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362화 (362/741)

361화

'무협(武俠)'의 오리지널은 중국이다.

세계가 인정하는 부분이었고 중국은 특히나 여기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래서인지 중국에서는 유독 무협의 색채가 강하다고 여기저기서 도진은 듣고 보았다.

일례로 도진의 동기인, 고등반에 진학하기도 전부터 가장 주목받는 후기지수로 이름이 알려졌던 소림 속가 제자 유룡 우정한이 그러했다.

그 말투와 행동은 현대인이면서도 무협 소설 속 '소림'을 연상케 했으니 그것이 소림사의 이름을 이은 현대 소림의 규율인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예법을 중시하는 동양 특유의 그것이 중국에서는 무협의 발원지로서의 자부심까지 더해져 중국 무림은 현대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무협으로서의 색채가 더 강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중국에서 자란 위연서도 그런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도진은 생각했다.

하물며 천마신교 아닌가.

종교로서의 성격까지 더해지면 위연서의 모습도 오히려 당연하게 여겨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머리로는 그런 생각을 한 도진은, 그러나 눈앞에 부복한 천마신교 독마전의 이름을 이은 교도들의 모습에, 가슴이 격동했다.

이론은 결국 이론이다.

사람은 결국 감정에 더 이끌릴 수밖에 없고 거실에 부복한 교도들의 감정이 도진의 감정 또한 뒤흔든 것이었다.

-천마신교의 지존이란, 교주란 가장 앞서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길을 걸으며 횃불을 높이 들어 뒤따르는 추종자들에게 올바른 길을 비추어 주는 존재인 것이다.

위지혁은 언젠가 도진에게 그런 말을 해 주었다.

눈앞에 부복한 이들을 통하여 전해지는 감정이 도진에게 그 말의 참뜻을 깨닫게 했다.

그렇구나. 이것이 '지존'이 가지는 의미이구나.

새로운 삶을 살며 도진을 추종하고 절대적으로 믿어주는 인연은 몇이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믿음과 추종은 처음이었고 비로소 도진은 약간은 막연했던 천마신교의 교주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체감한 것이었다.

체감했기에, 거기에 맞춰 행동할 수 있었다.

도진이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일어나세요."

"예, 소지존."

가장 앞서 부복해 있던 여성이 대표로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고개는 숙이고 있는 그녀는 30대 중반 즈음으로 보였으나 느껴지는 기세가 외모에 비해 훨씬 깊었으니 무공의 고수임을 짐작케 했다.

"소지존을 배알하여 그 기쁨을 이루 헤아릴 수 없나이다. 소녀는 당대 독마전 전주의 이름을 이은 위취련이라 합니다."

발음마저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그녀는 중국인이었다.

중국인임에도 흠잡을 데 없는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건 그녀가 무림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인사에 도진이 미소지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반갑습니다. 위취련 전주."

인사를 받은 도진이 일어선 독마전 교도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해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 * * *

도진은 전주 위취련을 필두로 하여 한 명 한 명 오십두 명의 모든 교도와 눈을 맞추고 인사했다.

위연서의 말대로 그들의 눈에는 한 점의 의심조차 가질 수 없을 만큼 순수한 교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했으며 그 믿음은 고스란히 천마의 후계자인 도진에 대한 추종으로 이어졌다.

오늘이 첫 만남임에도.

그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믿음 하나하나가 도진이 조금 더 천마신교의 소천마임을 천명하는 일에 대한 무게로 더해졌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전주 위취련, 소전주 위연서와 셋이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음, 그럼 원래는 이곳에 새로 회사를 세우고 순수하게 연구를 할 계획이었군요."

"예, 소지존."

시작은 독마전의 이사에 관해서였다.

위연서에게 들었던 대로 독마전은 중국에서 한국으로 본거지를 옮겼는데 그에 관한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본거지를 옮기는 일이 하루아침에 결정되고 이루어질 순 없었으니 이미 중국이 '범죄와의 전쟁'을 천명하기 이전부터 정보망을 통해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미리 입수, 행동에 착수했다.

그 행동 중 하나가 한국어를 배우는 일이었으니 위취련을 포함한 독마전의 교도들이 한국인 수준으로 능숙하게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특허를 포함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지만 어차피 저희에겐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지원을 받아 유지되던 독마전의 회사는 그 때문에 연구 성과 다수가 국가에 귀속되어 있었으나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독마전에게 진짜 중요했던 것은 현대 과학에 힘입어 속도가 붙은 독공의 발전에 뒤쳐지지 않는 것이었으니까.

연구 성과인 특허들은 어디까지나 진짜 연구의 웃물이었으며 대외적인 간판을 유지하기 위한 일환이었기에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독공은 국가 차원에서 관리되는 것이니 처음부터 언제든 포기할 수도 있을 거라 계산하고 있었기에 깔끔하게 포기하고 한국으로 넘어갈 준비를 했다.

넘어가서, 자리를 잡을 동안 마찬가지로 독공 연구 회사를 차리고 순수하게 연구를 하며 몇 년 정도 조용히 지낼 계획이었다.

"그 계획에 따라 거간꾼들과 접촉하여 일을 진행하던 중에 소지존을 배알하게 되었으니 이렇게 기쁜 일은 더 없을 것입니다."

위취련은 감정을 가득 담아 미소지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같은 마음이에요."

그렇게 서론을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소녀는 소지존의 성취에 기쁨을 금할 수 없나이다."

위취련은 천마신교의 무맥 중 하나를 이은 '진짜'답게, 고수답게 사신의 가르침까지 더해 기세를 감추었음에도 도진의 경지를 유추해냈다.

그것이 오히려 기꺼운 도진이 답했다.

"스승님들의 안배 덕분이죠. 다만 스승님들께서는 위 전주를 만날 수 없는 곳에 계시니 안타깝네요."

"아……."

가능하다면 이들의 선조인 독마를 거두어 준 고금제일천마 위지혁을 만나게 해주고 싶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위지혁과 장호는 도진의 영혼에 깃들어 그 안에 침잠할 수 있는 도진만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를 위로하듯 도진이 말했다.

"저는 천마신교의 이름을 부활시키려 해요. 스승님께서는 내키는 대로 하라고 하셨거든요. 여러분들은……."

"기꺼이 소지존을 따르겠나이다."

위취련과 위연서는 동시에 부복하며 즉답했다.

도진은 그런 두 사람의 행동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미소지으며, 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한 식구로 잘 부탁해요, 위 전주. 그리고 위 소전주."

"예! 소지존!"

* * * *

당장 해야 할 이야기를 마친 도진은 차를 마시며 말했다.

"위 전주."

"예, 소지존."

"독마의 무공이 어떻게 전해져 내려왔는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도진의 궁금증에 기원한 것이었기에 이제서야 나온 이야기였다.

위취련은 도진의 말에 즉시 예, 대답하고선 고풍스런 표지의 두꺼운 책자 하나를 가져와 도진에게 공손히 내밀며 말했다.

"독마전의 역사를 기록한 책자입니다."

받아든 책의 묵직한 무게감은 마치 도진이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비밀의 무게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마워요."

인사를 하고 책을 펼쳤다.

책은 한국어가 아닌 중국어, 그것도 번체자와 간체자로 쓰여 있었으나 도진은 막힘없이 읽을 수 있었다.

이 시대에 중국어와 한자는 필수였고 영혼이 트인 도진은 당연하게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중국어와 한자에 숙달되어 있었으니까.

허나, 그것은 반길 수 없는 일이었다.

위지혁이 말했다.

-흐음. 우리가 쓰던 문자는 아니로구나.

-…예.

깊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데, 위지혁과 장호는 한자나 중국어를 쓰지 않았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 특정조차 못하고 있던 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이 비교적 가까운 역사에 포함되는 한자나 중국어를 쓸 리는 없는 것이다.

'무협의 오리지널'은 중국이라지만 '현대 무림의 근원'이 중국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근거이기도 하다.

실제로 처음 출토되었던 고대 무림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들 또한 중국어로 쓰여 있지 않았다.

뒤에 해석이 되고서야 무림의 것이라는 게 알려졌고 난리가 났지.

지금 위지혁, 그리고 장호가 의사소통에 막힘이 없는 건 도진에게 깃들어 있는 동안 한국어를 완벽하게 익혔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도진과 위지혁, 그리고 장호는 지금 받아든 책에서 혹시 그 '옛 언어'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드디어 보게 된 독마전의 역사를 기록한 책자는 초기엔 번체자로 쓰였으며 점점 간체자로 쓰였다.

이 무공은 천마신교의 독마 하연화에서 연원하였다는 말과 함께 천마신교의 교리를 함께 기록했다.

그 뒤로 당대 독마의 이름을 잇는 전수자들에 의해 역사가 기록된 것이 지금 도진이 받아든 두꺼운 책자였다.

전수자는 여성이어야 하며 고아 중 자질과 심성이 맞는 아이를 정하여 성과 이름을 주고 무공과 교리를 전수토록 했다.

그러니까 스승은 스승이면서 동시에 어머니였고 제자는 제자이면서 동시에 딸이었다.

사적인 부분은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았고 후일 교주가, 지존이 나타나면 받들어 모셔야 한다는 다짐 정도가 전부였다.

여기에 독마전을 일으킨 내용이 상세한 편으로 책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이런 연유로 오랜 역사였음에도 책 한 권에 모두 기록될 수 있었다.

도진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고대 무림에서 어찌 현대까지 독마 하연화의 이름과 무공, 그리고 교리가 망실되지 않고 전해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음…….'

도진은 실망스런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위취련은 과연 충성스런 교도이자 고수답게 도진이 바라던 것을 얻지 못하였음을 읽어내고선 말했다.

"기대에 부응해 드리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소지존."

"아뇨, 아니에요. 위 전주가 송구할 일은 아니잖아요, 이게."

"제 스승이 혼란의 시기에 화를 입어 미처 전수하지 못한 게 있을 거라 소녀는 추측하고 있나이다."

"…그랬군요."

무공과 역사, 교리까지도 전수되고 있어서 생각지 못했다.

위취련의 말에 도진은 이 자리에 그녀의 어머니이자 스승, 전대 독마전의 전주가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혼란의 시기, 그러니까 유독 심했던 중국의 무림 르네상스 시대에 불행히도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그리고 위취련은 도진도 책자를 통해 느꼈던, 독마 하연화에게서 이어져 내려왔다면 전해졌어야 할 책자 이외의 내력이 유실되었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비전(秘傳)은 일반적으로 문서 등이 아닌 입을 통하여, 그러니까 구전(口傳)되는 법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책자가 아닌 전승자의 머릿속에 남아있을 확률이 높으니 일리가 있다.

무림인은 일반인보다 당연히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인은 무림인이기에 주어진 수명을 다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위취련의 어머니이자 스승은 그에 대한 대비를 다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렇게 추측할 수 있었으나 역시 석연치 않다.

다른 인물도 아니고 독마전의 전주가 아니었던가.

그 정도 대비도 하지 않고 갑자기 요절했을 거라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어쩌면 밝혀지지 않은 거대한 진실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거기로 가기 위한 다리가 도착하기 전에 치워져 버린 것 같다.

의문은 커졌지만 이내 도진은 아쉬움을 털어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궁금하긴 했지만 간절히, 기필코 알아야만 할 것은 아니었다.

위취련을 책망할 수는 없는 일이고 맹목적으로 매달려야 할 일도 아니다.

그러니까 도진은 속에 남은 아쉬움까지 숨에 담아 뱉어내고선 웃었다.

"그럼, 앞으로의 이야기를 나눠 보죠."

* * * *

며칠 뒤.

잠룡문에 관한 뉴스가 포털 사이트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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