는 그들 나라의 백성들에게만 영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여한 나라 간의 국제적인 조약으로 합의됐는데 여기에는 바할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진은 미리 그에 관한 정보 또한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약을 떠나 당신은 무례한 것이……!"
"그걸 따지려면 쟤부터 따져야지."
2왕자의 곁에 있던 무인 중 하나가 분기탱천하여 소리를 높이려 했으나 이 또한 도진의 조용하지만 무겁디 무거운 말에 차단당했다.
"상호존중. 기본이잖아? 그 기본을 자신은 안 지키면서 남에게는 강요하려 드는 건, 뻔뻔하기 짝이 없는 일이잖아?"
"……."
2왕자가 침묵했다.
그의 얼굴은 당황과 혼란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으니 마치 이런 일을 처음 당해 갈피를 못 잡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당황과 혼란은 전체에 퍼져 있었는데, 그것이 마치 폭탄의 심지처럼 빠르게 줄어드는 중이다.
저벅저벅저벅.
그러나 이 소란은 폭발하지 못하고 더 이어지지도 못했으니 슈미트라가 직속 무인들과 함께 직접 나타났기 때문이다.
거칠지 않지만 존재만으로도 공간을 무겁게 가득 채우는 무시무시한 존재감의 슈미트라는 가장 먼저 2왕자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네 궁으로 돌아가라."
"……!!"
그 존재감이 고스란히 실린, 그래서 차라리 언령(言靈)이라 해야 할 만큼 엄정한 명령에 2왕자는 두 눈을 크게 떴으나 이내 뿌득 이를 갈며 몸을 돌렸다.
2왕자 세력이 떠나가자 슈미트라는 합동 수사대에게로 몸을 돌려 고개를 숙였다.
"무례로 인한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슈미트라의 사과에 합동 수사대의 정부측 대표가 '아, 아닙니다'하고 사과를 받았다.
그렇게 사건이 정리가 되자 슈미트라는 다음으로 도진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 미소짓고 있으나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방향성은 조금 다르지만 2왕자 이상으로 진한 어떤 것이 담겨 있었다.
"잠시, 말씀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도진은 웃으며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죠."
* * * *
도진이 잠룡문도들과 함께 슈미트라와 자리를 뜬 뒤.
유지은이 유화성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혹시 도진이랑 왕세자님이랑 싸우는 건 아니겠죠?"
"허허.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래야 하는데, 어쩐지 싸울 분위기였단 말예요."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정말로 그럴 리가 없다.
바할라의 왕세자랑 합동 수사팀의 김도진이 주먹다짐을 하다니 말이다.
하지만 유지은의 '촉'이 이상하게도 두 사람이 치고박는 그림을 그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꽈과과과광!
그 촉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