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375화 (375/741)

374화

주말.

도진은 설현주의 병문안을 왔다.

삼엄한 경비 속에서 설현주는 병문안을 온 도진을 환히 웃으며 반겨 주었다.

"어서 와!"

웃는 얼굴이 생각보다 더 밝아 보였기에 도진은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일반인'이 겪기에 그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었으니까.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의 복면인이 안개 뒤덮인 정글에서 독 묻은 시퍼런 단검을 들고 화살까지 쏴 가며 죽이려 들었다.

반나절을 그렇게 쫓기던 경험은 육체 이상으로 정신을 넝마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당장 촬영팀은 물론이요 그래도 무공을 익힌 레드슈와 이은지마저 외상 후 스트레스를 호소해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실제로 칼에 찔린 설현주는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런 설현주를 위하여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었고 지인들이 찾아와 이야기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상대가 도진이 되었다.

스스슥-

"와, 귀엽다."

"누나 때문에 배워온 거예요."

"헤헤. 환자도 할 만하네?"

"어허. 철없는 소리."

"히잉."

사 온 사과를 토끼 모양으로 귀엽게 깎아 접시에 담아 주었다.

일부러 과도를 사용했는데, 혹시라도 설현주가 날붙이 등에 과민하게 반응하거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이렇게 친숙한 이미지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나마 요즘엔 정신 수양을 위한 좋은 도가 계열 무공들이 있어서 사정이 낫다.

무(武)로써는 부족해도 이런 일을 겪은 사람들을 위한 정신적인 부분에서는 오히려 훨씬 효과가 뛰어났던 덕분이다.

최대한 부드럽게, 그러면서 또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이어가다 도진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누나, 왕성에도 갔었죠?"

왕성이라면 남쪽 나라의 왕성이다.

설현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청 컸어."

그것은 촬영 5일 차의 일이었다.

"사실은 첫날에 왕성에 가서 식사도 하고 이것저것 찍은 뒤에 정글에 들어가야 했는데 그게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순서를 바꿨다고 들었어."

그 말대로였다.

본래 정글 게임은 남쪽 나라의 왕성에 방문, 1왕자와 만나는 특별한 오프닝으로 시작하려 했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일정이 변경돼 한창 정글에서의 촬영을 하다 5일 차에 그럴싸한 명목으로 왕성에 방문, 1왕자와 만나 식사를 함께 하는 씬을 찍었었다.

"왕자님은 어땠어요?"

웃으며 묻는 도진에게 설현주가 으응, 하고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꽃미남인데 짐승남 같은 느낌?"

"잘생겼죠?"

"응. 근데 진짜 왕자님이라서 그런지 느낌이 다르긴 다르더라."

설현주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알 수 있었기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자료를 통해 본 1왕자는 설현주의 말대로 '꽃미남'이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선이 부드러운 그는 그러나 얼굴과 달리 190에 달하는 큰 키에 90킬로가 넘는 몸무게의 압도적인 피지컬을 자랑했다.

중요한 건 그 몸무게와 근육질에도 불구하고 부하다거나 둔중하게 느껴지지 않는, 오히려 날렵함을 느낄 정도로 신체의 밸런스마저 훌륭하다는 부분이다.

세계 장인 박람회에서 보았던 빌리 플로이드에 가까운, 호랑이 같은 고양잇과 특유의 위압감과 날렵함을 같이 느낄 수 있는 그런 타입.

무림인을 기준으로 해도 단연코 돋보이는 육체였다.

여기에 다른 이의 위에 서는 사람으로서의 아우라를 둘렀다면 과연 '느낌이 다르다'고 절로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현주는 사과를 오물거리며 이어서 말했다.

"응, 그래도 정말 친절했어. 웃으면서 먼저 장난도 쳐 주구. 그래서 좋은 사람 같았어."

"그래요."

실제로 주위의 평판도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면, 2왕자는 어때요?"

이어진 도진의 물음에 설현주가 우움, 하고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것만으로도 1왕자와 달리 상당히 부정적임을 먼저 알 수 있게 된다.

"솔직히 좀 나쁜 사람 같았어."

그러면서 풀어내는 건 식사 후 허락된 구역의 왕성 촬영 때 이야기였다.

* * * *

"와……. 왕성은 정말 다르구나."

"촌 사람처럼 왜 그래요, 좀."

설현주가 감탄하고 손정혁이 타박한다.

정글 게임의 공식이 되어 버린 장면의 배경이 되는 왕성은 과연 감탄이 나올 만큼 대단하긴 했다.

상당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의 왕성은 이국적이지만 동시에 전통적인 웅장함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다.

과연 이건 좋은 그림이 되겠다 싶어 제법 분량을 할애할 생각으로 촬영을 이어나가던 그들은, 돌연 서늘한 시선을 느끼고 움찔했으니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일련의 무리 때문이었다.

날카로운 창과 날렵한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그들의 선두에는 날카롭게 벼린 시커먼 세검(細劍), 레이피어를 연상케 하는 이가 서 있었으니 바로 2왕자였다.

비쩍 말랐는데 신경질적인 인상에 마주하는 이마저 물들어 버릴 듯 기질도 어둡다.

형과는 전혀 다른 인상의 그는 위협적인 기세를 내뿜는 무인들을 배경으로 둔 채 촬영팀을 노려 보았다.

"감히 왕성 내를 제집처럼 활보하며 소란을 피우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죄, 죄송합니다."

PD가 반사적으로 사과했다.

살벌한 분위기에 이미 알고 있었던 눈앞의 인물의 신분 때문에 촬영팀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호하듯 동행했던 떡 벌어진 어깨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1왕자가 붙여준 왕실 직속 무인 중 한 명이었다.

"2왕자님. 이분들은 저하의 손님입니다. 말씀을 삼가시길."

"뭐라?!"

2왕자가 남자의 말에 발끈하여 소리쳤으나 곧 이를 뿌득 갈며 화를 억눌렀다.

여기서 소란을 일으켜 명분을 줘 봐야 자신의 평판만 깎이기 때문이다.

"…왕실을 혼란케 하는 이들을 들이다니. 형님도 정말 무책임하기 짝이 없군!"

마치 삼류 악당이 없는 자존심을 토해내듯 그런 말을 하고서 2왕자는 휙 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 * * *

"와, 저랑은 완전 상극인 인간이네요."

"헤헤. 너 있었으면 그 사람 혼내줬을지도."

설현주를 통해 들은 일화는 역시 나지윤을 통해 알게 된 정보와 다르지 않았다.

2왕자.

안하무인에 선민 사상에 찌든 인간이라 했으니 과연 도진과는 상극 그 자체였다.

천마신교는 '태생에 의한 계급'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은 오롯이 사람 그 자체로만 판단되어야 하며 태생은 기준이 될 수 없다.

부패한 관리와 왕에 의해 불합리를 겪어야만 했던 이들이 다수였던 천마신교였으니 이는 더더욱 단단한 기준이었으며 도진 또한 여기에 동의했다.

동시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양자의 동의로만 성립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교도들의 인도자여야 하는 천마는 결단코 모두의 동의 하에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그런 천마신교의 교주인 '천마(天魔)'가 되어야 할 도진에게 있어 2왕자는 얼마나 맞지 않는 인간이겠는가 말이다.

도진은 웃으며 말했다.

"뭐, 기회되면 좀 혼내 주도록 할게요."

"어어? 정말? 그래도 돼?"

"누나가 혼내 달라고 하면 될 거 같은데요?"

"어……."

설현주는 도진의 말에 우물쭈물하면서 결국은 혼내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안티체리'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이미지와는 정말 맞지 않는 순한 사람이다.

도진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착한 딸래미 누나. 빨리 낫도록 해요. 그래야 다시 뻐꾸기가 돼서 훨훨 날아다니죠."

"…갑자기 뻐꾸기가 왜 나와?"

"누나는 재능이 있는 거 같거든요. 다 나으면 제가 진짜 훨훨 날 수 있도록 특별지도를 해 줄게요. 주 6일 정도로."

"싫어. 안 할래. 안 해도 돼."

"그럼 푹 쉬어요, 나의 작은 뻐꾸기."

"야!"

* * * *

병문안을 마친 도진은 출국 준비를 했다.

목적지는 다른 곳이 아니라 남쪽 나라, '바할라'였다.

-…정부와 정의검가, 그리고 잠룡문 등으로 구성된 합동 수사대는 직접 바할라로 가 왕가와 합동으로 조사를 할 예정입니다.

바할라는 이번 습격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호감을 산 부분이 있었으니 왕세자로서 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보고 있는 1왕자가 대처를 잘 했기 때문이다.

그는 정글 게임팀의 치료비를 전액 지원했으며 보상금도 지불했다.

-인당 1억? ㅁㅊ;;

-이게.. 이게 금융치료인가 ㄷㄷㄷ;;

바할라가 약속을 다 이행하지 못했음을 사과하며 국고가 아닌 개인 재산으로 보상했다는 것까지 알려지며 더욱 호감을 샀다.

단순히 돈만 뿌렸다면 비호감을 샀을 텐데 여타의 '높은 사람'들과 달리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자 부덕의 소치라고 고개 숙여 사과하며 생각 이상의 보상을 하니 호감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개 숙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당당히 숙인 고개를 들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명언 ㅎㄷㄷ하네.

왕세자는 한국과의 합동 수사에 흔쾌히 동의하고 여러 지원 또한 약속했다.

그런 배경으로 나쁘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도진이 포함된 합동 수사팀은 남쪽 나라, 바할라로 떠났다.

* * * *

"아."

"왜 그래?"

비행기 안.

갑자기 아, 하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도진의 모습에 바로 옆에 앉았던 유지은이 시선을 향했다.

도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 외국가는 거 이번이 두 번째네요."

"어? 그래?"

"네. 비행기도 저번이 처음이었네요."

"헤에, 그랬구나. 좋은 거 알았네."

싱긋 웃으며 유지은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유지은의 모습에 도진이 물었다.

"이게 뭐 그리 좋은 거예요."

"응, 그냥. 너에 대한 건 뭐든?"

돌아온 대답은 그윽한 눈빛과 함께였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 순간 온몸과 정신이 함락당해 버릴 모습이었으나 도진은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그건 또 어느 책에서 나오는 대사입니까."

"심쿵하는 연애의 기술?"

"역시 선배는 천재네요."

본격적으로 무림인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유지은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비행기는 바할라의 공항에 도착했다.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기에 입국 심사 등에 시간을 소요하는 일은 없었다.

무려 왕세자의 직인이 찍힌 공문이 있었으니까.

혹시라도 2왕자가 압력을 넣어 소란이 일어나는 걸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렇게 게이트를 통과하니 대기하고 있던 바할라 왕가 소속의 무인들이 보였다.

나름 붐비는 공항 로비의 일상적인 모습과 칼같이 규율이 잡혀 있는 왕가 소속 무인들의 모습은 제법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바할라.

바다에 인접한 이 나라는 어업을 중심으로 하던 나라였다.

때문에 기질이 거세되 척박한 환경에서의 삶이 필요할 때는 공동체로서 움직이는 삶을 배우도록 만들었다.

이후 무공이 현실이 되면서는 용병으로 활동하는 사람도 많았으니 '바할라 출신 용병'이라고 하면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신분 보증이 될 정도로 유명했다.

그래서일 것이다.

산유국이 되고 또 희귀 광물들이 묻혀 있는 광산까지 발견된 바할라는 엄청난 부국이 되었음에도 나태함이나 여유로움보다 날카로움이 앞서는 분위기였다.

때문에 나라가 떠들썩하고 왕가 소속의 무인들이 손님들을 맞기 위해 도열해 있음에도 그 기질이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계속하도록 한다.

'인구만 많았으면 대번에 강대국이 되었을 거라는 평가가 정확하네.'

고개를 끄덕이며 도진은 합동 수사대에 섞여, 유지은과 함께 바할라 왕가 소속의 무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급소만을 가리는, 활동성을 중시한 가죽 갑옷을 입었는데 서양쪽 무인들이 온몸을 빈틈없이 감싸는, 그럼에도 활동성을 보장하는 최첨단의 슈트를 걸치는 것과는 역시 느낌이 많이 다르다.

합동 수사대가 거리를 좁히자 마주한 왕가 소속 무인들 사이에서 대표가 앞으로 나섰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꾹 다문 입술이 강직한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중년 남성이었다.

일부 드러난 근육이 오히려 갑옷보다 더 단단해 보이는 그를 눈에 담은 순간.

"……."

도진의 신안(神眼)에 파문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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