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휘오오오오-
짙은 안개가 마치 유형화된 바람처럼 정글 사이를 가득 채우며 흐른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안개로 가득한 정글은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공포스런 미로가 되어 있었다.
그 미로를, 정의검가의 구원 부대가 지금 무림인도 아닌 단 한 명의 학생에 의지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
한 명의 학생을 따라 길을 걷는 이 상황에 정의검가의 그 누구도 의문이나 불안을 표시하지 않았다.
표시하지 않을 만큼 앞장 서서 길을 걷는 학생, 아니 '무인(武人)'의 등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 걸음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기에.
뒤따르는 이가 마주하는 그 등 또한 일말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리하여 그 뒤를 걷는 이들 또한 단 한 점의 의심도 없이 뒤따르고 있었기에.
그들의 뒤에 선 정의검가의 무인들은 '이론'을 넘어선 어떤 아우라에 압도되어 걷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지금 가장 앞서 걸으며 그들을 인도하고 있는 한 명의 무인이, '지존(至尊)으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 * * *
-환영미로진(幻影迷路陳)이다.
정글을 뒤덮은 짙은 안개를 도진의 신안(神眼)을 통하여 본 장호는 그렇게 말했다.
-환영미로진이라면, 진법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진법(陣法).
무협에서 그것은 대자연의 기를 인위적으로 조율하여 여러가지 현상을 만들어내고 사람의 감각을 속이는 어떤 영역을 만들어내는 수법이자 학문이다.
무공과 함께 그와 관련한 자료들이 출토되고 연구되어 소소하나마 그것을 성공시킴으로써 진법 또한 현실에서 증명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소소한, 눈과 감각을 현혹하는 수준이었지 이렇게 드넓은 정글을 완전히 뒤덮고 길마저 잃게 하는 건 그야말로 '판타지의 영역'이었다.
장호는 지금, 그렇게 현실의 영역에 있지 않은 수준의 진법이 펼쳐져 있다고 말한 것이다.
지리적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였기에 따져보면 수준 자체는 그렇게까지 높지 않다.
이곳은 본래 안개가 자주 끼며 바다와 인접하여 해무 또한 자주 발생하는 곳이었으니까.
하물며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본래는 안개와 함께 안에 들어선 자를 현혹해야 할 '환영'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이 정도나 되는 규모의 진법을 발동했다는 것 자체가 믿기 힘든 일이었다.
-놈들은, 실전된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는 거군요.
-그래.
허나 도진은 놀라지 않았다.
세상 일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드러난 것보다 드러나지 않은 것이 더 많다.
도진이 천마신교의 진전을 이었듯, 독마전이 독마의 진전을 잇고 부활했듯 이렇게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지식과 기술을 가진 곳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진은 놀라는 대신 행동했다.
-너의 눈을 통하여 내가 길을 알려줄 수 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스승님.
스승을 통하여 도진은 환영미로진을 나아갔다.
신안을 그 어느 때보다 분명히 하고 감각 또한 최대한 날카롭게 벼렸다.
그리하여 '보는' 모든 것이 장호에게 전달되어 안개를 뚫고 올바른 길로 이어졌다.
그렇게 거침없이 나아가는 도진에게 유지은이 말했다.
"…저격 같은 거, 조심해야 해."
유지은으로서는 순수한 걱정이었지만 이성적으로, 전술적으로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지금 무리는 단 한 명, 오로지 도진에 의존해서 나아가고 있었다.
철저하게 도진을 지켜야만 하는데 나아가기 위해선 도진이 선두에 서야 했으니 이렇게 위험할 수가 없다.
도진은 유지은의 걱정에 미소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선배. 총으로는 나를 어쩌지 못하니까."
"……!!"
그 말은 보이지 않지만 커다란 파동이 되어 번졌다.
일정 경지를 넘어선 무인은 총을 '보고' 반응하여 피할 수 있다.
정확히는 총을 쏘는 사람을 보고 피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총을 쏘는 걸 '볼 수 없다면' 총을 피할 수 없다.
소리가 들리는 순간엔 이미 피격당한 뒤다.
저격에 무림인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이유다.
허나 그것도 또한, 그 일정 경지를 넘어 더더욱 높은 경지에 도달하면 극복할 수 있으니 기운을 외부로 퍼뜨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른 무인이 그렇다.
기운에 감각을 실어 넓힘으로써 그물처럼 펼쳐진 감각에 총알이 걸렸을 때, 찰나의 순간과 거리가 주어지니 그 찰나에 총알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도진은 자신이 그 경지에 이르렀다고 선언한 것이다.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현대 무림의 그 어떤 천재도 저 나이에 그 경지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도진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또 핏자국이네요. 서둘러야겠어요."
모두를 이끌고 나아가는 도진에게 어린 기세가, 그것을 느끼는 모두에게 진실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오오오오오…….
미증유의, 그 끝을 짐작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기세가 도진의 안에서 맥동하고 있었다.
* * * *
"……."
절망적이다.
유공환은 그런 생각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
무겁다.
무거운 침묵이 겹겹이 쌓이고 쌓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쌓이는 침묵의 무게는 더해져 숨조차 쉬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이제는, 안다.
이것은 길을 못 찾는 것이 아니다.
무림인이 방향을 잘못 잡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것은 '길을 못 찾도록 만드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진법 같은.
터벅. 터벅.
발걸음의 수가 많이 줄었다.
걷는 사람의 수가 줄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사람이 죽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죽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부상당한 사람이 많았고 걸을 수조차 없게 되어 누군가가 업었기 때문에 걷는 사람의 수가 줄은 것이다.
…그것이 절망적이었다.
습격자들에 대비하고 사람들을 지켜야 하는 정의검가는 부상자를 업을 수 없었다.
때문에 진형 안의 일반인 중 다치지 않은 사람이 부상자를 업어야 했다.
…그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부상자를 업고 걷는 그들은 극도의 긴장과 공포에 의한 스트레스로 인해 피폐해졌고, 정의검가를 원망했다.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늘어난 부상자의 수는 곧, 정의검가의 경호 실패를 뜻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
정의검가는 경호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지 못했고 현재진행형으로 실패하고 있었다.
습격자들은 철저하게 일반인만을 노렸다.
정의검가의 무인들이 제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제몸을 돌보지 않고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러도 그들은 기어코 그 검을 피해 일반인을 하나둘, 부상을 입히고 독에 중독시켰다.
그것이 처절할 정도로 정의검가의 자존심을 부쉈고 이내 핏발이 설 정도로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터벅. 터벅.
그리하여 마치 수많은 얇디얇은, 그래서 너무나 날카로운 칼날이 겹겹이 쌓여 무게를 더한 것만 같은 침묵이 내려앉은 가운데 부상자 중 한 명이 말했다.
"버리고 가요."
그것은, 안티체리의 리더인 설현주의 등에 업힌 손정혁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관통당한 어깨가 검은 피로 물들어 있는 손정혁의 그 말에, 겹겹이 쌓여 있던 칼날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쏟아내릴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괜히 나 업고 가느라 힘 빼지 말고, 버리고 빨리 가라고요."
"……."
마치 도화선에 불이 붙은 것만 같다.
불이 붙은 심지는 너무 짧아서, 그대로 폭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누군가 한 명.
한 명이라도 소리치는 순간 그것은 정말로 폭발해 버려서, 되돌릴 수 없게 될 것이었다.
바로 그때, 나긋한 목소리가 답했다.
"안 돼."
목소리는 손정혁을 업고 있던 설현주의 것이었다.
설현주는 땀이 송글송글 맺힌 얼굴에, 그럼에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안 되는데. 누나도 괜히 나 업고 가느라 한계잖아. 버리고 가라고."
"으응, 안 돼."
"왜!"
"너는 내, 안티체리의 은인이거든. 으음, 생명의? 아니, 아이돌 생명의 은인이라고 해야 할까?"
웃으며, 설현주는 말을 이었다.
"열네 살 남학생 한 명이 우리 팬사인회에 와 줬었지."
기억에 남는 남학생이었다.
잘생긴 남자애가 무복을 입고 와서는 그토록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니,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눈을 안티체리는, 설현주는 몇 번이고 마주칠 수 있었다.
음악 방송을 하러 가던 길, 혹은 콘서트, 심지어 외국에서도 가끔씩.
남학생은 안티체리의 열혈팬이었다.
그러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사건사고로 인해 안티체리가 더 이상 방송에 나오지 못하고 행사 무대만 전전할 때.
그러다 무어라도 하지 않으면 못 견디겠어서 인터넷 방송 채널을 만들고 그것을 진행할 때.
"JH. 정혁이 너였지."
JH란 아이디의 시청자가 그녀들에게 화를 내는 것을.
-JH님이 1,000원 후원!
아니 뭔 방송이 말을 이런 식으로 해? 고운 말 못 씀?
-JH님이 1,000원 후원!
맥아리없이 그러지 말고 좀 텐션 높여서 진행 못함?
아니, 화도 아니었다.
그것은 격려였으며 응원이었다.
나는 당신들을 동경해서 그 세계에 발을 디디기까지 했는데, 정작 당신들은 지금 뭐하고 있는 거냐고.
"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던 때도 있었어. 그러면 우리끼리는 그랬단 말야."
"이제 정말 우릴 봐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나 봐. 늦은 밤에 켜서 그런 거 아닐까? 낮에 한 번 켜보자. 그런데 낮에 켜도 사람 없는 건 똑같구나……."
"그런데 너만 오면, 누군가 우리 노래를 들어 주고, 말도 들어 주고, 누군가 함께 있다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단 말야."
"그리고 너, 항상 후원으로만 말했잖아. 그 돈 정산받아서 우리, 라면 말고 밥도 먹었다? 쌀도 사구, 계란도 사구, 참기름도 사구……."
"그때 말야, 너가 우리 방송에 있어줘서 우리가 계속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넌, 우리 아이돌 생명의 은인이란 말야. 그러니까, 나는 너 버리고는 못 가."
"걱정 안해도 돼. 도진이 덕분에 나 제법 체력이 붙었단 말야? 사실 나 너보다 체력 좋을지도 모른다?"
"……."
나긋하게, 나긋하게 이어지는 그 말은 날카롭게 쏟아지려던 칼날을 거짓말처럼 무디게 만들었다.
"야, 우리 안티체리거든? 너 하나 정도 업고 가는 거 일도 아니니까 얌전히 업혀 가라?"
괜히 쎈 척 주교은이 한 마디를 거든다.
짓누르던 무게마저도, 조금은 가벼워진 것만 같았다.
터벅.
발걸음이 멈추었다.
한계에 달해 쉬기 위해 멈춘 것이다.
그리고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스스슥.
그들을 습격하던 검은 복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껏 가하던 기습과는 다르게,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내 그들을 포위했다.
피를 말리던 기습을 그만두고 이제 그만 끝내겠다고 선언하듯.
그들에 맞서 정의검가의 무인들도 일반인들을 가운데 두고 방진을 형성했다.
꾸욱-!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조금은 줄어들었기 때문일까.
유공환은 검을 쥔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
"……."
서로 간에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그런 것이 필요치 않은 사이였고 상황이었다.
습격자들은 죽이려 할 것이고 정의검가는 지킬 것이다.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유공환은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할 뿐이다.
구원은 늦을 것이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숨이 다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지금 할 필요가 없는 걱정이다.
그가 예뻐하던 정의검가 역대 최고의 천재인 조카가 말했었다.
-도진이가 그러던데, 걱정을 대출받아서 하지 말래요.
피식-
웃음이 나왔고 그것이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를 날려 주었다.
그래, 지금 해야 할 건 걱정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 하는 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