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화
정글 게임과 관련한 일들은 이보다 좋을 수 없을 만큼 좋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글 게임이 휩쓸렸던 습격 사건은 그렇지 못하고 반대로 긴장을 더해가는 형국이었다.
-2왕자가 1왕자의 입지를 흔들기 위하여 판을 만들었다.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
허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2왕자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정황 증거'일 뿐 확실한 증거가 없었기에 무려 2왕자나 되는 신분의 인물을 어찌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도 아니고 왕정 국가. 그곳의 2왕자나 되는 인물을 증거도 없이 몰아붙였다가는 설령 1왕자라 해도 역풍을 맞게 된다.
때문에 혼란 속에서 긴장이 고조되며 살벌한 분위기로 대립하는 중에도 어떤 결론이 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는 중이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에 남몰래 가슴 졸이며 벌벌 떨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전혀 예상외의 인물, DS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무석호였다.
-리플렉스도 불쌍하게 됐네.
-정글 갔던 애들 다 충격 받아서 치료까지 받고 있다고 함 ㅜㅜ
-이번 일만큼은 DS도 동정이 가긴 하네.
DS는 이번 사건에서 철저하게 피해자의 입장이었다.
정확히는 방송에 참여했던 아이돌들이 큰 동정표를 받았는데 이는 DS 입장에서는 의도했던 것 이상의 호재였다.
애초에 DS가 그 높던 콧대를 낮추고 정글 게임에 참여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최악으로 치달은 여론을 바꾸고 생각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던 소속 아이돌들의 이미지도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번 일은 감정을 모두 제외하고 결과만 놓고 보자면 그가 의도했던 것을 초과 달성하게 해 준 '좋은 일'이었다.
출연했던 아이들은 의도대로 어느 정도 이미지 세탁에 성공했고 어쨌든 인지도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정신적으로야 충격을 받았지만 육체적으로는 이렇다 할 상처를 입지 않았다.
하물며 정글 게임의 호재 또한 DS의 호재였으니 어찌되었든 시청자들은 바른 엔터와 DS의 경쟁 구도였던 촬영을 계속 이어나가길 바라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흐름에 숟가락을 넘어 아예 겸상까지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로 비치지만 사실은 큰 이득을 거둔 무석호가 범죄자마냥 벌벌 떨고 있는 건, 실제로 그가 범죄자였기 때문이다.
'이런 개 미친 새끼들…….'
그는 정글 게임의 촬영이 있기 전 어떤 브로커를 만났다.
그 브로커가 제안했다.
"김도진은 이제 건들기 힘들겠지만 바른 엔터의 애들은 좀 다르지 않겠습니까?"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DS는 김도진과 바른 엔터에 악감정이 가득했다.
다만 이제 와서는 섣불리 손을 쓸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김도진이 커 버렸고 바른 엔터 또한 쉽지 않은 상대가 되었다.
그 이전에 어설프게 손을 썼다가 이미 크게 데기까지 하지 않았나.
때문에 이만 바득바득 갈고 있었는데 바로 그 시점에서 뜬금없이 브로커가 접근한 것이다.
"1억만 주십쇼. 모든 것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움직이겠습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 또한 뒷골목에서 굴러먹던 인간이었다.
나름의 깜냥으로 눈앞의 브로커가 그리 대단치 않은 수준임을 파악했고 그저 푼돈으로 바른 엔터를 괴롭히는 정도의 화풀이를 할 생각이었다.
스토커가 되었든 위협이 되었든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바른 엔터놈들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그로 인해 잡혀들어가는 것들이 있어도 무석호와는 관계없었고 그에게까지 화가 미칠 가능성도 없다.
잔챙이들이 움직이는 만큼 그 파장과 위험성 또한 잔챙이 수준이니까.
딱 그 정도 생각이었단 말이다.
-정의검가는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다하겠습니다.
-정부는 이번 사태에 관해 이례적으로…….
-한국의 무림맹은…….
'씨이……발.'
그런데 이게 뭔가.
그는 분명히 '푼돈'을 건넸는데 벌어진 일은 무슨 전쟁이라도 날 것처럼 거대한 스케일이었다.
나름 배포가 크다 자부하던 무석호였으나 그것도 뒷골목 출신 양아치 기준에서다.
이만큼이나 되는 일에 연관되면 벌벌 떨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만한 일을 벌이는 놈들이 어설프게 꼬리를 밟혔을 것 같지는 않지만 동시에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말았으니 또 모른다는 불안이 도저히 사그라들지가 않는다.
때문에 초식 동물이 포식자가 근처에 있는 것처럼 긴장하여 이것저것 대비를 하고 있었는데.
"혀, 형님!"
바로 그 대비 덕분에 한 발 빠르게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헐레벌떡 뛰어들어온 놈은 경찰과 검찰 쪽에 심어둔 놈이었다.
그놈이 숨을 헐떡이며 자신이 물어온 정보를 풀어 놓았다.
"뭔 일이야."
"수, 수색 영장 나올 거 같습니다."
"이런 씨발! 움직여!"
"아, 알겠습니다!"
뜬금없이 수색 영장이 나올 만한 일로 짐작가는 건 딱 하나뿐이다.
보신에 진심인 편인 그는 '그럴 리가 없는데'라는 행복회로를 돌리는 멍청한 짓을 할 시간에 즉시 움직였다.
은밀히 숨겨져 있는 비밀 금고에서 수기 장부를 포함한 결코 들켜서는 안 될 것들을 챙겨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수기 장부.
법적으로 보호 받지 못하고 공식적인 어떤 것을 남기지 못하는 구린 일을 하는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뢰나 약속이 천박한 농담으로 여겨지는 바닥이기에 서로를 속박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핵폭탄.
이것만큼은 결코 터져선 안 됐다.
구우우웅-!
그가 아끼는 스포츠카의 엔진이 거칠게 울었다.
평소엔 이 엔진음을 여유와 함께 즐김으로써 예열 후 도로를 달렸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대번에 엑셀을 밟아 지하 주차장을 빠져 나왔다.
긴급 상황에 대비한 매뉴얼은 이미 거듭 수정을 거쳐 확실하게 마련이 되어 있었다.
심복인 송원석 실장을 필두로 믿을 만한 녀석들이 맡은 역할에 충실한 동안 무석호는 들켜서는 안 되는 것들을 가지고 '해외 출장'을 간다.
그렇게 시간을 벌며 사태를 파악, 시간을 끌며 비비기만 하면 그의 'VIP 고객'들이 무마해 주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럴 생각으로 지하 주차장을 빠져 나와 본격적으로 엑셀을 밟으려던 그는.
콰아아아앙!
"으, 으아아아아악!!"
갑작스런 충격과 굉음, 그리고 붕 뜨는 느낌에 비명을 내지르며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투웅!
최고급의 에어백이 터지며 그를 압박했다.
찰나 그는 죽음을 떠올렸다.
'사, 살인멸구?'
사건이 사건이다 보니 그를 죽여 입을 막으려는 공작에 당한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어마어마한 일을 터뜨린 조직이다.
그가 수색당할 상황에 처하자 바로 정보를 입수하여 그를 제거하려 드는 시나리오가 벌써 만들어진다.
허나 무석호는 곧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더 이상의 충격이 없었으니까.
쿠웅!
"……!!"
그리고 언뜻 시야에 들어오는 것에, 그는 육체의 충격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정신적 충격을 받고 말았다.
에어백에 가려 한정적인 시야에는 입꼬리를 올린, 그러나 공포스런 괴물로 보이는 잘 아는 '학생'이 본네트를 우그러뜨린 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학생, 도진이 말했다.
"무 대표, 조사 받아야 되는데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요?"
* * * *
도진은 덫을 놓았다.
장부를 통하여 이번 습격에 무석호가 연관이 있다는 정보를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구성된 합동 수사 본부에 제공하고 덫을 치도록 제안했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일부러 수색 영장이 발부되었다는 정보를 흘렸고 잔뜩 긴장했던 무석호는 대번에 그 미끼를 물고 소중한 증거를 스스로 꺼내 굴을 나왔다.
그리고 대기하던 도진과 체포조에게 붙잡혔다.
본래 무림의 사건이라 해도 후기지수, 그러니까 철저하게 '학생'의 신분이었다면 이렇게 사건에 깊이 관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도진은 이미 이번 사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했기에 그저 학생이 아닌 한 명의 무림인이자 관련자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당연한 수순으로 체포된 무석호는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것 외엔 할 것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또 당연하게도 의미없는 발버둥이었다.
가지고 나온 것들에는 무석호에게 있어 너무나 치명적인 내용들이 가득했고 그것들을 어떻게든 커버쳐 줘야 할 'VIP 고객들'은 이미 절반 이상이 관현 게이트에 엮여 감빵에 처박힌지 오래였으니까.
이번에 추가로 나온 증거로 인해 미꾸라지처럼 당시 빠져나갔던 고객들 또한 굴비 엮이듯 줄줄이 엮여 들어올 예정이니 혹여 불똥이 튈까 그 누구도 무석호를 커버해 주지 않았다.
"무 대표님, 조금이라도 감형 받으려면 자백을 하셔야 한다니까요?"
도진의 입장에서 들었을 때 그것은 크게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무석호가 그동안 해온 게 한두 개여야 감형이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허나 이런 악당들이 으레 그렇듯 미련은 많아서 회유에 결국 입을 열었으니.
"브, 브로커가 접촉했습니다. 그 브로커를 찾아야 합니다. 저는 그냥 돈 달라고 해서 준 것밖에 없습니다."
"인상착의, 기억하시죠?"
"예."
"그려 주세요."
딴에 손재주가 있어 무석호는 제법 그럴싸한 몽타주를 그려냈다.
여기에 전문가들이 붙어 수정을 거쳐 정교한 몽타주가 완성됐고 수사 본부는 신속하게 브로커를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저, 저는 그냥 송금책이라 아는 게 없습니다."
벌벌 떨며 은신처에 처박혀 있던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렇게 진술했다.
…신뢰할 수 있을 만한 진술이었다.
척 봐도 조무래기.
무엇 하나 아는 게 없고 오히려 거기에 만족하며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받아먹는 말단 중의 말단이다.
조직 입장에서도 언제든 쓰다 버려도 아쉬울 게 없는 자.
그러니까 보통은 거기서 끊겨야 했을 단서를, 수사 본부는 기어코 잇는 데 성공했다.
거기에 공헌한 나지윤이 말했다.
"자금의 흐름을 추적하는 데 성공했어."
"정말?"
"어. 차명 계좌에 송금한 돈을 인출하는 장면이 CCTV에 찍혔거든. 그걸 추적한 거야."
"…조금 어설프네."
"맞아."
본래는 끊겼어야 할 단서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래도 석연찮다.
이미 앞서의 분석에서 느꼈던, 그 규모와 치밀함 사이사이에 드러나는 어떤 부정교합이자 어색한 어설픔이다.
"마치 현대 문명에 관해 잘 모르는 것처럼 느껴져."
"음……."
나지윤은 그 어설픔에 관해 그런 의견을 내놓았다.
"물론 그것까지 다 포함한 함정일 가능성이 더 높아."
정의검가의 통신을 막았던 장비를 운용했던 세력이다.
그런 세력이 현대 문명을 잘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긴 하다.
"여러모로 파악하기가 힘든 부분들이 많아. 그것을 방해하기 위한 요소들을 넣어놨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지도 모르지."
"그렇겠네."
단서가 사실은 '스스로 자른 꼬리'이자 추적을 방해하기 위한 미끼일 확률은 얼마든지 있다.
"어쨌든 중요한 건, 함정이라는 걸 알아도 그 함정을 밟아봐야 한다는 거겠지."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만 하는 상황이다.
미끼로 꾀어내는 것도, 덫으로 상처를 입히는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위험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위험하다고 해서 포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의검가는 실추된 명성을 회복해야 했고 남쪽 나라의 1왕자 또한 흔들린 입지를 다시 공고히 해야만 했다.
한국으로서도 자국민이 습격당한 사건을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어진 단서의 종착역이 이번에야말로 무언가를 건질 수 있을 듯한 거물이었다.
무석호가 브로커에게 건넨 1억. 그 1억은 여러 루트를 거쳐서.
남쪽 나라의 제 2왕자에게로 흘러들어 갔다.
지지부진하던 국면을 뒤흔들 수 있는 한 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