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도저히 밝혀지지 않던, 누구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던 용의자가 사실은 중도에 탈락했던 피해자였다는 내용의 이야기는 이제 클리셰라 해도 될 만큼 여기저기서 쓰였던 트릭이었다.
하지만 그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기에, 그것은 뻔함이 아닌 상상치 못했던 충격이 되었다.
위연서가 보여준 것들이 있었기에 수사의 방향이 용의선상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던 남욱현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도저히 보이지 않던 사건의 전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치되어 있던 믹스 커피를 선물했던 게 남욱현이었습니다."
독이 혼합돼 있던 믹스 커피를 구매하여 선물한 게 남욱현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커피를 구매했던 곳을 찾아간 조사팀은 거기서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냈다.
"남욱현 정도 되는 학생이 왜 구멍 가게를 가?"
남욱현은 대형 마트나 인터넷도 아니고 동네의 작은 슈퍼에서 선물용 믹스 커피를 샀다.
집으로 가는 동선상에 있었으니 억지로 의심을 할 부분이 아니긴 했다.
남욱현 정도 되는 인물이 가격 등을 따져서 물건을 살 건 아니었고 믹스 커피를 굳이 백화점 가서 살 필요도 없으니 마침 보이는 곳에 있는 걸 구매했을 수는 있으니까.
하지만 거기서 시작된 조사가 남욱현을 범인으로 확정할 수 있는 첫 걸음을 떼게 만들었다.
"…어, 이거 저희가 주문한 게 아닌 거 같은데요."
슈퍼 주인의 진술이었다.
그는 해당 믹스 커피 박스를 유심히 보더니 그런 진술을 했고 그 증거로 유통기한을 보여 주었다.
"보세요. 이게 사실 잘 나가는 건 아니잖아요. 요새 슈퍼까지 와서 이거 사가는 사람도 잘 없어서 더 그렇고. 저희도 사실 이거 6개월 전에나 주문한 거란 말예요. 근데 봐요. 얘는 유통기한이 다른 것들이랑 4개월 넘게 차이나잖아. 박스떼기로 주문했으니까 어느 정도 균일해야 하는데 이것만 다르지."
"…그, 그렇네요?"
명백하게 이상했다.
여기에 남욱현의 동선 곳곳에서 위연서의 말대로 '청소'를 한, 혼합독에 사용된 다른 독의 흔적이 발견됐다.
"남사현의 경우엔 남욱현이랑 수업도 같이 들었고 그 과정에서 이래저래 독이 얼마든지 묻었을 수 있잖아."
"예."
남욱현과 어울렸던 학생들의 진술도 있었다.
"그, 걔가 곧 내가 엄청난 무공을 배우게 될 거라고 자랑을 했거든요. 아뇨, 그 철중권은 아니죠. 솔직히 그거 가지고 유세 떨 급은 아니잖아요? 네."
"아니 수업은 철중권을 들으면서 그런 소리를 하길래 뭔가 집안에서 인정을 받아서 비기라도 전수 받나 싶었죠, 우리는."
알리바이가 명확하지 않았고 그 비어 있는 사이사이에 독살을 차근차근 준비했음을 알려주는 증거들이 용의자에 놓고 보니 명확하게 보였다.
그리하여, 수사가 진척될수록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나지 않았던 범인이 사실은 '죽은 피해자'였음이 밝혀진 것이었다.
-충격적인 반전. 미궁에 빠질 뻔 했던 사건의 범인은 피해자였다!
수사 본부의 공식적인 브리핑 이후 또 한 번 기사가 도배되며 한국이 술렁였다.
웬만하면 실명을 숨겼겠지만 너무 큰 사건에 범인의 신분도 평범하지 않아서 남욱현의 이름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호협남가는 공식적인 성명을 내야 했다.
"호협남가의 무인을 이용하여 살인 사건을 일으킨 그들을 반드시 찾아내어 그 죄를 묻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남욱현 또한 피해자의 입장에 두려 했다.
사실 완전히 부정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왜'라는 의문에는 여전히 답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꿀리는 건 없는 배경에 재능까지 가지고 태어난 남욱현이 왜, 무엇 때문에 양원치를 죽이려 했는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어떤 인물이나 세력에게 남욱현이 위험을 무릅쓰고 양원치를 죽일 만큼의 '좋은 무공'을 약속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도대체 언제, 어떻게, 얼마나 접촉을 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흔적이나 단서가 남지 않았고 그걸 어떻게 믿게 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독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주고받은 것이 발견되지 않았고 남욱현은 양원치와 같은 자리에서 죽었다.
위연서의 진술대로라면 '무형독'이라 불리는 그들은 차도살인으로 목표를 독살하고 그렇게 조종한 이 또한 토사구팽하는 수법을 쓴다고 했다.
그들의 범행이라면, 남욱현은 살인범이지만 동시에 살해당한 피해자이기도 했다.
더더욱 의문인 것은 이 정도의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조직에게 도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양원치 같은 '피라미'의 살인 청부를 넣었는가이다.
사건은 완전히 마무리되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그들 무형독을 찾기 위한 수사 본부가 새로 구성된 가운데 숭무고의 보안이 숨막힐 정도로 강화되었다.
일례로 일전 도진이 조중림의 건의에 개선해 주었던 택배 관련 시스템이 원상복구를 넘어 더욱 철저하게, 몇 단계의 확인을 거쳐 본인이 수령해야만 할 정도였다.
많은 부분의 불편을 감수해야 했지만 이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며 항의하는 학생은 나오지 않았다.
사건이 사건이었기에, 피부로 느꼈던 살인 사건이었기에 이런 조치가 과하지 않음을 조중림마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건의 여파가 여전히 숭무고에서 지워지지 않은 가운데, 도진은 위연서와 마주한 자리에서 말했다.
"괜찮겠어? 이번 일 때문에 무형독이 널 노릴지도 모르는데."
위연서는 도진의 말에 기뻐하여 웃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지존의 걱정에 소녀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허나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지존께서 내려주신 '독마'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소녀 정진하고 있나이다. 그들이 독을 다루는 집단인 이상, 감히 소녀를 독으로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
확신에 가득 차 있는 위연서였다.
그것은 자신의 명예나 안위가 아닌, 지존이 내려 준 '독마'의 이름을 결코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의무이자 자긍심의 발로였다.
그래서 도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래, 믿을게."
"예! 소지존."
따져보면 '공익 신고'를 한 위연서였기에 이 부분에 대해선 철저하게 비밀을 보장하기로 했었다.
물론 그걸 신뢰할 수는 없으니 앞으로 도진의 휘하에 들어올 위연서에 대한 위협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제 그것에 일일이 떨 만큼 도진이 쌓아온 시간이 허술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속해 있는 독마전은 더더욱 그렇고.
위연서와의 대화를 끝내고 집행부로 돌아오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남사현을 볼 수 있었다.
"사현아."
"어서 와."
분위기는 조심스러웠다.
용의자로 몰리지는 않았다지만 조사를 받아야 했던 데다 집안에 그런 일이 있어 호협남가의 분위기가 흉흉했기 때문이다.
허나 남사현은 웃으며 안녕하세요, 하고 평소와 같은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해 보였다.
그런 남사현에게 약리지가 검은 봉지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다가갔다.
"야, 이거 먹어."
"어?"
약리지가 검은 봉지에서 꺼낸 건, 갓 만든 듯 먹음직스러운 두부였다.
"원래 이런 일 있으면 두부 먹는 거래. 먹어."
"아, 그래. 고마워."
남사현은 잠시 주춤했으나 약리지의 말에 웃으며 기꺼이 두부를 받아 먹었다.
"그, 후배님. 사현이가 감옥갔다 나온 것도 아닌데 두부라니."
오대용의 말에 약리지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하는 게 액땜도 되고 좋은 거래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해서 나쁠 건 없죠."
"아, 그래."
오대용은 더 태클을 걸지 않고 주정아에게 '의사나 변호사 같은 사람들이 이런 거 더 믿는다더니'라고 속삭였다.
그 말에는 주정아가 아니라 벽태웅이 공감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운 후배 덕분에 우중충하던 분위기가 조금은 환기되었다.
그리고 도진은 남사현과 단둘이 만났다.
"고생했어, 후배."
"아닙니다, 선배."
도진의 입장에서는 이제 한울타리에 들어온 위연서의 진술을 생각해 만난 것이었다.
따져보면 걸릴 게 없지만, 그래도 집행부 후배인 남사현에게 무언가 한 마디는 하고 싶어서 마주친 김에 음료수나 하나 사 주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남사현에게서는 그늘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덮어놓고 천하태평인 게 아니라 모든 걸 알고, 고민하면서도 밝은 얼굴을 남사현은 할 수 있는 사람이었음을 알게 됐다.
-…하늘이 선택했다면, 영웅이 될 아이로구나.
-예.
위지혁의 말에 도진은 깊이 공감했다.
남사현 같은 사람이 난세에 영웅이 되는 법이다.
다만 그것은 수많은 천운과 인연이 따라야만 하니 그야말로 '하늘의 선택'이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소설로 따지자면 '착한 주인공'의 역할을 맡은 인물이라고 해야 할까.
다만 천마신교는 그런 하늘을 믿지 않으니 또 얄궂다.
역시, 계기가 없으면 친해지기 힘든 후배라고 생각하며 도진은 손을 내밀었다.
"들어갈까, 후배."
"예, 선배."
처억.
도진이 내민 손을 남사현이 잡고 일어난다.
조금은 어색한 도움.
아직은 가까워지지 못했기에 생기는 어색함을 느끼며 도진은 남사현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 * * *
사아아-
일본의 모처.
슬슬 쌀쌀해져 가는 가을의 숲을 신풍회의 회주는 편안한 얼굴로 느끼고 있었다.
겨울에도 녹음이 우거지던 숲은 가을의 영향 또한 받지 않은 듯 그대로였다.
그런 녹음을 향해 회주가 말했다.
"한국의 수준도 마냥 낮지만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무도 없는, 숲을 향해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 말에 대한 대답이 돌아왔다.
"예. 버림패를 눈치챌 만큼의 인물이 있었던 건 제법 의외였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숭무고에서 있었던 독살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수법이 들킨 것에 관한 미미한 놀라움.
그러나 거기에 언짢음이나 초조함 등 부정적인 감정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 그 수법을 밝혀낸 대상을 신경쓰는 기색조차 없다.
"허허. 당분간은 제법 가시가 돋아 있겠군요."
"예. 하지만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워봐야 무서울 게 있겠습니까."
"껄껄. 그렇지요."
그들에게 있어 버림패가 들킨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이 '왜' 그런 일을 벌였는가에 대해서조차 알지 못할 테니까.
"오히려 이 기회에 신입들의 훈련 강도를 높이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들의 목적이 독살이 아닌 어디까지나 잠입과 은신의 '수련'이었다고는, 결코 짐작하지 못할 테니까.
회주의 말에 목소리의 근원조차 찾을 수 없는 이가 답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마침 또 괜찮은 의뢰가 들어왔기에 그쪽에 아이들을 투입해 보려 합니다."
"호오, 그렇습니까."
"예. 한국이 또 한 번, 아주 떠들썩해질 것입니다."
* * * *
독살 사건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때에, 학생들에게는 늘어난 불편이 그것을 되새기게 하는 때에 도진은 위연서와 함께 하게 되었다.
"소지존."
"응."
"독마전이 소지존을 배알할 준비가 되었나이다."
"…그래."
위연서에게 들었던, 독마전의 '이사'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 그들 모두가 한국에 넘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염두에 두고 있던 일이었기에, 들어야 할 것도 있었기에 도진은 미룰 것 없이 바로 위연서와 함께 그들을 만나기 위해 움직였고 어느 호텔의 별관 앞에 섰다.
"여기 머물고 있는 거야?"
집이나 사무실도 아니고 호텔의 별관에 머물고 있는 것에 관해 물으니 위연서가 예, 하고 답했다.
"소지존을 뵙고 거처를 정하기 위해 임시로 머물고 있나이다."
"그랬구나."
고개를 끄덕인 도진이 위연서의 안내에 따라 별관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넓은 홀의 문을 여는 순간.
"독마전이 소지존을 뵙습니다!"
현대에 존재하는 천마신교 독마전 교도들의 인사를 마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