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해서 지존까지-353화 (353/741)

352화

"조금, 지켜보는 게 어떠할까 싶구나."

당장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 하지 않을까.

휘몰아치는 생각이 가리키는 건 그런 판단이었지만 위지혁은 그 반대의 내용을 말했다.

그리고 도진은 거기에 반발하는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스승의 판단에 지금껏 해 왔던 생각의 '반대편'을 생각해 나갔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이 그녀를 만나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이야기를 들어 보라고 가리키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또한 모두 '김도진의 입장'에서의 생각이었다.

그래, 철저하게 김도진의 입장에서의 생각이었지 상대편의 입장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이었다.

간단한 이야기다.

도진이 생각했던 것들을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 그녀의 인생이 송두리째 달라질 수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자신보다 어린 학생 한 명이 나타나 '내가 네가 익힌 무맥의 지존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라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아! 당신이 저의 지존이셨군요!'라면서 기뻐하며, 오체투지하며 복종을 맹세하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해 줄 거라 생각하는 건, 너무 일방적이고 천하태평한 생각이 아닐까.

반대로 생각해 그녀는 아예 자신이 익힌 무공이 무엇인지, 그 역사가 어떻게 되는지를 전혀 모를 수도 있는 것이다.

애초에 위지혁과 장호가 실낱같은 기대를 가지고 했던 '후손이나 전인을 만났을 때 내킨다면, 그리고 상황이 된다면 도와달라'고 한 부탁도 그런 맥락이다.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면, 그리고 그럴 상황이 아니라면 차라리 모르는 체 지나쳐도 좋다는 말에는 도진만이 아닌 상대의 입장 또한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앞서 했던 생각과 반대되는 관점에서, 그리고 부정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래, 그럴 확률이 없다고까지 생각했던 일을 마주해 조금 놀랐던 것이지 처음부터 차분히 생각했다면 평소처럼 대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한 도진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 말씀대로, 우선은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생각은 결국 틀린 것이 된다.

위지혁이 몇 번이고 가르쳤던 중용(中庸).

그 가르침에 따라 섣불리 치우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지켜보며 행동 방침을 정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 아이가 원한다면, 어찌되었든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면 접근해 봐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대로 흘려보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

"예, 스승님 말씀대로입니다."

그녀와 인연을 맺는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커다란 변화를 가져올 일이었다.

이득을 위해 그런 커다란,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변화를 일방적으로 그녀에게 들이미는 건 도진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으며 천마신교의 교리와도 맞지 않았다.

천마신교의 역사가 어찌되었는지, 혹시 '미싱 링크'의 역사에 관해 알고 있지 않은지에 관해서 궁금한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기필코 알아야만 할 건 아니었으니까.

천천히. 시간을 두고 지켜 보며, 알아가며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도진은 스승의 말대로 그녀와의 접점을 특별 수업만으로 마무리짓기로 했다.

추후 도진이 스스로를 소천마라 천명한 뒤에 다시 한 번 인연이 닿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또 그때 생각할 일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다음 독공 개론 수업날이 찾아왔을 때.

'음…….'

도진은 생각지 못했던 변수로 인한 고민을 마주하게 되었다.

* * * *

독공 개론은 주에 한 번, 오후에 3시간이 배정되었다.

시간표상 도진은 일주일에 겨우 한 번을 그녀와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언뜻 보면 시간을 두고 천천히 그녀를 지켜 보고 알아가기로 했던 계획에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는 요소였으나 사실은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독공 개론은 아주 어려운 학문이었으며 혼자서 공부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말인즉슨 수업 내용에 관해 따로 공부하다 모르는 게 있으면 얼마든지 찾아가 조언을 구하는 등의 접점을 만드는 게 가능하다는 소리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이 닥치기 전의 '그럴싸한 계획'이었고 현실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도진은 실전에서 깨닫게 되었다.

"수업 계획서 다들 확인하셨나요? 오늘부터 방학 전까지, 수업은 계획서에 안내드린 대로 4단계로 나누어 진행할 예정입니다."

또박또박하고 맑지만 그럼에도 어쩐지 귀를 휘감는 느낌을 주는 목소리로 강사는 수업을 진행했다.

"1단계는 개론 수업입니다. 독이 무엇인가, 에 관해서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릴 텐데 암기 위주의 수업이 될 예정이에요. 던지는 암기 아니고 외우는 암기! 아시겠죠?"

소위 말하는 썰렁 개그를 강사가 시도한다.

매력적인 미녀 강사의 개그다 보니 분위기는 싸해지지 않고 여기저기서 작게 웃음이 나온다.

강사의 입술 또한 매력적인 곡선을 그렸다.

"지루하시겠지만, 여기서 확실하게 개념을 잡고 가야 추후 수업이 즐거울 테니 조금만 참고 절 따라와 주세요."

도진은 수업을 집중해서 들었다.

마음을 정리했으니 흔들릴 이유가 없었고 소담과 함께 필기를 해 가며 우등생의 모습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 되었을 때.

도진은 깨닫게 된 것이다.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주도해 사람을 사귀는 데에는 재능이 없다는 것을.

도진은 내성적이었으며 유머에도 재능이 없는 아이였다.

그것은 최악의 학창 시절과 불행을 함께 겪으며 더더욱 심해졌다.

감당할 수 없는 불행에 완전히 짓눌리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며, 사회를 살아가며 어느 정도 나아졌다고는 하나 근본적인 부분이 바뀌지 않았기에 한계가 명확했다.

새로운 삶을 살면서 그 '근본적인 부분'은 개선되었다.

여러 사건을 통해 많은 인연을 맺었고 자연스럽게 사귀어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빈틈이 있었으니 '사건이나 계기가 없는 상황에서 주도적으로 제로부터 관계를 쌓아나가는 방법'을 도진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쉬는 시간이나 방과 후 수업 내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거야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시간에 자연스럽게 사적인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방법을 찐따(?) 도진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천재 유지은처럼 그런 것마저 이론화, 수식화해서 머리에 새겨 넣는 것 또한 타입이 아니었고.

'끙.'

무언가 계기가 있으면 좋을 텐데.

가장 쉬운 건 수업 중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거나 저열한 관심을 보이는 녀석을 쥐어박는 건데…….

"……."

강의실 내엔 지극히 샌님적인 성분으로 가득하다.

본래 숭무고와 숭무영재고에는 재능이나 집안, 혹은 둘 다 타고난 녀석들이 많다 보니 세상을 만만하게 보는 녀석들도 많았다.

그리고 한창 때인 만큼 젊고 매력적인 선생을 보게 되면 망설임없이 추근덕대는 모자란 녀석들이 끊이지 않고 나오곤 했다.

높은 명성을 가진 무림인 교사에게야 그러지 못하지만 숭무고에는 그런 무림인만이 아닌 지식으로 교편을 잡게 된 사람도 있으니 생기는 일이었다.

독공 개론의 교편을 잡은 그녀는 그런 일을 당할 수 있을 만한 조건을 갖추었다.

겉보기에 고수처럼 보이지 않으며 실제로도 '연구자'라고 했다.

독은 좀 무섭긴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닌 숭무고에서, 숭무고의 교편을 잡은 지성인이 좀 추근덕거린다고 해서 독을 던지는 미친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기도 힘들다.

그런 조건의 특별 강사가 알고 보니 사춘기의 남학생을 사정없이 뒤흔드는 젊고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그러나.

-와 씨바 독공 개론 강사 미쳤음ㄷㄷㄷ;;

-밤에 잠 못 자겠는데 이 정도면?ㅋㅋㅋㅋ

-좋다 ㅋㅋ 지금 수강 정정한다ㅋㅋ 기다려라 ㅋㅋㅋ

-어휴 시발 저급한 새끼들.

-존나 더럽네.

-냅둬. 어차피 쟤들 아무것도 못함.

-?

-독공 개론 가니까 김도진 있더라 ㅋㅋㅋ

-아.

-아.

-엌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ㅅㄱ링ㅋㅋㅋㅋ

그들에게는 안타깝게도 독공 개론 수업에 도진이 있는 것으로 모든 조건은 의미를 잃게 되었다.

도진이 있는 곳에서 '나쁜짓'을 할 만큼 정신이 나간 학생은 이제 숭무고 내에는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수업은 지극히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학구열에 가득 찬 가운데 진행되었다.

뭐, 그래도 포기 못하고 수업을 신청한 학생이 셋 정도 있긴 했는데 보아하니 얼마 못 가 다시 정정하거나 등수를 깔아주는 봉사를 하는 데서 그칠 듯했다.

'뭐, 꼼수 찾지 말라는 거겠지.'

도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삶에서 배웠기에 조급하지 않았다.

억지로, 급하게 하려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지내다 보면 관계 또한 자연스럽게 쌓일 일이었다.

적어도 2학기라는 긴 시간이 확정적으로 있지 않은가.

그 시간이면 충분히 그녀에 대한 판단을 내릴 만큼의 인연을 맺을 수 있을 거라고, 도진은 생각했다.

* * * *

금요일 저녁.

집행부 활동도 끝나고 본가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던 도진은 생각지 못했던 후배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선배! 저랑 술 마셔요!"

사복임에도 평소처럼 새하얀 차림의 후배는 다름 아닌 약리지였다.

기숙사를 나와 걷던 중에 갑자기 찾아온 그녀는 어리광을 부리듯, 혹은 떼를 쓰듯 그렇게 말했고 도진은 피식 웃으며 그 떼를 받아 주었다.

근처의 분위기 괜찮은 가게의 프라이빗룸에 마주 앉아 도진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뭐 때문에 우리 후배님이 이렇게 심통이 나셨을까?"

맞은편의 약리지는 심기가 꽤 불편해 보였다.

볼을 부풀린 게 제법 귀여운 얼굴이었는데 그건 도진의 입장에서고 약리지는 화가 났음을 강하게 어필하는 중이다.

그 화를 낮추려는 듯 약리지가 맥주를 꼴깍꼴깍 마시고 푸하, 숨을 내뱉은 뒤 말했다.

"선배. 남욱현이라는 선배 아세요?"

"아니. 처음 듣는데."

"2학년 선배인데, 사현이 사촌형이에요."

"아, 그래?"

처음 듣는 이름인데 아예 남은 아니었다.

2학년이면 도진의 동기인 데다 집행부 후배인 남사현의 사촌형이기도 하니 말이다.

"사현이 사촌형도 숭무고 다니고 있었구나."

대한민국 명문가 자제가 숭무고에 다니는 건 입학할 수만 있다면 당연히 그럴 일이었으니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대학교와 같은 시스템의 숭무고였으니 동기라 해도 접접이 없다면 모르는 것 또한 당연하고.

"네. 근데 이 사람, 진짜 싫은 타입이거든요?"

그러면서 남욱현이 싫은 이유를 약리지가 도도도도 늘어놓았다.

"재능이 있는데 노력을 안해요. 거기까지면 개인의 문제일 뿐이니까 괜찮은데, 그러면서 남 노력을 까기 바쁘단 말예요!"

축복받은 재능이 있어서 숭무고에 들어올 수는 있었다. 그러나 전혀 노력을 안하니 꼴지를 다퉜다.

한데 그러면서 상위권의 학생들을 깐다고 한다.

"전에는 도진 선배가 1등인 것도 그저 좋은 무공을 익혔을 뿐이라고 하는데 얼마나 열받던지. 후!"

재능은 차이가 없는데 도진이 수석인 건 좋은 무공을 익혀서일 뿐이라는 것.

도진과 남욱현의 차이는 무공의 차이일 뿐이라는 소리를 했단다.

다시 말하니 또 열이 받는지 약리지는 새하얀 얼굴을 붉히며 맥주를 쭉 넘긴다.

그 모습이 귀여워 도진은 또 피식 웃었다.

도진의 입장에서야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일이다.

한데 그런 일에 약리지가 대신 화를 내 주는 건 신경을 써야 할, 고마운 일이었다.

그렇게 약리지의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니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도진은 알 수 있었다.

웃는 얼굴로 도진이 말했다.

"너, 남 흉보려고 나 찾아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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