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354화 (354/741)

353화

도진의 말은 그야말로 정곡이었다.

약리지는 남을, 남욱현을 흉보려고 도진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정곡을 찔렸음에도 약리지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네!'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 선배 흉보려고 선배 찾아온 거예요."

당황이라는 건 무언가 켕기는 게 있을 때나 하는 것인데 약리지는 전혀 켕길 게 없었으니 그토록 당당했다.

"맘 같아선 정면에서 대놓고 까 버리고 싶은데, 그래도 사현이 사촌형이잖아요. 게다가 사현이 친구들한테 그러는 것도 좀 아닌 거 같아서. 그래서 선배 찾아온 거예요."

"그랬구나. 착하네, 우리 후배."

어리지만 생각의 폭이 좁지 않다.

제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소꿉친구의 사촌형이니까 참고 티내지 않는다.

더 나아가 약리지가 알고 지내는 '친구'들은 남사현의 그룹이니 그들에게 남욱현의 뒷담화를 하는 것도 안 될 일이다 싶어 굳이 도진을 찾아온 것이었다.

저번의 일로 마냥 참는 게 자신에게 답이 되지 않음을 알려준 도진을 말이다.

그래서 도진은 약리지의 맥줏잔에 자신의 콜라잔을 부딪쳐 건배까지 해 주며 속에 쌓인 것을 다다다 풀어내는 약리지의 불평에 웃으며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웃기지 않아요? 나도 선배 같은 무공 익혔으면 수석 먹었을 거다, 이러는데 얼마나 한심하던지……."

그리고 장단을 맞춰주며 한 가지 더 알게 된 건, 약리지는 노력파이며 동시에 타인의 노력을 폄하하는 걸 '극혐'한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모든 결과는, 그것이 설령 운이라도 노력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하다는 훌륭한 마인드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더더욱 노력을 하지 않고 타인의 노력을 폄하하기만 하는 남욱현은 약리지에게 있어 상극 중의 상극이었다.

사족으로, 그런 약리지의 성격은 도진의 취향이었다.

약리지는 맥주를 또 한 번 호쾌하게 들이켜고서 말을 이었다.

"푸후! 게다가 음흉하기까지 하다구요! 가끔 제가 어깨 드러나는 거 입으면 거기로 눈깔이 스으으으으으으윽! 움직인다니까요?! 치마 입으면 더 환장해요. 안 그런 척 시선을 스으으으으윽! 들이대는데! 그 선배 사실 저보다 약하거든요?! 그 선배만 모르지. 그래서 다 안단 말예요! 아으으으! 짜증나!"

"아하하. 진정해, 후배. 후배가 예쁜 게 죄지. 어쩌겠어."

"흥! 그런다고 제가 좋아할 거라 생각하시면 정답이에요!"

꽤나 텐션이 업 되어 있는 약리지는 맞장구를 쳐주는 것만으로도 급속도로 기분이 풀린 듯 장난도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남욱현을 까며 기분을 푼 약리지가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그래서! 그 마음에 안 드는 남욱현 선배 말인데요."

"응."

"더 마음에 안 드는 게, 그 남욱현 선배를 양원치 강사님이 더 마음에 들어한다는 거예요."

사람을 까는 자리임에도 '님'을 붙이는 게 약리지의 착한 인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약리지가 화가 났던 또 하나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헤에. 그러니까 양원치 강사가 남사현보다 남욱현을 더 좋아한다고?"

"네! 맞아요! 웃기지 않아요?"

"하하. 그렇네."

"누가 봐도 사현이가 더 잘났는데! 왜 남욱현을 더 좋아하는 거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하니까 또 열받는 듯 약리지가 귀엽게 씩씩거렸다.

"자자, 이거 먹고 일단 진정해."

그런 후배의 입에 닭가슴살 샐러드를 들이밀어주니 냠, 하고 받아먹는다.

그리하여 조금 진정한 약리지에게 도진이 웃으며 말했다.

"아마도 유유상종이라는 거겠지."

"유유상종이요?"

"그래. 보통의 경우라면 당연히 사현이를 더 좋아하겠지만, 양원치라는 인간은 보통의 경우가 아니니까."

"아……."

도진의 말에 약리지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렇네요?"

"그렇지. 그리고 실리를 따졌을 때도 그쪽이 더 나을 거야."

"실리."

"응."

남사현이란 인간은 하늘을 우러러 수많은 부끄럼이 있는 자들에게는 상극 그 자체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양원치가 남사현보다 남욱현을 더 가까이하는 건 사실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성격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리를 따졌을 때 더더욱 당연한 일이었으니.

"양원치 입장에서는 성실하게 수련하는 제자보다는 노력하지 않고 성격도 맞는 제자가 더욱 좋다는 거지."

양원치가 가진 패는 철중권이란 무공이다.

그 무공을 전수함으로써 스승 대접을 받으며 지낼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무공을 다 전수해 버리면 어찌되었든 가진 패를 소모해 버린 상황이 된다.

그러니까 가능하면 무공을 오래 전수할수록 좋다.

여기에 제자가 좀 '놀 줄 알아야' 자신과도 죽이 맞을 테고 함께 지내기가 더 편하기까지 하니 양원치 입장에서 남사현은 오히려 선택하기가 꺼려지는 학생이었다.

"…그렇네요."

약리지는 도진의 설명에 이제서야 확실히 알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천재인 그녀는 그러나 도진의 설명을 듣고서야 상황을 이해한 얼굴이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즐겨입는 새하얀 옷처럼 세상의 때가 거의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화 같은 환경에서 살다 현실을 보게 되었다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환경은 비교적 '동화' 같았고 그렇다 보니 이런 쪽의 때묻은 세상의 면모를 잘 모르는 것이다.

보고 있자면 그녀는 그렇게 동화 속 세상에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이렇게 서서히라도 세상을 더 알아가는 게 좋은 거라고 도진은 생각했다.

약리지는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샐러드를 씹고선 말했다.

"맘 같아서는 선배가 진짜 한 대 쥐어박아 주면 좋겠어요."

"누구를? 양원치를? 남욱현을?"

"둘 다요."

"하하. 기회가 되면 노력해 볼게."

장난처럼 대답했지만 상황이 된다면 정말로 그렇게 할 용의도 있는 도진이었다.

다만, 아마도 그럴 일은 없지 않을까 싶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통해 들은 것도 예상 외의 일일 만큼 도진은 양원치의 강의와는 접점이 없으니까.

여기에 남욱현이든 양원치든 도진과 마찰을 일으킬 리가 없으니 더더욱 '사건'이 일어날 여지가 없다.

그것은 개강 첫날 양원치의 태도만 봐도 명백했다.

그럴 여지가 보인다면 오히려 그들이 필사적으로 물러설 것이고 그런 태도의 상대로 명분을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자, 우리 귀여운 후배. 건배나 하자."

"치. 비겁하게 콜라 마시면서!"

"하하하. 건배!"

그러니까, 도진은 그저 후배가 기분을 풀 수 있도록 술자리에 좀 오래 어울려 주었다.

* * * *

"어서와요, 도진 학생. 소담 학생."

약리지와 어울렸던 금요일과 주말이 지나 다음주.

도진은 소담과 함께 독공 개론 강사의 연구실에 들어섰다.

그녀는 한창 때의 남학생을 헤롱거리게 만드는 외모와 분위기의 소유자였으나 동시에 친절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수업 태도가 좋고 열심히 하는 학생을 기꺼워하는 강사이기도 했다.

때문에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수업을 듣고 모르는 것을 거리낌없이 질문하던, 우등생 도진과 소담의 모르는 것이 있는데 시간을 좀 내줄 수 있겠냐는 말에 흔쾌히 자신의 연구실에서 이야기하자고 제안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함께 온 연구실은 생각보다 더 넓고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 차라리 가정집의 서재 같은 느낌이었다.

다만 그 공간의 한 켠에 대놓고 온갖 보안 장치로 도배된 두꺼운 문이 있어 그 너머가 '진짜 연구실'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뭐 마실래요? 독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구요."

예의 썰렁한 농담을 하는 그녀가 대접하는 차를 마시며 독공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맞아요. 소담 학생의 말대로 워낙 다양한 분류가 있다 보니 개중 자기한테 맞는 분류를 정해서 그 기준으로 구분하고 암기하는 게 유리해요. 이 부분은 발전 속도가 빠르고 고집쟁이들이 많다 보니 아직 합의가 안 되고 있죠."

"네, 사실 일부 용독술(用毒術)은 무공이라기보단 도구의 사용에 가깝죠. 그 차이에 대해서도 추후 배우게 될 테니 지금은 그런 게 있다는 것만 유의하셔도 좋아요."

"아무래도 아직 줄기가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았고 빠르게 발전하는 중이다 보니 이 시기에 배우는 여러분들은 조금 불리한 면이 있는 게 사실이에요."

목적과는 별개로 도진은 순수하게 독공에 관해서도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열심히 배우고 있었기에 학구열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렇게 목적했던 바를 완수하고서야, 슬그머니 때를 봐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진짜 대단하시네요, 강사님. 베이징고등무림학교 수료하시고 거기서 연구까지 하셨다더니……."

"어머, 감사해요. 맞는 이야기라 겸양 떨기도 조심스럽네요? 호호."

너스레를 떠는데 그게 오히려 호감이 가는 것이 대단한 부분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말대로이기도 했다.

독공은 그 자체로도 배타적이며 외부인에게는 도통 허락되지가 않는 무공이자 학문이다.

한데 그녀는 타국 출신으로서 중국 명문 대학의 독공 연구자로 활동했으니 그 대단함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래.

베이징 고등무림학교를 나온 그녀는,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한국인인 그녀의 이름이.

'위연서.'

위연서였다.

처음 이름을 보았을 때만 해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한국에서 위 씨는 아주 드문 성씨이긴 했으나 없는 성씨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첫 수업에서 그녀를 마주하고 그녀가 독마의 후예라는 걸 알게 되고서는 조금, 의미가 달라졌다.

-스승님, 위 씨라고 하면…….

-맞다. 형님의 성이지.

위지혁의 성씨는 '위지'가 아니라 '위'다.

그리고 도진이 확인한 결과 위연서의 성씨는 위지혁의 성씨와 한자까지도 동일했다.

그러니까 말인즉슨…….

-이건 그러니까 그거 아닙니까? 나는 지존이고! 넌 수하야! 하는 그거…….

도진의 말에 장호는 드물게도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역시.

도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독마 하연화는 위지혁을 세상 그 어떤 것보다 큰 의미로 여겼으며 최측근으로써 헌신했던 듯했다.

위지혁의 말대로 '얀데레'는 아니었어도 그 마음에 남녀 관계의 의미가 있었다면 결코 주군과 수하의 관계로는 끝나지 않았을 거라고 도진은 예측했었는데 그것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형님의 연애사가 제법 스펙타클했지.

그러면서 장호는 은근슬쩍 '공주…….', '정파의 그녀…….'라는 단어를 중얼거렸다.

몰랐는데 아무래도 장호 스승님은 남의 연애사를 말하는 걸 좋아하시나보다, 도진은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낭만적이네요.

도진은 흔히 말하는 '커플 지옥 솔로 천국'의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풋풋하게 연애하는, 혹은 연애하게 된 커플을 보면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성격이었다.

그러다 보니 처음 듣는 스승의 연애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었는데…….

위지혁은 아무래도 그게 부끄러웠던지 심기 불편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웃지마라, 녀석아. 그거 다 네 이야기다!

-예?

…뭐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이번에 한국에서 강의를 여신 건 숭무고에서 교수님이 되기 위해서인가요?"

도진은 은근슬쩍 많은 의도를 담은 질문을 자연스레 던져 보았다.

위연서는 웃으며 답했다.

"글쎄요……. 일단 더 이상 연구가 힘들 거 같긴 해서 한국에 자리를 잡아볼까 하는 생각이 있기는 해요."

"그러시구나."

연구자까지 되었으나 아무래도 배타적인 분위기를 다 극복하진 못한 듯하다.

그래서 한계를 느껴 한국에서의 자리를 찾는 듯하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감사했습니다, 강사님."

"네. 궁금한 게 있으시면 또 언제라도 연락주세요."

"감사합니다."

도진은 더 파고들지 않고 그날은 거기서 만남을 마무리지었다.

아직까지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그런 생각이었는데…….

"양원치가 살해당했어. 그것도 독으로."

"……뭐?"

충격적인 이야기를, 나지윤을 통해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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