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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해서 지존까지-357화 (357/741)
  • 356화

    쿵!

    그것은 발을 내딛는 것이 아닌 뒷꿈치만을 들어 내리침으로써 힘을 발생시키는 '작은 진각'이었다.

    그 진각을 통하여 발생한 힘은 자연스럽게 틀어지는 허리를 통하여 증폭되고 이어서 팔까지 전달되어 격발하듯 주먹이 나아가게 만든다.

    뒷꿈치를 내리치는 것부터 시작하여 허리, 손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한 수는 유기적이었으며 시작과 동시에 결과가 발생하는 것처럼 찰나에 이루어진 빛살같은 촌경(寸勁)이었다.

    '1인치 펀치'에 내공이 실리는 개념인 촌경의 경력은 그야말로 지근거리에서 격발된 총알처럼 위연서를 덮쳤고 폭음과 함께 튕겨나간 위연서의 경력에 갈기갈기 찢긴 블라우스 옷조각이 분출된 혼합독과 함께 휘날렸다.

    독공 사용자의 연구실에 들어가는 건 용의 보물고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아마도 서양에서 유래했을 그 말은 독공 사용자의 연구실에 관한 위험성을 잘 나타내는 말이었다.

    독공을 연구하고 구사하는 이들에게 있어, 특히 그것이 무림인이기보다 연구자에 가까운 인물이라면 연구실은 목숨 이상으로 중요한 평생의 보물이 보관된 곳이다.

    허락없이 들어가는 건 결코 용납될 수 없었으며 만약 그것이 침입자라면 전력을 다해 배제하려 들 것이다.

    용이 아끼는 보물고에 침입한 인간에게 거리낌없이 불을 토해내듯.

    위연서가 이곳에 배정받은 연구실은 그녀의 '진짜 연구실'은 아니겠지만 그렇다 해도 거기에 침입하는 건 분명히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를 만큼 위험할 것이 명백했다.

    판타지스럽게 말하자면 '마법사의 공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당연히 도진은 대비를 했다. 이중삼중으로.

    그리고 이곳에 단독으로 들어오기 위해 준비한 것은 도진의 인생을 바꿔준 천마신공이다.

    도진은 이미 특훈을 통하여 배웠다.

    독에 대비하는 법을.

    심상세계에서 하연화의 독에 대항하기 위한 방법을 찾던 중 깨달았다.

    그토록 흉포한 천마기이기에 천마기는 내부에 '이물질'이 존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수련자의 역량만 받쳐준다면 천마기로 내부를 가득 채움으로써 그 독이 어떤 것이든 제거할 수 있다.

    전설로 내려오는 만독불침(萬毒不侵)이나 지고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편의상 만독불침보단 부족하기에 이름붙은 천독불침(千毒不侵)까지는 아니어도 신공(神功)으로서의 공능을 가진 천마심공을 수련하기에 그에 준하는 독에 대한 내성과 대비가 도진은 가능했던 것이다.

    여기에 장호의 가르침으로 알게 된 지식과 신안까지 더하여 도진은 안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호흡을 통하여 흡수되는 독이 공기 중에 포함되어 있다는 걸 눈치챘다.

    -혼합독이로군. 저 안에 들어가서 호흡하는 순간 효과를 발휘하는 독일 것이다.

    도진의 신안을 통해 알게 된 것을 장호가 알려주기까지 했기에 그 순간부터 대비를 했다.

    오기 전부터 여러가지 계획을 세워두었고 변수에 맞춰 대응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 갈래를 두었다.

    위험한 독이라면, 대비가 힘든 독이라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다행히 독은 수면 마취와 비슷한 효과를 발휘하는 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놀랍게도 심상세계에서 겪었던 독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도진은 일부러 당한 척을 했다.

    아니, 실제로 당했으니 척도 아닌 진짜로 당한 것이었다.

    방심을 유도하고 다 됐다 생각한 위연서가 혹시라도 유의미한 정보를 흘릴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그러나 위연서는 섣불리, 어설프게 입을 열지 않았다.

    아쉽게도 그녀는 삼류 소설의 삼류 악당이 아니었던 것이다.

    때문에 도진은 상황에 맞춰 계획을 변경했다.

    대번에 천마기를 폭발시켜 독을 몰아냄과 동시에 경력을 실어 촌경을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 있던, 포옹하듯 도진에게 붙어 있던 위연서에게 때려박았다.

    죽일 생각은 당연히 없었기에 백설을 뽑지 않았고 주먹을 썼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빠른 일격이었다.

    터억.

    "……."

    …하지만 그것을 위연서는 피해냈다.

    소리없이 흩날리는 옷조각.

    그리하여 드러난 그녀의 새하얀 살결에는 촌경의 흔적이 존재하지 않았다.

    찰나에 찰나를 쪼갠 순간.

    도진의 촌경이 블라우스에 닿은 순간 위연서는 거기에 내공을 실어 반발력을 만듦으로써 틈을 만들고 충격에 저항하지 않은 채 몸을 날렸던 것이다.

    블라우스를 방패로 하며 틈을 만들고 대부분의 충격을 거기에 제한시키고 나머지는 흘려냈다.

    그것은 그녀가 단순한 독공 연구자가 아닌, 결코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도진의 촌경을 피할 수 있을 만큼 무공의 고수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허나 도진의 표정이 굳은 건 그저 그녀가 고수라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 아니었다.

    '…대비를 하고 있었어.'

    그래. 그녀는, 촌경을 피한 그녀는 분명히 대비를 하고 있었다.

    도진이 독에 완벽하게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진이 반격을 할 거라고' 예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방심을 하지 않았다는 수준이 아니다.

    도진이 분명히 반격을 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을 하고 있었기에 비로소 보일 수 있었던 기민한 반응이었고 그것은 단순히 방심을 하지 않은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조명 아래 서 있는 사람이 분명히 조명이 떨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회피하는 것과 상황이 닥친 순간 반응하는 건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다.

    하물며 그것이 무공임에야.

    종이 한 장만큼의 차이라 해도 그 종이 한 장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경계가 될 수 있었고 신안을 가진 도진이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미궁에 빠진다.

    '그런데 왜?'

    그녀는 도진에게 그토록 밀착하였을까.

    도진이 독에 걸렸지만 그것을 단번에 몰아낼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애초에 접근을 하질 말았어야 한다.

    혹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도 접근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건데, 적어도 도진은 그게 무엇인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그저 조롱하기 위해서? 혹은 실력에 자신이 있어서?

    '결국은.'

    도진은 복잡한 생각을 억누르고 기세를 일으켰다.

    오오오오오오-!

    풀어놓은 천마기가 일대를 몰아친다.

    지금 있는 단서만으로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답이 나올 수 있을 만큼의 단서를 더 모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그 단서가 될 만한 정보를 쥐고 있는 건 눈앞의 위연서다.

    독공을 익힌 고수를 단번에 제압하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고 그 고수가 생각 이상의 실력을 보여 주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

    하물며 도진은 독공 사용자에게는 천적이나 다름없는 상성 우위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속전속결로 위연서를 제압하자.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스윽-

    "……!"

    갑자기, 위연서가 몸을 숙였다.

    아니, 그걸 넘어 아예 무릎을 꿇고선 깊이 절을 해 버렸다.

    천하의 도진조차 덜컥 몸이 굳을 수밖에 없는 행동을 하며 위연서가 말했다.

    "소녀, 독마(毒魔) 하연화의 전인 위연서가 신교(神敎)의 소지존(小至尊)을 뵙나이다."

    "……."

    '…….'

    '……뭐?'

    * * * *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도진은 조금, 아주 잠깐 사고가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동안의 수련이 헛되지 않아서 곧 극한 상황이기에 더욱 정신이 차갑게 가라앉았고 침착할 수 있었다.

    "신교의 소지존……. 그건 당신이, 스스로의 무맥이 어디서 기원했는지 알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나이다, 소지존이시여."

    위연서는 여전히 깊이 절을 한 채 답했다.

    "그리고 내가 누군지도 알고 있고."

    "무상(無上)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증거를 그리도 명확하게 내비치시니 어찌 소녀가 몰라볼 수 있겠나이까."

    그 목소리에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소천마가 아닌 소지존이라…….

    위지혁 또한 심상세계에서 그렇게 읊조렸다.

    그녀가 입에 담은 칭호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소천마'는 천마심공의 5성에 도달한 제자에게만 허락되는 칭호다.

    위연서는 도진이 지금 5성의 벽을 넘지 못했음을 꿰뚫어 보고 굳이 '소지존'이라 칭한 것이었다.

    '독마 하연화의 전인'이라 스스로 말한 것을 포함하여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걸 유추할 수 있었다.

    "내가 천마신공의 전인이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 독을 사용했던 겁니까?"

    "불경하게도 그랬나이다. 소녀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할 분이기에 확신이 필요했나이다. 용서하소서……."

    "확신이 필요했다는 건 그 전에 어느 정도 눈치챈 게 있다는 거네요?"

    "예. 처음 뵈었을 때, 그때 소녀는 영혼을 관통하는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걸 느꼈나이다."

    "아, 예에."

    이 상황에서 말하기엔 뭐하지만, 아니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녀의 태도와 단어 사용이 꽤나 부담스럽다.

    그런 감상을 억누르고 도진은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도진은 위연서를 처음 본 순간 동요했다.

    그것이 비록 미미하고, '도진이기에' 크게 받아들여질 만큼 대단하지 않은 동요였지만 어쨌든 동요였으니 위연서가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동시에, 아직은 완벽하지 못한 도진의 신안은 그 동요 때문에 완벽하게 기능하지 못했고 위연서 또한 그 순간 무언가가 있었음을 잡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소녀는 그 순간 확신했나이다. 아아, 소녀가 그토록 믿고 있었던 지존께서 드디어 왕림하셨음을!"

    고개를 든 위연서의 얼굴은 격정적인 환희에 차 있었다.

    그것으로 가득찬 위연서의 눈동자가 도진을 마주한다.

    "…제 천마기를 그때 느꼈다구요?"

    그것은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도진은 천마기를 결코 흘리고 다니지 않는다.

    이 시기, 기감(氣感)이라는 것이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퇴보한 시기라 해도 칠칠맞게 기운을 흘리고 다닐 만큼 도진은 허투루 무공을 배우지 않았다.

    여기에 무려 사신 장호의 무흔잠영을 포함한 가르침이 더해졌다.

    비록 어느 정도 동요로 인해 기운이 흔들렸을 수는 있으나 그렇다 해도 위연서가 그것을 느꼈을 거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방금 보여준 경지를 감안해도 말이다.

    위연서는 활짝 웃었다.

    "소녀는 스승님께서 거두어 주시고 지존에 대해 말씀해 주신 그날부터, 지존을 알게 된 그날부터 매일 지존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했나이다. 지존에 관한 모든 것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으니 소녀가 어찌 지존의 증거를 몰라볼 수 있겠나이까."

    '어…….'

    가까워진다.

    "소녀는 지존에 관하여 전해 내려온 모든 것을 영혼에 새기고 있나이다. 그리고 소지존을 처음 뵈었던 그 순간부터 단 한 시도, 그 어떤 것도 잊지 않았나이다."

    분명히 무릎 꿇은 채, 절하고 있던 고개를 든 자세 그대로 말하고 있는데.

    "소지존께서는 분명히 제가 오늘 쓴 독을 알고 계셨습니다. 선조께서 처음 지존을 뵈었던 바로 그날 사용했던 독을 최대한 재현한 독입니다. 소지존께서 영광스럽게도 그것을 알아봐 주셨는데 어찌 제가 소지존의 천마기를 느끼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

    가깝다.

    분명히 몇 미터의 거리가 있었는데 공포 영화도 아니고 어느새 위연서는 도진의 바로 앞에 있었다. 그 자세 그대로.

    도진을 잡아먹을 것처럼 반짝이는 눈에 감정을 가득 담은 채.

    뭐야 이거 무서워.

    새로운 삶을 살게 되고서 처음으로 도진은 뒷걸음질을 칠 뻔 했다.

    그리고 문득 천마 위지혁이 입에 담고 말았던, 천마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그 단어가 떠오르고 만다.

    '…얀데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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